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감한 세상을 예민하게 바라보기 [공연]

연극 ‘새빨간 스피도’ (2023)
글 입력 2023.08.2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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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 그러니까 각자도생의 시대다. 내가 이해하는 각자도생은 나를 보호해 줄 넓은 품이나 손 따위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지며 시작되는 것은 타인의 것이 나의 것이었다는 헛된 생각이며, 타인이 누리는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못된 심보다.

 

이렇듯 공존이라는 게 사라지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건 지금 나오는 뉴스만 틀어 보아도 알 수 있다. 전쟁은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여러 국가에서 극단적인 혐오의 말로 정치를 한다. 1세계의 발전을 위해 희생된 3세계 국가들은 극단적인 기후변화에 몸살을 앓고 있고, 이 기후변화에는 다국적 기업의 경영 탓도 있다.

 

이런 추저분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둔감해지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남일 보듯이 하는 것, 이상하리만치 날은 찌고 동시에 비가 쏟아부어도 '오늘은 희한하게 날이 안 좋네요', 말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무심함. 그렇게 해야 '내일을 위한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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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의 복귀


 

연극 ‘새빨간 스피도’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1년도에 했던 낭독극을 제외하면, 극단 신작로의 4년 만의 신작이다. 낭독극 시절의 이 극의 제목은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음차한 ‘레드 스피도’. 이 극은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성별을 원작과 다르게 설정한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 극이다.

 

이전 작품 ‘비평가’에서와 같이 ‘젠더 프리’를 했다는 것은 연극을 감상하기 전, 이 연극의 가장 큰 홍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작품에서도 당시의 관객이 느끼기에는 다소 올드하고 진부할 수 있는 기존의 텍스트에 젠더 프리 캐스팅 연출을 더해 새로운 맥락을 이끌어냈고, 바로 이 지점이 연극 ‘비평가’가 소소하게, 그렇지만 꾸준히 화제가 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2010년대 극으로 비교적 최근의 극이지만, 시대적 배경은 훨씬 더 이전으로 느껴진다. 가장 큰 이유가 등장인물의 발화에서 드러나는 구시대적인 여성관이었고, 이에 대한 비판이 초연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신작로에서는 2018년 재연부터 젠더 프리로 연출하며 같은 텍스트에서 새로운 맥락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배우의 성별이 무대에서 자유자재로 바뀌고, 두 성별이 공존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이 관객에게 새로운 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에 ‘새빨간 스피도’의 젠더 프리도 주목받는다. 무엇보다도 ‘운동선수’에 관한 내용인데, 운동선수는 육체적 특징이 도드라질 것으로 기대되고, 그렇다면 남녀의 차이는 더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궁금해진다는 것이 감상 전의 소감.

 

 

 

‘그거 있잖아, 아메리칸 어쩌고…’


 

원작인 루카스 네이스의 ‘레드스피도’의 주인공은 수영 선수이고, 유망주이다. 언제나 경쟁에서 지지 않는 초인과도 같은 인물. 앞길이 창창하게 뚫려 있는 것뿐이 더 기대될 게 없는 인물. 그리고 그를 둘러싼 도핑 의혹에 주변 인물들이 갈등을 겪는다는 게 연극의 주요 내용이다.

 

원작은 2012년 작으로, 약 십 년이 지난 극이고, 현대사회는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어쩌면 이미 식상해져 버린 주제일 수 있다. 경쟁 종목과 도핑, 무한 경쟁 사회, 치열한 현대 사회, 그래서 우린 경쟁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 함께 같이 가 봐요, 라는 메시지가 통하지 않을 만큼 사회는 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사실 ‘새빨간 스피도’는 뻔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텍스트에서는 이 극의 출신지를 강조하고 싶었던 건지, ‘아메리칸드림’과 ‘어퍼머티브 액션’과 같은 키워드를 넣는다. 중독과 경쟁, 심리적으로 날카로워져 있는 신경증적인 이 이야기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거듭 강조한다. 이런 '미국적인 이야기’는 꽤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아메리칸 뷰티>가 먼저 연상된다. 두 작품은 이들도 흔히 ‘아메리칸드림’ 하면 떠오르는 이민자들이 바라본 미국이 아니라, 이미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계층 상승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까스로 이루어 낸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그들의 조국을 보여준다.

 

‘새빨간 스피도’ 역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국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를 이야기한다. 주인공들이 나도 단계를 밟아 올라갈 수 있고, 좋은 것들만 물려주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이상에서 눈을 돌리면, 붕괴하는 가족과 물질만능주의, 현대인의 소외,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를 인간관계가 있다.

 

극은 마지막에도 해결을 보여주지 않는다. 봉합은 당연히 보여주지 않고, 하다못해 완벽한 파괴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레이의 이야기를 연극이 아니라 이야기 방식으로 타인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 지인은 당연히 레이의 실패와 암울한 미래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극은 지쳐버린 미국인들이 자기 나라를 비관적으로 바라본 이야기이다.

 

물론 수능, 대입, 그다음에 취준, 취업,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테스토스테론, 짧은 손가락, 그리고 ‘전처’


 

이런 뻔한 이야기를 다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와 다른 극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연출 방식이다. 단순히 무대를 어떻게 꾸미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무대 밖에서 관객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는가를 고민한 과정 말이다.

 

신작로의 젠더 프리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성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별이 달라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여성용 수영복을 입은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레이를 당연히 남성으로 인식하면서도, ‘테스토스테론이 부족해 손가락이 짧고, 그래서 수영이 빠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서 트랜스 남성 혹은 남성이 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왜 우리는 배우 경지은의 레이를 남성으로 보는가? 그가 숏컷 머리를 하고 있어서? 무엇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결정하는가? 성별을 정말로 딱 잘라서 단 두개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다중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 역시 이 극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극을 보며 레이를 남성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독은 극의 후반부에나 가서 남성인 것을 알았다는 관객이 많다.

 

이 관객들이 감독을 남성이라고 확신한 이유가 오로지 ‘전처’라는 단어 하나 때문이라는 사실은 제법 흥미롭다. 이들에게는 ‘전처=여자’, ‘여자와 결혼했던 사람=남자’라는 공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퀴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중성적인 스타일링을 한 여성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전처’라는 말이 커밍아웃의 사인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작처럼 감독이 남자였다면 ‘전처’라는 단어가 이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을 텐데, 배우의 성별이 바뀌면서 오독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의도적인 오독은 퀴어에게는 재미있는 유희가 된다.

 

 

 

‘넌 어쩜 그렇게 작은 일까지도 해냈니’


 

‘새빨간 스피도’를 감상하기에 앞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홍보물이 아니라 접근성 안내와 관람 주의 안내문이었다. 이 극은 시/청각장애인의 관람을 돕도록 회차를 나누어 자막 해설, 수어 통역, 음성 해설을 제공했다.

 

이런 해설과 통역은 보통 장애인만을 위한 부가적인 서비스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연극이나 매체의 접근성이 좋아지면 비장애인인 관객들도 작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영화나 시리즈를 볼 때 한국어여도 자막과 함께 보는 것을 선호하는데, 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가끔은 단어 하나로 미세하게 달라질 수 있는 맥락이 잘 전달되기 때문이다.

 

운 좋게 자막 해설과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회차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두 회차 모두 만족스러웠다. 특히 자막 해설은 트럼펫이 사용되는 시점마다 효과음의 의도도 같이 적혀 있어 음악 연출의 의도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수어 통역의 경우 수어를 모르는 사람이어도 통역자의 표정을 보며 인물의 세세한 감정을 볼 수 있었다.

 

관람 주의 안내문을 읽으면서는 일상에서 흔히 감상하는 수많은 작품 속에도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만한 요소가 아주 많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드물게 평안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나에게도 그 목록들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 극장에서 내리는 폭우에도 나는 힘들어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접근성 개선과 트라우마 유발 방지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관객이 볼 땐 작은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저 무대 한 편에 통역자나 스크린이 추가되거나, 아니면 극의 시작에 몇 마디가 더 추가되는 것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상의 정상성을 가진 관객만을 고려한 작품이 아직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작지만 큰 의미가 있다.

 

 

 

예민한 시선으로


 

연출 후기를 보면 ‘새빨간 스피도’의 접근성에 관한 고민은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사실 조금 급하게 준비한 감도 없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굳이 접근성을 개선하는 것을 끝까지 추진한 점이 인상적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사회에서 아주 예민한 사람들만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빨간 스피도’는 굳이 둔감해지기를 포기한 극이다. 한국 사회 역시 레이가 살아가는 곳과 같이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이곳에 사는 예민한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의 부조리와 거기서 오는 서운함은 너무나 큰데,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 서운함을 모르는 체한다. 그래서 이곳의 예민한 사람들은 언제나 '나만 그렇게 느껴?'를 달고 산다. 이 극은 ‘나만 그렇게 느껴?’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 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극은 유독 관객의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다. 어떤 이에게는 형제가 멀찍이서 주먹을 주고받는 그림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비겁하게 가짜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둔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탓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고, 누구나 살기 위해 조금씩은 발버둥 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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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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