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도서]

우주인이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한국살이
글 입력 2023.06.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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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우리를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전환해 주는 힘이 있다. 첫 장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만 보고도 말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보는 순간에는 ‘우울과 불안을 안고 사는 나’가 떠오르고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을 마주친 순간에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나’가 된다.

 

그렇다면, 책 표지를 보는 순간 ‘한국에 여행 온 외계인’이 되는 책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그런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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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얼핏 봐도 가이드북처럼 생긴 간결한 표지와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이 한눈에 시선을 끌었다. 지나가던 전시 관람객 1이던 나를 단숨에 우주 여행자 독자로 만드는 책의 재치가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진짜 이유는 도서 아래 소개 문구 때문이었다. “한국은 당신이 그동안 겪었던 그 어느 곳보다 모순적인 나라로 기억될 것임을 보장한다.”

 

이 책은 가이드북을 표방하고 있지만 여행객에게 한국의 자랑, 관광명소를 알려주지 않는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 한국살이에 능숙한, 보통의 한국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할 보통의 한국인이란, ‘한국에 거주하는 중장년 남성’의 시선에 어긋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남성이라는 성별에 권력이 편중된 국가다. …당신이 보통의 한국인으로서 아무런 언쟁 없이 생활하고 싶다면, 가급적 이 책의 지침을 따르자. 지침을 하나둘 따르다 보면 당신을 ‘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이가 없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당신이 노동 현장에서 해고되거나 소외되는 일, 특정 무리에서 배제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3p

 

 

책의 들어가는 글에 적혀있듯, 이 책은 한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제삼자에게 설명해 준다. 진짜 한국인 독자로서는 웃기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답답한 대한민국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주 여행자는 각 장에서 아래와 같은 기본 지식, 태도를 배울 수 있다.

 

1장 기본 정체성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이니 성별을 설정할 수 있는 우주 여행자라면 XY 염색체로 시작할 것.

비정상적인 서울 중심 생태계에 익숙해질 것.

학벌과 부동산에 영혼을 걸 것.

 

2장 삶을 대하는 태도

장애인, 여성, 아동을 외면하고 차별할 것

성소수자를 배척할 것.

비건을 유별나게 볼 것.

 

3장 환장의 나라, 한국

보행자보다 운전자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 무조건 차를 타고 다닐 것.

자신만의 공정과 팩트에 집착할 것.

무책임한 정부 아래에서 각자도생하며 살아남을 것.

 

저자는 배척과 혐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한 한국 사회의 ‘환장하는’ 모습을 과감한 문체로 풀어나간다. 뼈가 아프게 묵직한 내용들은 읽으면서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실제로 한국 보수 정당의 한 국회의원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 정신질환자가 많이 나온다”라는 말을 사석이 아닌 공석에서 발설하기도 했다. 이 국회의원이라는 존재는 시민의 호감도에 따라 밥줄이 결정된다. 그런 사람이 ‘정신질환자’를 운운하며 무주택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건 무얼 뜻하겠는가. 그 발언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확신, 확신 속에 오는 안정감이 밑바탕에 깔려있을 것이다. -32p

 

 

한국에는 ‘성평등’, ‘페미니즘’, 여성 인권’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자료와 근거에 기반한 토론이 아니라 드잡이와 우기기로 밀어붙이는 사람들, 아니 남자들이 너무나 많다. 논의 자체가 진전되지 않으니 설득의 기회도 없는 셈이다. 차라리 돌을 인간으로 만드는 게 나을 수준이다. -51p

 

 

한국에서는 이 영유아기 지구인, 즉 어린이의 입장을 거부하는 오프라인 매장들이 있다. 표면적 명분은 매장 내 위험한 요소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그냥 매장 운영자들의 나태함과 이기심 때문에 어린이 입장을 막고 있다. ‘아동 거부 업소’라는 정확한 명칭도 쓰기 꺼려져서 ‘노 키즈 존’이라는 타 국가 언어를 빌려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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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후 가장 먼저 든 감상은, 정말 우주인을 만나 우리나라를 적나라하게 설명한다면 나는 끝없이 부끄러워지겠구나- 였다.

 

우리나라에는 소개할 만한 자랑할 거리도, 좋은 점도 분명 많다. 다만 차별과 혐오, 배제가 만연한 상황에서 그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이 말하고 있는 ‘좋은 세상’은 ‘누군가’를 지우고 본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장애인, 여성,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며

지방 거주인, 저학력자, 무주택자이기도 하며

채식주의자와 인종차별 반대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보통의 대한민국이 말하는 좋은 세상에서 지워진 ‘누군가’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를 지우기도 한 사람이라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당신도 이 책을 꼭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이상한 나라의 모순된 이야기들을. 그리고 당신도 그 ‘보통의 한국인’이 되어 모순을 더해가고 있지 않았는지,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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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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