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전에 대한 배반 - 2023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nemaf) [영화]

글 입력 2023.08.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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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류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러나 그 배반 또한 인류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삶은 풍족해진다’라는 명제의 진릿값에 이제 ‘거짓’을 부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업혁명 이후 강도 높은 노동에서 벗어나 풍요로움을 누리리라 기대했던 미래의 과학기술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전례 없는 사상자 수를 기록했다. 한 발의 미사일이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와 부상자, 재기할 수 없는 도시를 만들어 냈다. 그에 반해 얹어지는 책임은 가벼웠다. 공정이 분리되며 자신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과, 알면서도 자신의 조그마한 공으로 살인이란 책임을 얻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살인자의 죄책감은 흐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 자신의 행동(나치에게 핵무기를 발명할 기술이 있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을 후회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해방이자 억압이고, 그것은 우리를 더욱더 안전하게 만듦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우리는 안전한가?

 

2023 네마프(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의 주제는 ‘안전한 신체의 확장’이다. 안전한 신체의 / 확장인가? 안전한 / 신체의 확장인가? 우리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점유하는 신체에서부터 물리적 공간이 부재하고 시간에 큰 제약을 받지 않는 네트워크 속으로 우리의 신체를 확장한다. 이때 우리의 신체의 아바타는 실제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든 무언가일 수 있지만, 형상으로 재현되지 않는 개념 혹은 언어, 신념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기술에 내 신체를 재현하면서(하지 않으면서) ‘나’를 재현했을 때, 나는 그 공간에서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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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



예술가는 자신의 몸을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모션 캡쳐, 평면의 왜곡된 아바타 등으로 확장한다. 이때 이들이 네트워크 속을 점거하며 표현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놀이이기도 하고, 네트워크에서 가볍게 반복되는 죽음의 재현이기도 하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은 아닌 아바타의 등장은 우리가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콜라주 한다. 중국 미디어 아티스트 루양의 〈도큐_환상을 뒤엎는 이분법적 충돌〉은 자신의 모습을 3D 스캔하여 만든 아바타 도큐라는 젠더리스 캐릭터를 이용하여 하드 메탈 음악에 맞춰 안무를 보여준다. 이때 도큐의 뒤로 펼쳐지는 배경은 “황폐해진 행성, 불타는 도시”와 같이 우리가 가상공간을 떠올렸을 때 상상되는 배경뿐 아니라, 일본 신사의 모습, 동남아시아의 사원, 도교 사원, 불교 사원 등 아시아의 존재하는 여러 종교 건축물을 뒤섞어 만들어 낸 새로운 콜라주적 공간이다.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 대립으로 이어지는 영상은 이내 음양의 조화를 이륙한 도교적 공간을 창시해 낸다.

 

이영주 작가의 〈스시우먼의 노래〉는 작가 본인의 신체를 극도로 왜곡한 이미지를 회전 초밥집의 초밥 접시에 올린다. 스스로 자신이 스시라며 노래를 부르며 이미지를 담은 접시는 남들이 자신을 담기를 바라며 빙글빙글 돈다. 나는 스시이지만, 가짜 스시, 플라스틱 스시라고 노래하며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들의 편향된 인식을 비틀며,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왜곡하며 서양 남성에게 ‘보이는’ 신체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신체로 변형시킨다. 그 과정에서 신체는 하나의 대상에서 한 명의 주체가 된다.

 

게임 GTA V를 이용한 〈FF 외전 : 흑사병〉, K-POP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하여 자기 자신의 신체를 아바타로 이용한 〈우리의 밤이 미래가 될 때까지 ☆ Kiss of Chaos〉, 밈 문화를 사용하여 POP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The 1975의 생일파티〉, 자기 자신을 본뜬 3D 아바타를 이용한 〈소프트 플레이〉까지 예술가들은 자신의 신체를 확장 혹은 왜곡시키며 게임, 대중음악으로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주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이 확장된 신체로 표현하는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류가 가진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2023년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이어 네트워크 속 SNS로 형성되는 새로운 인터넷 자아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얽힌 스크리닝’ 상영 후 진행된 대화에서 얽힌 스크리닝 기획자 양지윤 디렉터는 TT 엔터테인먼트에 대하여 언급한다. TT 엔터테인먼트는 세계의 자본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소비자의 판단을 흐릴만한 반복되는 유흥거리와 볼 것을 제공하여 소비자의 뇌를 어린아이 수준에서 성장시키지 않아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라는 이야기에 관련한 개념이다. 이는 전두환 정부 시절 시민 우민화를 위한 3S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에서 기술의 변혁이 이를 케이팝 문화, 게임, 소셜 미디어로 확장하였다. 특히 SNS는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게 만들며 개인들은 나르시시스트로 만든다. 소비자는 나를 꾸며내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자본주의의 술수를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이미 자본화된 문화산업은 우리가 현재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일을 어렵게 한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을 배제한 진짜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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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글로컬 부분1: 기억하는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확장을 다룬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들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며, 새로운 정체성 ‘나임’으로 우리는 새로운 신체를 소유할 수 있다.

 

 스페인 작가 산체스 살라스의 〈나의 피부〉는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코 춤을 추는 장애를 가진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휠체어를 탄 무용수, 시각 장애를 가진 무용수, 다운증후군 무용수들은 자신이 춤을 출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플라멩코는 휠체어의 휠을 이용하고, 청각 장애 무용수를 위한 손짓과, 시각 장애 무용수를 위한 소리가 추가된다. 이렇게 확장된 요소를 이용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춤을 춘다.

 

요르단 작가 아흐마드 알야세르의 〈우리의 남자, 여자〉는 죽어서 돌아온 자식의 염을 해야 하는 이슬람교 신자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이 염하는 곳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시체로 돌아온 ‘아들’의 모습에 있다. 그들의 ‘아들’은 머리가 길었고, 가슴이 있었다. 같은 성별의 사람이 시체의 염을 하는 종교적 관습에 따라 아버지가 염을 시도하지만 결국 ‘가슴’을 보고 실패하며, 어머니가 염을 시도하지만 ‘남성 생식기’를 보고 실패한다. 의사인 아버지가 ‘아들’의 가슴 보형물을 제거하는 동시에, 어머니는 여성 명사를 사용하여 ‘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한다. 두 성의 신체적 특징을 동시에 가진 자식의 신체 앞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성별 개념의 허황함을 비통한 부모의 마음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상체는 어머니가 염을 하고, 하체는 아버지가 염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우습지만 전혀 우습지 않은 감상평을 내뱉게 만든다.

 

공산주의와 반공주의가 극도로 대립한 시절 태국의 모습을 그린 〈당신이 남긴 모든 것〉, 영사기사로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조명하며 자신의 기원을 찾는 〈영사기사의 일기〉, 재미교포로 한국의 제사 의례를 살핀 〈제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를 다시 설정한다.

 

 

 

나가며



리투아니아 시각 예술가이자 영화감독 에밀리야 슈카르눌리테의 〈사이레멜리아〉와 〈매장〉을 편집하며 만들어진 트레일러에서 작가는 인어로 분장하고 바다를 헤엄친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관람한 작품 〈아이쿠알리아〉에서도 작가는 인어라는 괴물, 키메라의 모습으로 솔리몽에스강의 하얀 물과 네그로강의 검은 물의 경계를 헤엄친다. 작가가 헤엄치는 곳은 강물의 경계, 폐허가 된 냉전 시대의 잠수함으로, 작가는 키메라라는 타자의 형상으로 전통적 인식 규범에서 탈피하여 우리가 다시 조명해야 할 공간을 제시한다. 


안전한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할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기대가 우리를 배반했던 것처럼. 4차 산업혁명 이후 사회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파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메타버스, 인공지능, 드론, 로봇 등 끊임없이 새로운 메타버스,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또 새롭게 등장한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 기술들의 풍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안전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이어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전이 수반되지 않는 확장이란, 무엇을 만드는지도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채로 핵폭탄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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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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