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와 미래와 과거 - 미래과거시제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오늘의 나
글 입력 2023.04.07 11:3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표지.jpg

 

 

 

오랜만에 향하는 이야기의 세계로


 

어렸을 적, 판타지 소설을 정말 좋아했다. 나를 모르는 세계로 데려가 자신에게로 푹 빠트리는 이야기들에 홀려 살았었다. 머리가 더 자란 지금도 나는 아직 판타지가 좋다. 그게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여도, 지금 읽고 있는 Sci-Fi, 공상과학소설이어도 좋다.

 

그러나 점점 책을 읽는 것에 들이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생산적'인 일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미루고 또 미루다가 한 권씩 책을 읽는다. 이 소설도 정말 오랜만에 읽은 SF소설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과거의 내가 야속하기만 하다. "'생산적'인 일은 무엇인가? 이 자본주의,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생산이고 생산이 곧 소비 아니던가!"라는 후회를 하기에 첫 이야기인 <수요곡선의 수호자>는 정말 좋은 이야기였다.

 

<수요곡선의 수호자>뿐만이 아니다. 아홉 편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아주 약간 비트는 순간 나는 책 속의 유희가, 소희가, 은경이 되었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이 되어 미래와 과거, 다른 세계관들을 질주하듯 엿보고 온 기분이다.

 

오랜만에 느낀 감각이다. "이야기에 푹 빠지다"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수요곡선의 수호자, 마사로


 

단연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마사로와 유희의 이야기, <수요곡선의 수호자>였다.

 

이야기를 읽으며 ‘자낳괴,’ 즉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낳괴는 누구일까. 끝없는 공급을 위해 마사로를 없애려는 ‘공급 곡선의 그들’? 끝없이 생산하고 창조하려는 이들에게도 자낳괴는 어울리는 별명이다.

 

그러나 나는 마사로야말로 진정한 자낳괴라고 생각했다. 마사로는 지불 수단이 갱신되자 이에 강렬한 희열을 느낀다. 열반에 가까워진 유희의 마음을 두고 “네가 네 마음의 끝에 도달한 순간에 지은 행복한 표정에 돈을 내고 싶었을 거야. 그걸 직업으로 할 수 있게.”라고 말한다. 그에게 행복과 소비는 동일한 표현이고, 그렇기에 “과잉 생산을 상쇄하는 과잉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 소비 로봇 마사로는 끝없는 생산보다 더 큰 소비가 보장되어야 굴러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괴물이자 수요곡선의 수호자이다.

 

유희(遊戲)는 열반에 오르는 대신 영감을 얻는다. 애초에 이름부터 그는 열반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사로는 돈으로써 희열을 얻고 열반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유희가 고래상어 그림을 감상하는 마사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고 나 자신을 성찰해보았다. 유희를 즐기지 못했던 유희가 진정으로 유희를 즐기는, 즐기는 것 자체가 존재의 목적인 마사로를 만난 것을 지켜보며 그게 꼭 가끔 내가 ‘무언갈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유희가 꼭 나 같았다. 유희가 열반하지 못한 것이 유희의 한계뿐만이 아니라 나의 한계로도 보였다. 괜스레 마사로가 부러워졌다. 무언가를 온전히, 마음 끝까지 질주해 즐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마사로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시간을 달려 지금, 이 순간으로

 

책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미래과거시제>라는 제목이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좁아터진 원룸에 누운 채로 자신들의 몸을 접어 머나먼 지구까지 놀러 온 이집트 신들을, 비가 슬금슬금 내리는 땅 위에서 심해 속의 고래들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다행인 일이다.

 

얌전히 앉아서 읽었는데도 미래와 과거를 있는 힘껏 달려 끝끝내 현재로 돌아온 기분이다. 아마 책 속에서의 전력 질주는 미치도록 높은 인구 밀도에도 지금의 우리가 덜 미치는 이유일 것이다.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를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현재에 발을 디디고 싶을 때, 그가 그리는 과거와 미래, 환상적인 시공간이 나에게 선물이 될 것 같다.

 
 
[박주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