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늘하고 축축한 물고기의 따스함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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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무서워하던 내가 검은 베타를 키우게 되었다. 나는 물고기의 눈과 비늘의 디테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은 눈에 검은 몸을 가진 베타를 데려왔다.
베타의 종류에 대해서 잘 모르던 내가 데려온 친구는 플라캇이라는 종이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베타들은 지느러미가 풍성한 빨간색, 또는 파란색의 베타였다. 그러한 베타들은 하프 문 베타, 베일 테일 베타라고 한다. 수컷 하프 문 베타와 베일 테일 베타는 지느러미가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플라캇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베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짧은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어서 수컷과 암컷의 구분이 어렵다. 내가 이 친구를 데려온 이유는, 더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물고기란 정말 알 수 없는 무섭고도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지만, 그 움직임에 매료되고 나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인간은 같은 포유동물인 강아지나 고양이같이 땅에서 살고 털이 달려있고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에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그러나 물고기의 서늘한 미끄럽고 축축함, 물 밖으로 나오면 펄떡펄떡 뛰는 그 생생한 징그러움은 때로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어느 날 새벽에 작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물고기가 어항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더니, 바닥에 누워 있었던 적이 있다. 나는 너무 놀라 어항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자고 있는 베타를 깨웠다. 찾아보니 베타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은 아파서일 때도 있지만, 그냥 가만히 쉴 때 그렇다고 한다.
베타는 평소에도 지느러미의 무거움을 느끼고, 정적으로 가만히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데려온 친구는 지느러미가 짧아서 그런지 굉장히 활달하고 가만히 있지 않은 아이였다. 시도 때도 없이 헤엄치고, 그 조그마한 20L짜리 큐브 어항에서 살아 숨 쉬고, 잘 때만 땅에서 또는 베타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베타는 일부 다른 종의 물고기들과는 잘 지내지만, 수컷 베타들은 서로 싸울 가능성이 매우 높아, 혼자 키우게 되는 어종이다. 암컷 베타끼리는 잘 지낸다. 그러나 간혹 수컷 베타끼리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암컷과 수컷 베타는 잘 지낼까?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컷과 암컷은 사이좋게 지내긴 힘들지만, 서로 마음에 들면 잘 지낼 수 있다. 또한 베타는 시력이 좋은 편이라 밥을 주려고 다가가면, 밥 주는 사람을 발견하고 뻐끔뻐끔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물고기들과 잘 지내는 이 물고기를 홀로 키운다는 건 어찌 보면 자유의 구속이 아닐까? 또한 물고기는 본래 강이나 바다로부터 온 존재이다. 그러나 수족관이나 어항에서 길러지는 작은 개량형 물고기들은 다시 강으로, 바다로 돌아갈 수도 없다. 강으로 돌아간다면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하루의 자유가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들을 강이나 바다에 푸는 행위는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을 왜 키우는가? 강아지나 고양이는 안정적이어서, 당장 내일 죽지는 않는다. 물론 죽지만, 죽기 전에 티가 난다. 그러나 물고기는 보다 말도 없이, 표현도 없이 죽는다. 물론 아픔을 티 내지 않는 강아지나, 아픔을 티 내는 물고기도 있다. 그러나 물의 삶은 항상 물의 흐름 속에서 유영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들을 영영 모른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관찰해도 말이다. 그들에게는 물속이 삶의 공간으로 규정지어지고, 우리는 물 밖이 삶의 공간으로 규정지어지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니 물고기가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에게도 삶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죽음으로 향해가는 삶이라는 것을 이 친구를 보면서 나는 보다 선명히 인식한다. 이러한 예측할 수 없음의 물속 삶은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바꾼다. 2~3년밖에 안 사는 동물을 왜 키우냐고 함은,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예측할 수 없음에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다.
죽음을 인지하고 산다는 것이, 내가 이 친구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동시에 죽음으로 흘러가는 인간인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건, 책임을 짐과 동시에 그 친구의 마지막 생까지 함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최선일 수도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걸 단지 우리가 이들과 함께 보내는 온 시간이라는 유대로, 느낌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사람보다 사소하고 미묘하고 복잡하다. 그러니까, 더 소중하며 깨질까 두렵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누군가에게도, 그 흔한 일상에서 깨질까 두려운, 어항이 엎어지고 깨져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무언가가 다가온다. 그런 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심선용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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