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늘하고 축축한 물고기의 따스함 [동물]

검은 물고기, 플라캇 베타
글 입력 2023.07.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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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무서워하던 내가 검은 베타를 키우게 되었다. 나는 물고기의 눈과 비늘의 디테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은 눈에 검은 몸을 가진 베타를 데려왔다.

 

베타의 종류에 대해서 잘 모르던 내가 데려온 친구는 플라캇이라는 종이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베타들은 지느러미가 풍성한 빨간색, 또는 파란색의 베타였다. 그러한 베타들은 하프 문 베타, 베일 테일 베타라고 한다. 수컷 하프 문 베타와 베일 테일 베타는 지느러미가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플라캇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베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짧은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어서 수컷과 암컷의 구분이 어렵다. 내가 이 친구를 데려온 이유는, 더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물고기 사진.png

 

 

물고기란 정말 알 수 없는 무섭고도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지만, 그 움직임에 매료되고 나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인간은 같은 포유동물인 강아지나 고양이같이 땅에서 살고 털이 달려있고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에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그러나 물고기의 서늘한 미끄럽고 축축함, 물 밖으로 나오면 펄떡펄떡 뛰는 그 생생한 징그러움은 때로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어느 날 새벽에 작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물고기가 어항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더니, 바닥에 누워 있었던 적이 있다. 나는 너무 놀라 어항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자고 있는 베타를 깨웠다. 찾아보니 베타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은 아파서일 때도 있지만, 그냥 가만히 쉴 때 그렇다고 한다.

 

 

물고기 침대 사진.png

 

 

베타는 평소에도 지느러미의 무거움을 느끼고, 정적으로 가만히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데려온 친구는 지느러미가 짧아서 그런지 굉장히 활달하고 가만히 있지 않은 아이였다. 시도 때도 없이 헤엄치고, 그 조그마한 20L짜리 큐브 어항에서 살아 숨 쉬고, 잘 때만 땅에서 또는 베타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베타는 일부 다른 종의 물고기들과는 잘 지내지만, 수컷 베타들은 서로 싸울 가능성이 매우 높아, 혼자 키우게 되는 어종이다. 암컷 베타끼리는 잘 지낸다. 그러나 간혹 수컷 베타끼리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암컷과 수컷 베타는 잘 지낼까?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컷과 암컷은 사이좋게 지내긴 힘들지만, 서로 마음에 들면 잘 지낼 수 있다. 또한 베타는 시력이 좋은 편이라 밥을 주려고 다가가면, 밥 주는 사람을 발견하고 뻐끔뻐끔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고기 사진2.png

 

 

다른 물고기들과 잘 지내는 이 물고기를 홀로 키운다는 건 어찌 보면 자유의 구속이 아닐까? 또한 물고기는 본래 강이나 바다로부터 온 존재이다. 그러나 수족관이나 어항에서 길러지는 작은 개량형 물고기들은 다시 강으로, 바다로 돌아갈 수도 없다. 강으로 돌아간다면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하루의 자유가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들을 강이나 바다에 푸는 행위는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을 왜 키우는가? 강아지나 고양이는 안정적이어서, 당장 내일 죽지는 않는다. 물론 죽지만, 죽기 전에 티가 난다. 그러나 물고기는 보다 말도 없이, 표현도 없이 죽는다. 물론 아픔을 티 내지 않는 강아지나, 아픔을 티 내는 물고기도 있다. 그러나 물의 삶은 항상 물의 흐름 속에서 유영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들을 영영 모른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관찰해도 말이다. 그들에게는 물속이 삶의 공간으로 규정지어지고, 우리는 물 밖이 삶의 공간으로 규정지어지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니 물고기가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에게도 삶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죽음으로 향해가는 삶이라는 것을 이 친구를 보면서 나는 보다 선명히 인식한다. 이러한 예측할 수 없음의 물속 삶은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바꾼다. 2~3년밖에 안 사는 동물을 왜 키우냐고 함은,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예측할 수 없음에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다.

 

죽음을 인지하고 산다는 것이, 내가 이 친구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동시에 죽음으로 흘러가는 인간인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건, 책임을 짐과 동시에 그 친구의 마지막 생까지 함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최선일 수도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걸 단지 우리가 이들과 함께 보내는 온 시간이라는 유대로, 느낌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사람보다 사소하고 미묘하고 복잡하다. 그러니까, 더 소중하며 깨질까 두렵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누군가에게도, 그 흔한 일상에서 깨질까 두려운, 어항이 엎어지고 깨져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무언가가 다가온다. 그런 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에디터 심선용.jpeg

 

 

[심선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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