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8.1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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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출간되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밝은 밤』으로 잔잔한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 감정과 분위기를 세심하게 그려내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신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책 제목처럼 희미해서 나를 비추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나만을 비추고 있었던 빛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비정규직 은행원으로 일을 하던 ‘희원’은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영문과에 편입한다. 희원은 비정규직 여자 강사가 강의하는 영어 에세이 수업을 듣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에 은희와 은희의 한문 선생님이었던 영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둘은 여성, 용산, 그리고 비정규직이라는 연결 고리들로 서로가 닮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희원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희원과 헤어졌지만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그녀들을 잇고 있다.


<몫> - 교지에 실린 정윤의 글을 보고 해진은 이끌린 듯이 대학 교지 편집부에 들어간다. 해진은 자신과 다르게 사회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글을 쓰는 희영과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감을 느낀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좌절은 다시 글을 쓰는 것만으로 극복할 수 있기에 계속해서 글을 쓴다.


<일 년> - 3년 차 사원인 '지수'는 인턴으로 입사한 동갑내기 ‘다희’와 풍력발전소 개소식을 앞두고 카풀을 하며 대화를 나눈다. 대화였지만 이내 그것이 서로에게 향하는 독백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까지는 발화된 적 없던 이야기들이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고, 8년이 지난 뒤 우연히 만나게 된다. 1년간 차에서의 대화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답신> - [네가 자면서 배냇짓을 할 때 나는 네 안에서 분주하게 세워지고 있을 네 세상이 궁금했고 그곳이 어떤 곳이든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너는 무슨 힘으로 매일매일 자라나는 걸까. 어떻게 그토록 작은 네가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는 걸까. 어떻게 너의 잇몸에서 작고 반투명한 유치가 돋아나는 걸까. 네가 그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가락을 꼭 붙잡았을 때, 나는 내가 너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지.]

 

가정 폭력 속에 있는 언니를 지키려다가 혼자 남게 된 ‘나’는 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는 자신이 언니의 교련 선생이자 남편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참히 폭력적이었던 사람 속에서 언니를 지키려고 했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카를 만나기까지 무수한 일들이 있었지만, 조카가 자신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기에 이모는 조카를 영원히 사랑한다.


<파종> - 이혼 후 딸 '소리'와 남겨진 ‘나’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오빠와 함께 지냈다. 엄마가 돌아가신 8살 무렵부터 오빠는 ‘나’를 돌보았다. 오빠는 환갑 전에 그녀들의 곁을 떠났다. 소리는 삼촌과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본다. 5년이니, 멀리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소리에게는 마치 어제인 것처럼 생생하고 가까운 시간이다. 이제 셋이 아닌 ‘나’와 소리 둘이 씨앗을 심는다. 씨앗을 심었으니 이제 새로운 싹을 틔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모에게> - [이모는 뜬금없이 내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모가 그렇게 믿고 있기를 바란다. 나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자신의 삶과는 다르다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미소 짓기를, 안심하기를.]

 

이모는 '희진'에게 늘 인색했지만, 이모가 희진에게 하는 모든 말은 희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모는 희진이 당신처럼 스스로를 위하지 못하는 삶을 살기 바라지 않았다. 희진은 이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이모를 생각하며 하늘을 날며 멀리서 희진을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육십 대 여성인 ‘기남’은 둘째 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오랜만에 만난 우경은 왠지 멀게만 느껴진다. 기남은 혼자 여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홍콩 시내에서 가방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고 만다. 기남이 자신의 실수로 딸과 더 멀어지고 있음을 느낄 때, 손자 마이클은 기남에게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라고 이야기한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은 말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너무 맛있어서 빨리 삼켜 다음 한 입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사탕을 오래 녹여 먹듯이 오랫동안 음미하고 싶은 책이다. 오랫동안 두고두고 꺼내 볼 이야기들이 파스텔 톤의 양장본 표지와 어울린다. 최은영의 소설은 늘 이렇게 뜨겁지 않은, 내 곁에 누군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온기를 남긴다.

 

 

[오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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