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울타리 안팎, 존재의 경계선 - 가정교사들

글 입력 2023.08.2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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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읽다가 단박에 이해했다.


 

엘레오노르는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 같다. 밖에서 들여다보니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 어떤 때는 꽤 격렬히 움직인다.

 

p.7

 

 

아, 이래서 영화로 만드는구나.


정호연과 릴리로즈 뎁 주연의 영화화 확정이라는 원작 책. 두 배우의 작품은 접한 적이 없어서 출연진에 대한 흥미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원작을 먼저 보고,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이게 나를 들뜨게 했다. 영화 먼저 보고서 원작을 읽거나 원작만 혹은 영화만 본 경우가 다반사였다. 세상에 나온 순서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 별 거 아닌 사소함이 왠지 모를 기대를 만들었다.


시각적, 촉각적, 혹은 이미지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 그런 글이 영상물로 만들기에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도 이와 같았다. 앞서 인용한 세 문장. 짤막한 문장들의 나열인데도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의 위치가 정확히 보인다. 보는 이의 시점이 분명한 동시에 어딘가 훔쳐보는 듯한 위치이다. 지켜보는 이와 지켜봄을 당하는 이. 둘의 구분은 책의 주요 소재이다.

 

 

가정교사들_표1_띠지o.jpg

 
 

남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세 명의 가정교사들. 로라, 엘레오노르, 이네스. 그들이 사는 집의 주인 오스퇴르 부부. 그들이 고용한 하녀들. 인물 구성은 간단하다. 하지만 대화 하나 오가지 않는, 결코 유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나지 않는 문장들 사이로 '파티'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밖에 없는 공간에서 무슨 파티를 벌이는 건가.


파티에 관한 이야기가 쭉 나열되지만, 결코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나가는지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들은 아이들을 지도하는 사람들 아닌가. 파티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다만 소설의 전개는 일반적으로 교사에게 부여하는 의무나 책임, 당연한 도리 따위를 등한시한다.


이 가정교사들에게 중요한 건 '사냥'이다. 한적한 길목에 이따금씩 실수로 들어오는 남자 사냥. 이때의 묘사들은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그들이 입은 옷가지나 행위는 명확히 드러나지만, 사실 사냥은 주안점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왜 사냥을 필요로 하는가이다.


오스퇴르 부부의 집에서 일하게 된 날을 기점으로 그들의 과거는 모두 한데 묶여 사라졌다. 그러니 이곳 말고는 다른 어떤 곳도 없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지금 속한 곳에서 벗어나려는 건 목적지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여기에서부터 어디로. 즉, '어디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 없다. 말 그대로 성립할 수 없기에.


사냥은 그들 나름의 유희이자 어딘가로 도망쳐 보는, 간접적인 벗어남의 경험이다. 게다가 지켜보는 이도 있다. 가정교사들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노인. 관음증은 그들의 행위를 뭉뚱그리기엔 턱없이 납작한 단어다. 나의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지켜보는 사람. 어린아이의 움직임에 한시라도 눈을 떼지 못하는 어른처럼.


비로소 그들은 벗어날 수도 없는 이곳에서 돌봄을 받는다.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보지 않으면 그의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존재마저 알 수 없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을 바라봐주면, 비로소 존재하는 존재로 인정받는다. 가정교사들과 노인은 서로의 존재를 안다. 알기에, 미약하게나마 자신은 이곳에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

 

집의 중심인 오스퇴르에게도 서로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집의 중심은 그를 따라 고분고분 이동했다. 온실에서, 오솔길에서, 과수원에서 그는 후하고 공평하게 자신의 심장에서 나온 깊은 박동을 나눠주었다. 그의 주위로, 그의 삶의 끝자리까지 넓은 원들이 그려졌다. 산다는 것, 그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p.48

 

 

자신을 따라 이동하는 존재들이 없다면, 그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가끔,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가정교사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짐을 싸 이곳을 떠나려 하고, 오스퇴르 부부는 당황하면서도 그들을 붙잡는다. 하지만 매몰차게 뿌리치고 앞만 보고 걷다가 우뚝. 다시 돌아온다. 그제야 오스퇴르 부부는 안심한다. 이렇게 작별할 마음이 전혀 없는 작별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상처를 냄으로써 그곳에 상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듯.

 

사실 가정교사들은 이곳을 떠날 마음 자체가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누군가는 오스퇴르 씨의 역할을 할 것이고, 다른이 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역할도, 낯선 남자들의 역할도, 구혼자들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철문이, 똑같은 정원이, 똑같은 세계가 똑같은 실들로 짜여 있을 것이다.

 

p.86

 

 

이곳이나 다른 곳이나 어느 곳이든 똑같으리라는 생각. 여기엔 착각이 담겼다. 이곳의 모습이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는 착각. 하지만 아이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이벤트를 맞이하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진다. 당시엔 미미한 변화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결국 한 생명의 탄생은 다른 생명 하나를 밀어내었으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 그런데 나의 존재를 처음 보기 시작한, 내가 '나'임을 알린 이가 사라진다면. 그 공간에 머무르는 게 가능할까. 소설의 막바지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 끝이 난다.

 

 

현실 세계는 덥고 가혹하고 지글거리며, 벌레들이 윙윙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p.35

 

 

소설이든 영화든 콘텐츠를 오랫동안 소비하다 보면 각자 선호하는 느낌이 있기 마련이다. 장르라고 칭하긴 어렵다.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상적이지만, 현실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라는 장르가 있을 리 없으니. 취향이라는 이름과 가장 비슷하긴 해도 불분명하고 비유적인 것을 말할 때 '느낌'만큼 모호해서 적절한 표현이 있나 싶다.


안 세르 작가의 글이 딱 따옴표 속의 느낌과 같다. 묘사와 비유, 지시대명사가 즐비한다. 분명히 명확한 사물을 말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미묘하다. 챕터의 구분은 없으나, 여백을 통해 시점의 변경을 드러낸다. 이러한 점 또한 어느 하나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에 잘 어우러진다. 그만큼 머릿속으로 그려낸 영상이 많다. 제작진들은 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그려낼까. 잔뜩 기대하며 기다려야겠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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