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언제나 옳다 [도서/문학]
-
인간인 우리가 잘하면서도 잘하지 못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 나는 자기확신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가 걷고 있는 길 혹은 각자가 하는 생각이 옳다고 믿는 한편, 끊임없이 이 길 혹은 이 선택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믿음이 강한지, 의심이 강한지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 상반되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음은 틀림없다.
길리언 플린의 <나는 언제나 옳다>는 제목만 보면 다소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목을 놓고 줄거리를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적었던 주인공이 자신만의 정답을 만들어 가는 성장 소설’ 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추측과 이 소설의 실제 줄거리는 사뭇 다르다.
이 소설은 매우 짧으며 장이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크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지점이 있다. 작품은 주인공(‘나’)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시작한다. ‘나’는 남성들의 성적인 행위를 돕는 여성이다. 손으로만 일을 도울 뿐, 직접적인 매춘과는 거리가 있는 일을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 엄마와 구걸을 하며 먹고 살았다. 돈을 줄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가 좋아하게 생긴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준다. 허접스러운 자수성가풍의 이야기나 체제 비판적인 이야기가 그 예다. 열여섯 살이 된 후에는 엄마에게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어른이 된 ‘나’는(현재 나이는 서른 살이다) 지금은 ‘성스러운 손’이라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타로 카드와 크리스탈 구를 내세워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한편, 뒤쪽에서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유사 성매매를 하는 곳이다. ‘나’는 뒤쪽에서 일을 하는 여성인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여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앞쪽 일로 업무를 바꾸게 된다.(하지만 뒤에서 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다. ‘나’를 찾아오는 몇몇 손님에게는 계속 하던 일을 해 주었다.)
‘앞에서 하는 일’은 사기에 가까운 일이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며 점쟁이가 된 것처럼 그의 고민에 대해, 그의 미래에 대해, 그가 해보기 좋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어느 날 아주 특별한 손님 ‘수전 버크’가 찾아온다. 수전은 “내 삶이 찢겨나가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간다. 그리고는 나흘 후에 다시 찾아오고, 다음 날 또 다시 찾아온다. 수전의 고민은 이러했다. ‘1년 전에 새 집으로 이사했는데, 그때부터 의붓아들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집에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전의 집으로 가게 된다.
분위기 전환은 여기서 일어난다.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하게 일상적이고 가볍게 흘러갔다면, 수전의 집에 발을 들이고부터는 흡입력 있고 미스테리하며 무겁게 전개된다. 서스펜스가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이 부분부터가 이 책의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전의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수전의 의붓아들 마일즈의 이야기, 수전의 비밀 등이 마구 흩뿌려지는데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이야기 뒤로 갈수록 수전이 겪는 문제들이 보인다. 그런데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혼란이 온다. '나'의 고객이었던 수전이 사실 음험한 의도를 숨기고 있고, 문제가 있다고 들어 온 마일즈가 사실 그나마 정상인 존재였다면? 아니면 정말 '나'가 들어 온 이야기가 정답이라면? 이야기 끝까지 정확하게 주어지는 정보가 없는데,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큰 충격과 여운을 동시에 준다.
이 소설은 한 가지 이야기면서 여러 플롯이 복합적으로 전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나', 마일즈, 수전을 제시해 놓았는데 독자로 하여금 셋 중 그 어느 하나 믿을 수 없게 만든다. '나'의 시선을 따라 수전을 믿어 왔지만, 마일즈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전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일즈를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마일즈는 '나'를 위협했던 인물이고 '나'의 시선에서 마일즈는 이미 올바르지 않은 인물 중 하나다. 독자의 관점에서는 이야기의 서술자인 '나' 또한 믿을 수 없다. '나'의 행동을 올곧게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지만 결국 모든 인물을 의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어느 상황에 빠져 그것을 겪고 있으며, 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믿느냐와 무엇인가를 의심하느냐가 중요한가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언제나 옳은가
나는 나의 선택이 항상 정답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후회하는 일도 많고, 돌이키고 싶은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상황은 틀림없이 내가 옳았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그 상황들을 결코 내가 옳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횡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내가 옳았으면 굳이 '내가 옳았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그 자체로 옳은 것인데. 때문에 앞서 말한 '어떤' 상황은 되돌릴 수 없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상황. 내가 맞았다고 믿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상황이 아닌가 싶다. 소설 속에서 '나'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원제는 <그로운업(The grown-up)>이고, 우리말 작품을 내면서 <나는 언제나 엃다>로 바꾸었다고 한다. 나는 이 변경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결말이 매우 쇼킹하다. 내가 소설 속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독자로서의 나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로 머리가 아파오는 한편 '나'의 선택이 옳았으리라고 믿게 된다. 자연스레 독자를 소설 속에 참여시키는데, 그 트릭이 인상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수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