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부의 얼굴들 - 4 [여행]

글 입력 2023.06.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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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저녁이 내려앉자 사람들의 표정은 점차 어둠 속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북적이는 거리에서 흐릿해지는 얼굴 위로 여러 얼굴이 겹쳐 보였다. ‘싸요. 싸.’ 어설픈 한국어로 호객하는 어른들, 창문이 없는 지프니에서 거리의 한국인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한국어로 가득한 거리에서 한국인을 향해 호의를 건네는 모든 얼굴들을 향해서 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두르거나, 영문도 모른 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 얼굴들을 절대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쳐간 얼굴 대신 거리의 모양이라도 기억하기 위해 있는 힘껏 찬찬히 걸었다.

 

제법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부른 배를 달래며 메르카토 야시장에 들렀다. 줄줄이 늘어진 알전구가 세부의 밤을 제법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광장에 무심하게 놓인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공허한 광장 한 쪽 작게 마련된 무대에서는 한껏 멋을 부린 세부의 청년들이 기타를 치고, 드럼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관객이 없는 광장에서 그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밤과 시장의 만남은 언제나 여행객을 설레게 했고, 나는 홀린 듯 어느 한 가게 앞으로 움직였다. 한국어로 메뉴를 써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주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깔라마리 튀김과 맥주를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았다. 세부의 밤은 습하고 무거워지고 있었다.

 

튀김 한두 조각을 먹고 더부룩한 속을 달래려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쭈뼛쭈뼛 근처로 다가왔다. 멀리서부터 아주 조금씩, 내가 앉은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던 아이는 마침내 결심한 듯 나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아 모른 척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마시던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조셉. 9살이라고 했다. 짙은 갈색 피부 위에 거뭇하게 변한 흰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5살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체구가 유난히 작았다. 검고 맑은 두 눈은 내 앞에 놓인 음식을 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집이 어디니?

집 없어요


엄마는 어디 계시니?

엄마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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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다고 했고, 이거라도 먹겠냐는 물음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튀김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아이는 그릇을 받아 재빨리 한 칸 옆 자리로 옮겨 앉았고, 소중한 것을 지키듯 내게서 몸을 살짝 돌려 몸을 웅크린 채 튀김을 먹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손이 야무지게 움직였고, 눅눅하게 식은 깔라마리 튀김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마신 후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내 쪽을 힐끔 보고는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나는 바로 옆 가게에서 주스 하나를 더 주문했다. 여러 과일이 걸쭉하게 섞인 과일주스 한 잔을 조셉의 앞에 두고 눈인사를 건넨 후 야시장을 나섰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그랩을 부르면서 저곳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아무것도 두고 온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떠났다.

 

다음날 아침 만난 가이드는 세부에 그런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부모가 죽거나,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거나, 도망쳐서 혼자가 된 아이들. 엄마도 집도 없고, 언제나 배가 고픈 아이들. 한 아이에게 무언가를 주면 다른 아이도 받으려고 쫓아올 테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다. 아침부터 햇볕이 타들어가듯 쨍쨍했다. 매일 같은 무더위가 오늘은 어쩐지 슬퍼 보였고, 역시나 한바탕 익어갈 거리에서 맑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떤 아이들도 괜스레 그리 보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여운이 오래 남아 괜스레 인터넷으로 세부를 검색해보던 차였다. 내가 다녀왔던 관광지와 거리를 소개하던 여러 여행기를 살피던 중 나는 멈칫했다. 막탄의 한 가게 사진 속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아이가 서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짙은 갈색 피부에 흰색 민소매, 그리고 유난히 작은 체구. 초점이 살짝 번진 사진 한 쪽에 있는 그 작은 아이의 이름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너구나. 네가 맞구나. 너의 세련된 거짓말에 헐거운 관광객인 내가 한방 제대로 먹었구나. 나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어쩐지 점점 깊어져서, 마침내 나는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네가 맞아야 해. 너여야만 해. 세부에 무언가 두고 온 것처럼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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