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미건조한 삶에도 비는 내리고 [사람]

글 입력 2023.08.2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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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늦여름 끝자락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요즘같이 계절이 제 이름답지 않을 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서로 다른 계절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햇볕이 내 정수리를 달궜지만, 오늘은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의 가을을 설명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가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여름만이 살아남지 않을까. 이상한 계절감을 뒤로한 채 여름과 가을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다 카페로 향했다.


장대비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를 뚫고 통유리에 차고 넘치도록 흔적을 남겼다. 보란 듯이 발을 짓궂게 굴러대는 모습이 어린아이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성질내는 듯했는데, 이렇게까지 비가 내려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다. 애초에 그저 흘러가는 날씨를 놓고 이유를 따지는 행위가 이상한 걸지도.


테이블에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올려둔 채 통유리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여름을 뒤로하고 가을로 향하는 논밭과 창밖으로 홱홱 사라지는 차들에 시선이 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을 타고 내리는 장대비로 옮겨갔고, 장대비가 아닌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졌다.

 

내가 앉은 테이블이 아닌 가로등에 초점을 맞춘 것만으로도 가로등을 제외한 모든 객체가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 카페에 있던 시간 동안 나는 글을 쓸 줄 아는 카메라가 되어 주변부를 모두 뭉뚱그렸다. 타인의 시선에 내가 몇 번이나 담겼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시선 끝에 담긴 나는 대체로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장면은 몇 장이나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관두고 카페를 나오는 순간까지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장르 불문의 폭우만 계속해서 내렸다. 폭우도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이 날의 장대비를 쭉 생각하던 차에 어제 친구 A가 했던 말 한 토막이 생각났다. 그조차도 낭만이라던가.

 

오늘의 재미난 기억만을 도려내어 '낭만'이라고 이름 붙이자. 비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버거울지라도.

 

 

[이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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