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명하는 선율이 충분히 퍼질 때까지 - East Meets East [공연]

여백을 닮은 재즈
글 입력 2023.03.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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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박자로 조심스럽게 건반에 제자리걸음을 내딛는 피아노 소리로 공연의 막이 열렸다. 스네어 브러시 소리가 옅게 깔리고, 무언가를 비워내듯 심벌과 라이드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현을 스치는 베이스 소리가 허공을 맴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흘려보낸 고요한 불협 위에, 이윽고 쇳소리가 섞인 색소폰 소리가 점점 또렷한 선율을 그려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마치 영(靈)적인 것들의 행렬을 엿보는 듯한 감상에 서서히 빠져들다 문득,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드럼, 베이스, 색소폰.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이 온전히 뿌리내린 소리가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첫 번째 곡이 내딛음을 닮았다면, 두 번째 곡은 내디딘 모든 발자국을 휩쓸고 지나가는 그리움을 닮았다.

 

학습된 음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악기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잡음 때문이었을까? 희한하게도 내가 태어나지 않은 곳에서 제작된 악기들이 내 마음속 어딘가 존재해 있던 고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주 먼발치에서부터, 연주에 담긴 숨을 통해 추억의 잔향이 담긴 바람이 실려 왔다.

 

이렇게 두 곡을 끝맺은 뒤, 연주자들은 확신에 찬 편안한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통합 포스터_ East Meets East.png

 


“경계에도 불구하고, 음악 앞에서는 누구나 다 순수합니다.”

 

- 신야 후쿠모리


 

색소폰에 손성제, 드럼에 신야 후쿠모리, 피아노에 송영주, 베이스에 토루 니시지마.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된 한-일 재즈교류 프로젝트 ‘EAST MEETS EAST’는 그 이름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아티스트들 간의 강렬한 음악적 유대감과 끌림으로 형성된 재즈 앙상블 공연이다. 

 

국적과 배경, 문화가 다른 한국, 일본 재즈 아티스트로서 이들은 재즈라는 형식 안에서 동양적인 철학과 미학을 담아내기 위한 고민을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번 공연에서 그들만의 정서와 감정을 특별한 질감으로 풀어낸 자작곡을 선사하기 위해 모였다. 그중에는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모토로 하는 세계적인 컨템포러리 음악 레이블,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에서 선보였던 곡들도 포함된다.

 

색소포니스트 손성제의 차분한 소개 덕분에, 긴장이 완전히 풀린 상태로 이후에 이어진 곡들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었다. 다양한 텐션이 부드럽게 엉겨 있어 각 세션의 솔로 파트가 특히 돋보이던 자작곡도, 가까우면서도 먼 아침을 닮은 미발표곡도 모두 소중히 들었다. 음악에서부터 드러나는 작곡가의 애정과 이를 존중하며 뒷받침해주는 연주자들 간의 조화가 관객의 마음을 더욱 기분 좋게 했다.

 

차분함을 유지하는 피아노의 손짓과 몸짓, 색소폰에 담긴 명상과 안심의 숨, 나뭇결을 따르는 베이스의 울림, 여백을 자유롭게 노니는 드럼의 조합을 생각해 보면 자연의 심상이 절로 떠오르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운드의 합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오묘한 질감과 특별한 색을 빚어냈다.

 

공연 중간에 피아니스트 송영주가 마이크를 건네받으면서 풀었던 공연의 비하인드 일화가 생각난다.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합류한 그는 본인이 꽤 즉흥적인 편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보다 더 자유로운 멤버들의 분위기를 마주하고 처음에는 당황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합을 맞춰 나가며 다양하고 현란한 프레이즈와 극적인 전개를 내려놓는 비움의 미학을 배웠고, 서로 들으면서 신뢰하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때 이야기했던 “기승전결(起承轉結)에서 결이 꼭 필요한 건 아니며 승승승승, 혹은 전전전전도 괜찮구나.”라는 말이 제대로 와닿았다.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그 어려운 과업을 완수해 준 덕분에 내가 관객으로서 주어진 승(承)을 마음껏 유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구나 싶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east meets east.png

 

 

드러머 신야 후쿠모리가 속해 있는 그룹 ‘Remboato’의 첫 음반에 수록된 ‘千鳥の空’은 그의 자작곡으로, 하늘과 물 위를 흐르는 작은 새들에 대한 음악이다. 공연에서는 설명이 영어로 이루어져서 ‘Plovers in the sky’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직역하면 물떼새라고 하는데, 처음 들을 당시엔 어떤 새인지 잘 몰랐던 바람에 마음이 가는 대로 모습을 떠올려 보았었다.

 

피아노 선율로 넓게 펼쳐진 물가의 풍경 위에 날갯짓이 일어났다. 베이스는 새가 바라보는 방향을 가리키고, 새의 고개는 색소폰이 담당했다. 드럼에서는 바람을 가르는 속도감을 표현하는 너무도 신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가 담당하는 음악에 관한 모든 요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함을 이뤘을 때 재즈 공연에서 항상 기대하곤 하는 박수 갈채가 관객석 어딘가에서 들려와서 더욱 멋진 경험이 되었다.

 

이 곡이 아직까지도 짙은 여운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에 눈높이에 맞추었던 연주자들의 다정한 정서에 미소 지었던 그때의 감각이 계속해서 기억되기 때문인 것 같다.

 

중간중간 그들의 방식으로 재해석 된 익숙한 노래들의 조각에 귀 기울여 보는 시간도 이 공연의 묘미 중 하나였다. 불규칙한 재즈 리듬으로 잘게 쪼개진 옛 동요 ‘엄마야 누나야’, 원곡의 씁쓸함이 묻어 있지만 어딘가 후련한 듯한 어조의 ‘가시나무’, 그리고 내가 특히 평소에 즐겨 듣곤 하던 IU의 ‘마침표’까지.

 

개인적으로 앵콜곡이 ‘IU’의 ‘마침표’였다는 점에서, 관객이 좋아할 만한 것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고 수줍게 밝히던 손성제의 멘트가 떠올라 조금 웃음이 났다. 내게는 이 곡이 우리의 만남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east meets east2.png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고요한 재즈의 물결 위로 반짝이는 공명’. 

 

애초부터 나를 이끌 수밖에 없던 조합이었던 ‘EAST MEETS EAST’는 그 소개에 걸맞게 정말로 멋진 공연이었다.

 

주어진 어떠한 청각적 자극도 과하지 않았고, 선율의 고조를 뒤따르는 일도 편안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고요하고 오묘한 재즈의 물결이 충분한 여백으로 가닿을 수 있도록 여유롭게 퍼져 나간다. 

 

잔잔한 신뢰로 맺어진 그들의 재회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컬쳐리스트_민정은.jpeg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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