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두가 행복한 공연을 위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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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관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조용히,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레 아는 이들도 있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필자는 최근 다녀온 공연에서 양옆 두 사람이 모두 핸드폰을 켠 상태로 공연을 관람하여 상당히 신경 쓰였다. 공연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음에도 지키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장난삼아 같이 간 일행에게 “주최 측에게 알려 끌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이에 대해 두 갈래로 반응이 나뉜다. 한쪽은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거나 너무 심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인터넷상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다. 가끔 뮤지컬을 보러 간 입문자가 적절치 못한 태도를 보였다며 다른 관객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반대로 관객의 부주의한 태도가 너무 자주 보인다는 말도 있다. 공연을 보러 가면 항상 핸드폰을 꺼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공연 중 핸드폰 소리가 들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잦다. 그만큼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달라는 요청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유로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나 시간 확인, 중요한 연락 확인 등 다양한 핑곗거리를 들을 수 있다.
두 입장 모두 이해가 가는 편이다.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에게 강제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공연장은 공공장소라는 점이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자제해야 함을 설득할 수 있다. 서로 공연을 즐기면서 피해를 주지 않는 아주 완벽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공연을 보는 서로 다른 두 입장에 대해
과연 그런 지점이 존재할까? 각자 공연을 즐기는 방식이 다른 만큼 그 합의점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공연 주최 측은 관람객의 소란이 공연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공연이 그 자체로 완전하길 바라는 입장에서 당연하다. 이에 동의하는 관객은 공연을 좋은 환경에서 보기 위해 일부 편의를 포기한다. 핸드폰을 종료하여 공연 중에 울리지 않도록 한다. 기침이나 말소리는 참았다가 인터미션 혹은 공연이 끝난 후에 뱉는다.
이와 반대 입장이 상상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연을 ‘소통’의 일환으로 본다면 받아들일 만 해진다. 공연은 개인이 감상하는 예술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주위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할 수 있다. 혹은 감동을 한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싶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진이나 녹음, 영상 촬영 등을 기꺼이 행한다. 주최 측은 이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잡아내기 어렵다. 핸드폰이라는 초소형 기계가 위 일을 모두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열심히 이들을 변호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의 입장은 전자의 입장에 좀 더 기울어져 있다.
두 입장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가끔 되돌아보아야 한다. 후자의 입장에서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의 권리를 최대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피해를 주는 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관객의 몰입은 산산조각이 나고 연주자는 당황할 수 있다. 공연의 흐름이 관객의 부주의로 무너질 수 있다. 이 점을 그들은 각오하는 걸까. 자신은 절대 그럴 일 없다며 자신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이 소재를 꺼낸 건 위 이야기만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입문자에게 너무 가혹한 대우인 경우도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도 언급하려 한다. 공연 에티켓이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배려’가 중심이다. 그러나 공연을 보러 오는 이유가 오직 다른 관객을 배려하기 위함은 아니다. 공연은 어디까지나 즐기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에티켓 불순응자의 논리와 교차한다. 차이점은 이기적인 행동을 취하느냐 마느냐이다. 공연의 즐거움은 공연 안에서 찾아야 한다. 공연에 몰입하기 위한 과정으로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모습이 바람직해 보인다. 공연 에티켓에 익숙한 이들은 몸에 밴 행동이지만. 입문자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입문자는 배려와 관람의 태도를 배우려는 자세가, 숙련된 조교들은 이들을 위해 친절히 안내해줄 또 다른 배려심이 있어야 한다. 결국 두 태도가 서로 맞닿아야 한다.
공연 에티켓을 가지는 기저
위를 통틀어 공연 에티켓을 가지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 있다고 믿는다. 그중 필자가 가진 마음가짐을 몇 가지 나누고 싶다.
첫째는 ’공연 그 자체에 감사하자‘는 것이다. 공연 외적 요소는 모두 공연 전후에 하도록 하자. 공연을 위해 피땀 흘린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공연은 공연장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무대 위에 있는 이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일전에 공연 관람을 즐기는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아니면 다른 공연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케스트라와 같은 대규모의 인원이 우리를 위해 곡을 연주하는 상황은 절대 가볍지 않다. 모든 공연은 무대 앞에서 증명해야 하는 이와 무대 뒤에서도 뛰어다니는 이의 노고를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을 감사한다면 어떤 에티켓도 자연스레 나오리라 생각한다.
둘째는 ’공연을 즐겁게 관람하자‘는 건데, 즐기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가벼움은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해두자. 공연을 즐길 줄 안다는 건 자신이 무대에 올라와 있는 것과 같다. 무대에서 연출자가 하려는 의도는 모두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바이다. 이때 무대 위의 광경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적합한 공연 관람은 없을 것이다.
오직 그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전율을 다른 순간에 나누어 가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자. 만약 공연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싶어 거리를 두고자 한다면 말릴 수는 없겠다. 그러나 공연을 즐기는 경험과 분석 및 평가하는 경험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공연은 연출과 관람 모두 사람이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하물며 인간에게 기계 같다는 말이 칭찬일 정도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니 공연의 완벽한 계획에서 무언가 흐트러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자.
만약 공연이 계획대로만 흘러갔다면 그건 천운인 셈이다. 인간이 기획하고, 인간이 연출하고, 수백명의 인간을 앉혀놓고 하는 공연에서 실수 하나 안나 온다는 점이 역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그 실수를 내가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본인이 실수할 때 그럴 수도 있다며 넘기고 남의 실수는 평소 행실이 드러나는 악행이라고 할 바에는 두 실수 모두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갈 수 있는 관대한 마음을 가지자. 관용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면 휘발될 불편만 남고 사라질 것이다.
[윤지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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