[Review] 고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 - 연극 '은하백만년의전쟁사'

글 입력 2023.10.2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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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가 팬데믹을 발표한 지 3년이 지났다. 지금은 마스크를 끼지 않고도 지하철에 탈 수 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도 별 제한 없이 들어간다. 하지만 3년 전에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도 드물고 정보도 많지 않던 시기에 사람들의 경계심과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특정 국적의 사람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일도 당연시되었다. 효율적인 공공보건을 생각하다면 당연하다는 반응과 타자에 대한 혐오 정서를 퍼뜨릴 뿐이라는 반응이 대립했다.


창작집단 상상두목의 연극 <은하백만년의전쟁사>는 지난 몇 년간 변화한 우리의 일상을 바탕으로, 관련된 상상을 끝까지 밀고나가 본다. 연극의 배경은 어떤 미래다. 백신도 통하지 않고 치사율과 전파율도 높은 바이러스 '시리우스80'이 등장한다. 시리우스80은 이제 세계의 새로운 질서와 법의 근간이 된다. 국가는 더 많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확진자로 판정되는 사람을 바로 살처분한다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보건 파시즘'이라 불릴 만큼 극단적인 정책이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이 정책을 지지한다.


이런 세상에서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만난다. 바이러스 감염자인 두 사람은 국가의 살처분을 피해 브로커와 접선, 안전한 나라로 밀항을 하려 한다. 접선 장소는 해안가의 버려진 극장. 이들은 알 수 없는 이의 지시에 따라 이곳에 갇혀 브로커를 기다린다. 그러나 브로커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다. 두 사람은 고립된 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바이러스의 통증을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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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별생각 없이 나눠먹던 음식이 찝찝해지고, 얼굴을 마주보고 나누던 대화도 망설여진다. 전염병은 사람들 사이의 경계, '너'와 '나'의 구분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공중보건을 위한 조치라는 명목으로 '안전한 나'와 '위험한 너'를 구분짓는 시도는 끝없이 일어난다. 국적, 직업, 성 정체성, 연령... 기준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다수와 다른 존재는 쉽게 표적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극 속에서 전염병이 만들어낸 이 뚜렷한 경계를 다시 흐리게 하는 것은 전염병에서 비롯된 고통이다.


<은하백만년의전쟁사>에서 고통은 중요한 요소다. 두 사람이 밀항에 성공하는지 여부보다 고통이 이들을 어떻게 관통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고통이 몸에 머물기 시작하면 그때까지 우리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사라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의 감각에 민감해지면서 미래에 관한 생각도, 과거를 향한 회한도 없어지고 오로지 고통을 느끼는 현재만 존재하게 된다. 고통은 그렇게 몸과 정신의 경계, 나와 너의 경계, 현재와 미래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대감이 생겨난다. 연극 속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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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감염자와 대비되는 것은 이들이 잠든 틈을 타 무장을 하고 방역을 하러 들어오는 인력들이다. 기괴한 가면을 쓴 사람들은 함께 약을 뿌리며 웃고 떠든다. 하지만 한 명이 뒤쳐지자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대감이 없다. 이들은 공포와 의심을 기반으로 겨우 유지되는 공동체에서는 누구든 버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자기 자신이 될 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고통에 잠식되어 가는 가운데, 여자는 남자에게 입맞춤을 부탁한다. 여자는 과거 국가의 감염자 살처분 정책의 지지자였고, 자신의 가족조차 고발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둘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버려진 이들이 공동체의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셈이다. 반대로,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을 모조리 살처분함으로써 살아남은 이들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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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이 '은하백만년의 전쟁사'일까. 연극을 보기 전에는 독특한 제목을 계속 곱씹었는데, 연극을 보는 동안에는 제목을 생각할 일이 거의 없었다. 제목은 우주전쟁을 연상시키지만 실제 연극에는 우주도 전쟁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연극에 나오는 미래는 디테일한 부분이 다를 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반복되어 온 장면이기도 하다. 전염병 얘기만이 아니다. 큰 재난 앞에서 우리는 뭉치기보다 서로를 구분짓고 낙인찍는 게 더 익숙하다. 그 지난한 역사 전체를 '은하백만년의전쟁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연극에서 바이러스로 나오는 배우가 반복하는 대사가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희가 나의 아들이고 딸이다.' 그렇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우리를 통제한다. 전염병은 우리를 바꿔놓고, 우리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총과 칼 없는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전쟁의 대상은 전염병과 같은 1차적 재난에 한정되지 않고, 거기서 파생되는 차별과 혐오까지 포함한다.


3년 전 전 세계를 옴싹달싹 못 하게 했던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팬데믹 이전과 이후는 결코 같지 않다. 전염병은 언제고 모습을 바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인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연극의 '보건 파시즘'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상상이라면,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지 극장을 나서며 상상해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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