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오멜라스를 떠나야만 하는 이유 [영화]

<날씨의 아이>와 <비상선언>이 희생을 다루는 방식
글 입력 2023.03.0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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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중략) 그러나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 어슐러 K. 르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다. 단 1명의 희생으로 온 나라가 풍요로워진다면, 그 1명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나라를 망하게 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군가 ‘감히’ 그런 일을 하리라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1명의 비참함과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비참함. 무얼 선택해야 할지 답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도, 마음 한 구석엔 찝찝함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닌가?’ ‘그 1명이 그만한 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찝찝함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든다면, 결국 우리의 불편함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만약 내가 오멜라스의 아이가 된다면,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테마는 시대를 막론하고 논쟁거리가 되어 왔고, 많은 영화들이 이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루곤 한다. ‘빛의 마술사’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와, 화려한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았던 <비상선언>도 그중 하나다.

 

 

 

철없음으로 소수를 지켜내는 법,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는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히나’에 관한 이야기다. 초반부에 이 영화는 히나가 기도로 날씨를 바꾸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나열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중반부에 다다르면, 생각보다 복잡한 영화의 주제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다. 히나의 능력에는 리스크가 있었던 것이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몸이 점점 투명해지게 되는 히나는, 이것이 한계치에 다다르면 결국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히나가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다면 도쿄에 더 이상 ‘맑음’은 없고 줄창 비만 내리게 된다는 사실마저 밝혀지게 된다. 초반부의 서사를 통해 사람들을 미소짓게 하는 맑은 날씨의 힘을 알게 된 히나는,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제물로 바쳐진다. 어찌 보면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작중에서 어른을 상징하는 스가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람 한 명 희생해서 폭우를 멈출 수 있다면, 누구든 그렇게 할 거야.”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자 아이를 상징하는 호다카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호다카는 자신을 막아서는 어른들을 뿌리치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게 하늘을 가로질러 도착한 구름 위에서, 호다카는 끝내 히나를 구해낸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는 죽어야만 하는 아이를. 그러나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 그 아이를. 신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 있었던 건 대단한 계획도, 대의에 대한 고려도 아닌 철없음과 대책없음이었다.

 

 

“영원히 맑은 날을 못 봐도 돼. 푸른 하늘보다 나는 히나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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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동안 맑아졌던 도쿄에는 다시 비가 쏟아졌고, 그 비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단순한 듯 심오한 스토리를 가진 이 영화는, 막연한 희생을 당연시하는 일본의 기성세대와 그에 불응하는 청년세대 간의 갈등을 다뤘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감독은 결국 청년세대의 손을 들어 준 것 같다. 개연성도, 가망도 없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그리로 나아가 네가 원하던 행복을 찾으라고. 그 과정에서 세상이 조금 혼란스러워지더라도, 우리는 눈감아 주겠다고. 결말부에서 도쿄의 날씨를 그런 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이 메시지에 힘을 더한다.

 

결국 호다카는 ‘오멜라스의 아이’, 그러니까 ‘날씨의 아이’를 구해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도쿄의 날씨는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철없는 호다카는 마냥 행복하다. 그렇다고 이런 호다카를 마냥 ‘민폐 캐릭터’로 규정짓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 고난과 역경을 넘어 마침내 만나고야 마는 호다카와 히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후련함과 개운함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멜라스의 아이를 구해내고 세상의 풍요로움을 포기하는 결말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우리에게 제법 납득할 만한 만족감을 주는 듯하다.

 

 

 

다수를 위해서라면, 그쯤이야 괜찮다는 <비상선언>


 

반면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날씨의 아이>와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다. 바이러스 테러가 일어난 비행기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재난 영화의 특징인 스케일 큰 연출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이 전략은 대체로 잘 먹혀들어가서, 영화의 초반부에 대해서는 신선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건, 후반부의 메시지에 대한 비판적 평가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국에 거의 도착한 비행기를 두고, 땅에 있는 사람들은 ‘감염이 우려되니 비행기를 받아 줘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과 ‘그래도 국민인데 받아 줘야 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다투게 된다. 그러나 더 강한 여론은 전자였고, 비행기 안에도 이런 움직임이 전달되어 기내 사람들은 저마다 동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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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승객이 ‘우리 그냥 내리지 말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사실 승객들이 영화 전반부 내내 살기 위해 발버둥쳤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의견이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두를 위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이후 비행기를 운전하고 있던 재혁은 한국에 있던 사람들에게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를 위한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처한 재난에 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떳떳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착륙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해, 땅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받아들이고 만다. ‘주인공들이 살아남는 해피엔딩’으로의 문을 열어준 건 사람들 간의 연대가 아니라, 스스로 효과를 검증해낸 바이러스 항체였다.

 

사실 희생의 당사자인 소수가 스스로 희생되기를 선택했다는 점은 두 영화에서 같다. 차이를 만드는 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준 주체가 의식을 가진 ‘사람’인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인지다. <날씨의 아이>에서 감독은 호다카의 입을 빌려 히나를 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만, <비상선언>에서 감독은 비행기에 탄 사람들을 구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끝내 포기한다. 인호가 항체를 맞고도 죽었다면, 그 어떤 다수도 비행기에 탄 소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두 영화의 결말이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다.

 

 

 

희생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재난이 재난인 이유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재난의 가장 큰 특성이다. 그런 재난을 그려내는 이 두 영화에서, 희생의 당사자가 되는 주인공들은 사실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 설명할 수 없는 힘 때문에. 그냥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재난을 겪어야만 하는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재난의 당사자가 되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날씨의 아이가 된다면? 만약 내가 바이러스가 퍼진 비행기에 탔다면? 그러다 결국은 날 희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의 선택은 다양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 마지막 순간에 모두가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릴 때 우리가 무너지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그 상상에서 벗어난 우리는, 현실에서 희생의 당사자가 된 이들을 또렷이 마주봐야 할 것 같다. 내가 희생양으로 내몰리는 상상 속에서 누군가 날 구해주길 바란다면, 나도 현실의 누군가에게 잡을 손과 기댈 어깨를 내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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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멜라스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가 되는 건 ‘오멜라스의 아이’지만, 이야기의 제목은 <오멜라스의 아이>가 아니다. 이야기의 제목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왜일까? 저자는 희생되는 소수 자체보다, 그 희생되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태도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부당함을 알고, 그 혜택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멜라스의 아이를 구해낼 해답은 거기에 있다. 그 부끄러움이 오멜라스의 모두에게 퍼지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결국 모두가 그곳을 떠난다면. 온 몸을 바쳐 오멜라스를 풍요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진 아이는, 마침내, 그 어두운 지하실 밖으로 나와 햇빛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든 오멜라스의 아이가 될 수 있는 게 재난이라면, 재난으로부터 서로를 구원하는 공동체의 출발점은 오멜라스를 떠날 우리의 결심이라고 하겠다.

 

 

[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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