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우리의 정의할 수 없는 관계는

글 입력 2023.08.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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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 누군가 내 앞길을 먼저 걸어가 준 사람이 있다는 건, 그리고 그게 너라는 사실은 굉장히 든든한 일이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또 깨달았어.


대학원 과정 이후에 취업한 우리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멋진 사회구성원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생각보다 우리 첫 직장 생활은 빨리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지?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너무 힘들었어. 너도 알다시피, 회사가 가하는 성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유하게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가는 요령도 없었지.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보자 했던 나 자신이 슬슬 깎여나가고 무너지고 있더라. 아슬아슬했던 것 같아. 마냥 버티면서 시간을 채우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누군가 그러더라. 마냥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퇴사처럼 하나의 일을 끝내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네게 말해주자, 너는 매우 크게 공감을 해줬지. 나보다 한 달 먼저 퇴사한 너에게 그 말을 들으니 더 확신이 생겼다. 지금 이 회사는 내가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라는 걸. 용기 내서 그만두어도 되고, 이후에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곳은 많다고.


사실, 그게 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그다지 효용이 없었을 것 같아. 꾸준히 직장 생활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같아. 근데, 네가 말해주니까 진지하게 날 위해 고민한 듯한 흔적이 느껴졌어. 고마워. 아마도 그건 네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먼저 만나봤고, 다녀왔고,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쉽게 말하면 '선배' 같은 거지.


이럴 때면 참, 우리 관계는 재밌는 것 같아. 대학교 친구이면서도 '언니와 동생'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떼어낼 수 없는 나이에 묶인 관계이자, 그걸 가끔은 역으로 엎어버리고 선배 또는 스승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맡기도 하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우리 관계가 나는 너무 좋다고 생각해.


얼마 전에 영화 <보통의 카스미>를 보는데 네 생각이 많이 났어. 주인공 카스미는 성애 없는 관계들을 규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굉장히 힘들어했거든. 끝내 자신만의 답을 찾고 홀가분해진 듯해져서 다행이었지. 이와 비슷하게, 쉽게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게 우리 관계가 아닐까? 그런 고민들은 늘 해왔잖아. 어떻게 모든 관계들을 친구 또는 연인 또는 가족으로 그냥 단정 지어 버릴 수 있는지. 시시각각 변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 거야. 그리고 너와 나 사이가 어떤 관계로 정의되든, 나는 너와의 느슨한 끈을 즐기며 계속해서 이어져 있고 싶어.


삶에 답이 없는 것처럼 우리 관계도 정해진 답은 없는 듯 해. 때로는 우리도 삐그덕대겠지. 의견도 다르고 부딪힐 때도 있겠지. 서로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간도 분명 찾아올 거라 생각해. 그래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게 결국에는 끝을 불러온다고 해도.


아마 너도 나 같은 고민을 계속했겠지.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한 후에도 살짝씩 고민되고 미련 남아 후회되는 부분, 아쉬운 부분이 조금씩은 있었겠지. 그런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면, 너도 그런 감정이 똑같이 들 때가 있었다며 경험을 공유해 줬다. 그게 정말 고마워. 내 선택이 틀리지 않다는 걸, 그리고 틀렸더라도 괜찮다고 해주는 너라는 친구가 있어서 인생의 한 순간순간이 빛나고 있음을 깨달아.


다음번에는 또다시, 내가 먼저 길을 갈게. 그 앞에서 또 희야가 천천히 오기를 기다릴게. 때로는 같이 걷기도 하자.

 

애정을 담아, 우리가 좋아하는 능소화꽃을 함께 너에게 보내.

 

 

[이홍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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