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른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면 - 52Hz

글 입력 2024.01.0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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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스마트폰, 각종 SNS...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의 도구가 많은 시대다. 하지만 도구가 많아진 만큼 소통이 더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연희집단 The 광대는 공연 '52Hz'에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외로움을 The 광대만의 움직임으로 무대 위에 표현한다.


주인공 선 씨는 인형의 형상인 어린 아들과 아름다운 바닷속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바다 이야기를 할 때 무대에는 복어, 해마 등 바다 생물이 된 배우들이 돌아다니며 웃음을 유발한다. 아들과 함께 바다를 즐거운 마음으로 관찰하던 선 씨는 어느 순간부터 관찰자가 아니라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아들 인형은 어느새 쓰러진다. 혼자가 된 선 씨는 자꾸만 낯선 공간에서 낯선 존재들에게 둘러싸인다.


펭귄 떼는 플라스틱 컵을 하나씩 물고 군무라도 추듯 몰려왔다가 다시 우르르 사라진다.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던 펭귄들은 어느덧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직장인의 형상이 된다. 무질서해 보이는 이들의 움직임에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규칙이 있다.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 씨는 거기 끼어들지 못한다. 극중 플라스틱 컵에 실을 연결한 모습은 어렸을 때 만들어본 종이컵 전화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연의 플라스틱 컵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한 소통의 도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갖고 있는 플라스틱 컵은 선 씨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겉도는 사람이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선 씨가 소외되고 괴롭힘당하는 모습은 사무실에서 흔히 쓰이는 A4용지를 활용해 묘사된다. 가볍고 잘 찢어지는 종이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무기가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쌓일수록 무거워지고 모서리에 손을 베기도 쉬운 A4용지는 사회에서 교모하게 이루어지는 괴롭힘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선 씨가 아무리 주워도 그 앞에서 사람들은 보란 듯이 계속 종이를 흩날린다. 한 사람에게는 사소한 것이 모이고 모여 누군가를 크게 압박한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된 선 씨의 모습은 '52Hz 고래'를 연상시킨다. 52Hz 고래는 보통의 고래들이 사용하는 주파수가 아닌 52Hz의 주파수를 사용한다고 알려진 고래로, 이론상으로 다른 고래들과 소통을 할 수 없다. 52Hz의 주파수가 측정되었을 뿐, 이 고래의 종류가 무엇인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왜 52Hz의 주파수를 사용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선 씨도 그러하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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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몰린 선 씨는 사람으로서의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한바탕 제의가 벌어진다. The 광대는 국악기를 활용해 선 씨가 고래로 변하는 모습을 몽환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다. 수십 개의 플라스틱 컵이 달린 욕조를 뒤집어쓰고 걷는 선 씨의 모습은 상여를 보는 듯하다. 고래로서 새 삶을 얻은 선 씨는 사람일 때와 달리 힘이 생겼다. 양손에는 그가 사람일 때 한 개조차 거머쥐지 못했던 플라스틱 컵이 가득하다.


하지만 소통의 도구가 많아진 시대라고 해서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듯이, 플라스틱 컵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도 선 씨는 여전히 소통에 서툴다. 수많은 플라스틱 컵들은 이제 다른 존재를 위협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선 씨는 자신을 괴롭혔던 펭귄들에게 복수도 한다. 그가 두 팔을 크게 흔들 때마다 어깨에 매달린 플라스틱 컵들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린다. 그 소리는 빈 껍데기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물론 선 씨 역시 다른 존재와 소통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과거 아들과 함께 이야기했던 쥐치가 커다랗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자, 선 씨는 갖고 있던 플라스틱 컵들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다가가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쥐치에게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모습이 드러나자 놀란 나머지 다시 플라스틱 컵 뭉치로 그를 쫓아낸다. 쥐치는 빛을 잃고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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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에 빠진 그를 구원하는 건 다름 아닌 관객이다. '52hz'는 전통연희의 성격을 띠는 공연인 만큼 초반부 배우들이 복어를 표현할 때 관객이 배우를 살짝 치면 배가 부푼 모습으로 변하는 등 관객 참여 요소가 있다. 그저 재미를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던 관객 참여가 끝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 씨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던 플라스틱 컵이 관객의 도움을 받아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로부터 플라스틱 컵을 받아 든 관객은 기꺼이 이 '52Hz 고래'를 위해 소리를 내준다.


소리가 모이고 모여 마침내 쓰러졌던 쥐치는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쥐치와의 교감에 성공하면서 쥐치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아들과의 소통에도 가능성이 생긴다. 결국 선 씨는 아들과 다시 바다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아들은 처음과 달리 인형이 아닌 사람의 모습이다. 이 소통은 선 씨가 처음으로 자신과 동등한 다른 사람과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하는 순간이다.


집에 가서 52Hz 고래에 관해 찾아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52Hz를 사용하는 고래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는 수없이 많고 바다는 넓으니까. 다른 주파수를 내는 존재는 어디든 있고, 꼭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 다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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