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사람]

글 입력 2023.12.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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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눈은 아주 예쁘고 천천히, 슬로우 모션을 걸어놓은 듯 내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예쁜 눈과 달리 흐린 하늘, 크게 숨을 마시고 겨울의 하얀 입김을 내뱉는다.

 

아주 깊고 크게. 걱정의 크기만큼 입김은 크고 짙다. 그 짧은 입김을 바라보다 입김이 다 날아가기 전에 후 불어본다. 불지 않아도 입김은 날아가지만, 괜스레 작은 투정의 마음으로 깊은 고민이 담긴 겨울 한숨을 불어 더 빨리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다른 입김이 나올 뿐이었다.

 

아주 조용히 고요하게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우울하진 않게 오렌지빛 조명을 켜고, 좋아하는 레몬향이 섞인 풀 내음과 함께 느긋하게 들리는 가사 없는 음악과 함께 눈을 감는 게 좋다. 여러 가지 수집된 기억을 오려 붙인다. 23년도의 내 다이어리다. 봄의 바람을 오려 서울숲에서 본 데이지 꽃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제주도 세화 해변의 여름 바다를 오려 집을 만들기도 한다. 본가 동네의 맑고 투명한 가을 밤하늘을 오려, 눈에 별을 가득 담은 남색 빛 강아지를 만든다. 그리고 겨울의 한숨을 모아 붙여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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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애틋함과 반가움의 계절. 시원 섭섭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마 남지 않은 12월을 따뜻한 재즈와 부드러운 라떼, 반짝이는 트리와 주황빛의 알사탕 같은 조명들과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다가오는 새해이다. 각자의 1년을 고스란히 선물처럼 포장해 담아둔다. 거의 다 써 내려가는 1년이 담긴 편지의 끝자락. 그렇게 추억이 창문에 하얗게 서리면 괜히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자국을 남겨본다.

 

적응되지 않는 새로운 나이. 12월 마지막 날의 나는 1월 첫날의 내 손을 잡으며 1년을 잘 보내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중에 꺼내 볼 23년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선물과 겨울의 하얀을 담은 새 도화지 그리고 24년의 나를 써 내려갈 새 보랏빛 편지지를 선물한다. 어떤 나로 가득 채울지 기대가 된다. 겨울은 다시 하얀의 힘으로 모든 걸 덮어, 빈 도화지처럼 깨끗한 하얀색을 만든다. 다시 새로운 색으로 날 그려보라는 것처럼.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간다. 끝없는 고민의 연속 속에서 매번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세상에 한번 태어난 이상 신나게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내 마음대로 세상을 위풍당당 누비고 다양한 세상을 둘러보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때론 그냥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평온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나를 위해 쓰며 계절과 시간이 흘러감을 온전히 느끼며 조용하게 강아지랑 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건 이상적인 선택의 기로지. 겨울의 한숨에 섞인 내 고민은 옛날부터 현실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느 학교로 진학을 할지. 진로는 어떤 걸로 정할지. 회사는 어디로 갈지. 아니, 회사를 다닐지 프리랜서를 할지. 그렇다면 안정성은 보장되어 있는지와 뭘 이뤄야 할진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루기 위한 노력은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지.

 

그러나 다시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을지. 쳇바퀴처럼 일의 굴레에 반복되고 싶지 않다가도, 삶을 위해 적당히 리듬감 있는 일을 하며 평화롭게 따뜻하게 살고 싶다.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어렵다. 약간 계속된 미래의 선택과 고민에 조금 질린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몇 년 전 나는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사회에 한 이름을 올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내가 잘 되어야 사회가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바짝 긴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큰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게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나이에 대한 강박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나이에 뭔 갈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해내지 않으면 스스로를 나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려 그에 대한 반성으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만들었다. 또 나이에 대한 강박이 생기면 스스로를 변화하기에 늦은 나이라 생각한다.

 

*

 

22살에 기획이 너무 재밌어서 배워보고 싶어 광고홍보과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 당시에 너무 늦었다 생각해 옮기지 못했던 것.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데 배우고 싶었던 것을 나이에 대한 강박으로 배우지 못한 것. 졸업은 이때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 못했던 것. 왜 꼭 졸업을 그 나이에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사회가 그런 분위기라 따라간 타인의 삶. 나이는 먹을수록 과거의 내가 어려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 나이에 대한 책임감을 잔뜩 등에이고 졌다. 근데 글쎄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조금 더 길게 숨을 내쉬어도 괜찮은데.

 

이번 연도에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이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게 됐다. 나이와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꿈들에 계속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아직 어리다는 것. 그러니 그냥 나이에 대한 고정된 생각보단 유연하게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도전을 많이 해봐도 괜찮다는 것. 그러다 보면 길은 만들어질 테니 걸어가면서 잘 다듬어 가면 될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연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찾았다는 것. 삶에 대한 생각에 빠져 어두운 곳까지 너무 깊게 들어가면 다시 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 등불로 삼아 되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바탕으로 삶을 다시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되뇐다. 아직 내 길은 작은 오솔길이다. 대신 바다에서 주워서 모은 예쁜 자갈들로 길이 이루어져 있겠지, 또 레몬향이 섞인 풀 내음과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겠지. 깔끔하게 포장되어 시원하게 뚫린 회색빛 도로도 좋겠지만, 아직은 그냥 내가 지나가는 길을 길로 만들어가는 작고 조용한 오솔길이다. 안정적이진 못하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구불구불 다정하게 만들어온 내 길.

 

한번 생긴 습관은 고치기 힘들다. '마음을 여유로이 가져야지','편하게 마음먹고 천천히 살아가야지' 와는 다르게 매번 빠르게 나를 보채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24년 24살은 마지막 학생의 계단을 밟는 날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의 해. 또 수많은 선택 앞에 놓이게 되겠지. 그 선택은 결정적인 선택이 될 수도, 후회의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우리 그냥 고민은 다양한 색의 종이배로 접어 떠내려 보내자. 하늘이 흐리다. 곧 한 해가 끝난다.

 

서울에서의 삶도 곧 마지막이 다가온다. 정든 모든 것들을 고이 정리해야지.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겨울의 첫눈이 오는 날, 내려오는 눈을 혼자 한참 잡으며 좋아했다. 흐린 구름도 어느새 무거워서 눈을 예쁘게 내리는 걸 보니, 내 마음도 어느 순간 흐려져 무거워지면, 그 마음을 혼자 가득 머금지 말고, 그 마음을 아래로 펑펑 내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내리는 순간도 언젠가 돌아보면 예쁜 순간 중 하나였을 테고, 마음이 내린 뒤엔 또다시 맑아질 테니까. 지금 하는 모든 고민과 불안정한 순간들은 겨울 한숨에 가득 담아 보내고 다시 겨울의 깨끗한 숨을 들이마시자.

 

그렇게 펑펑 내린 마음이 쌓이면, 다시 끔 나는 조심스레 하얀 마음에 발자국 길을 남기겠지. 뒤를 돌아보면 남아있는 건 내 발자국과 따라오는 내 남색 별 강아지의 작은 발 모양뿐이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내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내 뒤를 따라올 나를 위해 하늘색 발자국을 남겨둔다.

 

겨울의 흐린 하늘의 눈꽃이 다시 끔, 봄의 맑은 하늘의 벚꽃이 되길 바라며, 겨울아 안녕.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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