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맞지 않는 옷 같은 건 없어 [영화]

글 입력 2023.05.0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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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이버전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효율과 이해,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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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시간을 죽일 때 몇 분 내외로 편집된 예능 클립 같은 것들을 종종 보곤 하는데, 여러 번 돌려봐서 이젠 내용을 외울 지경이면서도 눈에 띄면 홀린 듯 클릭하게 되는 영상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으러 간 방송인 유재석의 모습을 담은 짧은 클립인데, 가장 잘 어울리는 색채군과는 별개로 자신이 좋아하는 색들에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유머 포인트인 영상이다. 컬러리스트의 진단이 어떻든, 얼굴 밑에 갖다 댄 천 색과 안색의 관계가 어떻든, 얇은 테 안경과 쨍한 파랑을 고집하며 일명 '워스트' 조합에 되레 화색을 띠는 아이러니한 광경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영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 가장 먼저 유쾌함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색과 패션 소품을 보고 웃음을 활짝 짓는 이의 모습이 왠지 보기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 어울리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을 꿋꿋이 좋아해나가는 마음. 분명 영상의 부제는 '자기 고집 확실한 진상 고객'이었지만(유머 포인트를 위해 일부러 과장된 리액션을 보여준 측면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고집이 내게도 필요한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옷 한 벌, 화장품 하나를 살 때마저 동동 떠서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조금 더 잘 어울리는 완벽한 색이 있지 않을까 하고 수만 가지 고민을 하는 스스로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퍼스널컬러가 유행하기 이전에도, 대략적으로 나에게 어울릴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도를 구분하는 일은 선택의 효용과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으레 거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유형이고, 이 유형은 이런 색상과 이런 디자인을 입어야 한다는 세간의 말들이 그럴 듯한 용어들과 함께 '정립'되고 나니, 너무나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분류와 명칭이 가지는 힘이랄까. 스스로를 잘 아는 일은 자신감을 더해주기도 했지만, 워낙에 소심하다보니 이런 유형화로 인해 오히려 걱정거리가 보태진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잡념 많은 삶에, 이 립스틱이 핑크 코랄인지 오렌지 코랄인지까지 고심해야 한다니! 

 

비단 퍼스널 컬러뿐일까. 이젠 트렌드라 칭하기에도 식상한 감이 있는 mbti, 그를 기반으로 한 심리테스트, 인터넷의 공감성 유머글, 각종 인간군상을 흉내내는 유튜브 영상…. 매일 접하는 콘텐츠들은 사람들의 특성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명명된 어떤 것을 역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또 분류하는 온갖 유형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유형화는 단지 최근의 경향이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가지런히 정리된 파스타 뭉치 속 삐져나온 면 한 가닥마저 참기 힘들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것을 잘 정돈했을 때의 묘한 쾌감과 재미, 눈 앞의 광경이 단정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물며 한 길 속을 모르겠는 사람들, 또 그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쩌면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은 본능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참 다채롭게 이상하고 아름다운 요 지경의 세상에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고 대처하기 위한 생존 전략. 혹은 그렇게 복잡한 와중에도 스스로를, 또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시도. 좀 더 거시적으로 생각해보면 근대 이후 인류가 사회를 굴려오던 원리의 기저에도 이런 분류의 습성(정확히는, 분류에 기초한 분업)이 있었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효율과 이해를 위한 분류가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를 설명하던 것들이 틀이 되고 경계가 되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면. '나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오히려 압력으로 느끼게 하는 외부의 시선이, 사회의 형태로 공고해진다면. 조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립스틱 하나를 내 마음대로 고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전반이 그런 유형화의 힘 아래에서,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이래야 한다는 목소리 아래에서 디자인 된다면. 그리고 바로 여기, 할리우드의 경쾌함으로 그런 묵직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가 있다. 

 

 

 

2. 영화 '다이버전트': 맞지 않는 옷 같은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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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로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이버전트'는 폐허가 된 근미래, 얼마 남지 않은 인류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섯 개의 분파 체계를 이루었다는 디스토피아 설정을 배경으로 하는 SF물이다. 캐치 프레이즈인 "하나의 사회, 다섯 개의 분파!"로 요약되는 세계관이 영화의 전개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앞선 물음에 대한 영화의 답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다섯 분파는 애브니게이션, 애머티, 캔더, 돈트리스, 에러다이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이타성, 평화, 정직, 용기, 지식을 상징한다. 각 분파는 상징하는 미덕에 걸맞은 역할을 맡고 있는데, 애브니게이션은 정치와 행정을, 애머티는 농업을, 캔더는 사법을, 돈트리스는 치안을, 에러다이트는 학술 및 연구를 담당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16살이 되는 해에 앞으로 자신이 속하게 될 분파를 선택하면서 성인이 되며, '핏줄보다 분파'라는 슬로건이 통용될 정도로 이곳에서 분파는 절대적이다.

 

주인공 트리스는 분파를 결정하기 전, 어느 분파에 가장 적합한지를 진단 받는 테스트에서 자신이 바로 다이버전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이버전트는 어떤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을 칭하며, 그들은 존재 자체로 체계 유지에 위협적이라고 여겨져 언제든 제거 당할 수 있다. 이에 트리스는 자신의 진단 결과를 숨기고, 출신 분파인 애브니게이션이 아닌 돈트리스를 선택해 가족의 품을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렇게 트리스는 다이버전트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돈트리스의 생활에 적응해 나가며, 이후 체제를 장악하고 타 분파를 지배하려는 에러다이트의 음모를 알게 되어 그를 저지하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큰 골자다. 

 

소설을 영화화한 만큼, 세계관의 디테일을 파고 들자면 사실 얼마든지 얘깃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얼핏 연상시키는 분파 설정을 보고 이상사회와 분업에 대한 논의를 펼쳐볼 수도 있겠고, 철학적 메세지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따져볼 수도 있겠다. 다만 이번 글의 맥락에서 특히 조명하고 싶었던 부분, 그리고 영화를 재차 감상하며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단연 입체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극단적 유형화의 비유로서 분파 체계가 지니는 의미를 영화가 표현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다양한 면모를 가졌으며 그 중 한 가지만을 추출한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점을 트리스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는데, 그 점이 잘 드러나는 몇 가지 포인트들을 꼽아 보았다.

 

먼저 트리스가 나고 자란 애브니게이션은 전술했듯 이타성(selfless)이라는 이념을 분파의 이상으로 추구한다. 영화의 도입에서 분파 테스트를 앞둔 트리스는 애브니게이션에 배정되지 않으면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무섭지만, 이곳에 남는 것이 더 두렵다는 독백을 내뱉는다. 그리고 테스트 속 트리스의 무의식에는 거울에 반사된 무한한 잔상들이 나타난다. 거울 속의 수많은 트리스처럼, 트리스는 수많은 자아를 가졌다. 트리스는 이타적일 수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 칼을 쥘 수도 있고, 상황을 타개할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을 애브니게이션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트리스가 그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트리스의 무의식과 달리 애브니게이션은 거울조차 오랜 시간 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버려야 하는 곳이다. 이런 대비는 트리스가 분파 속에서 느끼는 괴리감을 보여준다. 결국 자신이 다이버전트임을 알기 전에도, 체제에 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트리스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어떤 분파를 택하든 상관 없다는 것. 안전히 가족의 곁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지만, 트리스가 용기의 미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돈트리스행을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을 깨버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먼저는 익숙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을 깨기 위해, 그리고 애브니게이션 안에서는 알 수 없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트리스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첫 발걸음을 뗀다. 그렇게 트리스의 성장은 돈트리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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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분파에서 이적해 온 친구들과 함께 돈트리스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나간다.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면 영원히 퇴출되어 무분파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룰 속에서 고전하지만, 그의 끈기와 잠재력을 눈 여겨 본 훈련관 포의 도움으로 차츰 성장해나간다. 결국 전쟁 게임에서 활약하며 트리스는 돈트리스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 받지만, 트리스의 순위가 올라가면서 밀려나간 친구 알이 트리스를 제거하려 들다 저지 당하고,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 사건은 트리스의 시련과 극복이라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파 체계의 억압적인 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용기있는 자가 선택하는 돈트리스, 어떤 이유든 알이 그곳에 오게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알에게도 분명 용기있는 모습이 있었을 터다. 그것이 테스트 결과였든, 테스트 결과와는 상관 없는 알의 선택이었든. 전자라면 적어도 알이 가진 성향들 중에서는 돈트리스로서의 기개가 가장 두드러졌다는 것이고, 후자라면 분파를 떠나올 만큼의 결단을 할 정도로 알이 용기를 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그 자체로 유의미한 사실이다. 애초에 사람의 성향을 완벽히 수치화해서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다른 사람에 비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용기있는가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용기 자체를 낼 수 있는 사람인가의 문제다. 다른 분파의 이념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의 문제가 아닌, 그런 마음이 존재하는가의 문제. 그건 가능성의 문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여받아야 하는, 그의 잠재력에 대한 기회. 하지만 분파 체계는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다. 돈트리스의 방식은 더더욱. 


그리고 트리스의 가족들 역시 이런 분파 체계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인물들이다. 트리스는 애브니게이션이 오빠의 천성에 꼭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오빠는 트리스에게 분파를 선택할 때 가족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생각해야 한다는 묘한 조언을 남기고 자신 역시 에러다이트 행을 택한다. 트리스의 엄마는 트리스가 애브니게이션에서의 생활을 어딘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으며, 다이버전트임이 발각되어 쫓기는 트리스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돈트리스 출신으로서 애브니게이션으로 분파를 옮긴 이적자임을 밝힌다(출신 분파와 자신의 성향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경험은 트리스가 느끼는 이질감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망설이는 것은 딸을 사지로 내모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납득한 트리스의 아버지는, 항상 남을 먹이고 입히던 손으로 최전선에 나서 적을 죽이고 스스로를 희생한다. 

 

애브니게이션이었지만 돈트리스의 용기를, 혹은 에러다이트의 지적 욕망을 가졌던 트리스와 가족들은 모두 핏줄보다 분파라는 절대적인 원칙보다는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고, 트리스의 행보에서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들(분파 선택, 그리고 다이버전트로서의 생존)은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의외의 면모들을 바탕으로 발생했다. 결국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은, 다시 말해 삶을 굴려나가게 하는 것은 인간의 입체성이었다는 것이다. 작중 돈트리스에서의 훈련을 이끌다 트리스가 다이버전트임을 알아챈 훈련관 포는 자신 역시 다이버전트임을 밝히는데, 다섯 분파의 모든 표식을 새긴 타투를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포의 대사는 이러한 영화의 메세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놓았다.  

 

 

"난 하나에 그치고 싶지 않아.

용감하고 싶고 이타적이고 싶고 지적이고 정직하고 다정해지고 싶어."

 

 

살아있다는 것은 세계와 온몸으로 부딪히는 지극한 현실의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이념형으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지극히 현존하는 존재로서, 어떤 면모든 가질 수 있다. 나를 설명하는 어떤 명칭에 갇혀서가 아니라, 나를 정의하는 외부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어떠한 변화와 가능성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안팎의 목소리가 나의 일부를, 혹은 타인의 일부를 가둬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가끔 생각해보자. 어지간해서는 완전히 입을 수 없도록 맞지 않는 옷 같은 건 없다. 조금 색깔이 따로 놀아도, 어딘가 어색해도, 팔다리가 삐죽 삐져나와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우리 아닌가. 가끔은 나같지 않은 일이 가장 나다울 수도 있는 것이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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