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흔적 없는 삶》 속 관계할 수 없음에 대하여

글 입력 2023.02.19 23: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거대한 공원 단지에서 길이 없는 숲 속을 헤치고 다니는 이들이 보인다. 언뜻 보기엔 모처럼 휴일을 즐기기 위해 캠핑을 온 사이좋은 부녀지간처럼 보이지만 이내 거대한 숲이 그들에게는 잠시 머무르는 장소가 아닌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이 직면한 여러 난제들 중에서도 어느새 손에 꼽히는 사회 현상이 된 홈리스는 집이 없는 부랑자를 일컫는 말이다. 영화 속 윌(벤 포스터 역)과 그의 딸 톰(토마스 멕켄지 역)의 모습도 분명 숲을 거처 삼아 사회를 등진 채 살아가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을 단순히 홈리스로 간주하는 것이 거대한 사회현상의 그늘 아래 존재하는 개인의 내밀한 역사를 은밀하게 봉합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윌과 톰의 안식처를 부수고 낯선 타지에 밀어 넣은 채 교화하려는 시도는 개인이 아닌 미국의 거대한 사회적 병리 현상을 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그들을 한층 더 깊은 숲으로 달아나게 만들 뿐이다. 그 속에 윌이 가진 과거의 아픔이 숨 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에서 불현듯 들려오는 헬기 소리가 반증한다. 같은 맥락으로 톰이 사회 기관에서 만난 친구들이 꿈 보드판을 만들고 있는 것 또한 현재의 문제들을 색출하여 아픈 과거는 지우고 희망적인 미래만을 종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윌과 톰의 ‘떠남’을 현실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행위가 아닌 홈리스라는 단어 하나로 간편하게 요약되는 개별적인 상처와 트라우마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떠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일종의 저항이자 몸부림인 셈이다.

 


Leave_No_Trace_(2018)_1080p_Bluray_H264_DTS_Omikron(073674)2021-06-10-18-51-.jpg
영화 《흔적 없는 삶》 스틸컷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윌과 톰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영화에 다가가기 위한 순조로운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적이 없는 톰은 그녀를 연기한 토마스 멕켄지의 무구한 얼굴과 합쳐져 마치 세상의 만물이 신비한 듯한 모습이다. 남들에게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땅에 떨어진 목걸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도 되냐 묻는 톰은 결국엔 영화 내내 그것을 차고 등장할 만큼 자그마한 사물에서조차 환대를 내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윌과 톰은 홍수정 평론가의 말처럼 “태초의 두 인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며 반대로 세상의 종말 직전 남은 두 인류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톰이 사회로 첫발을 내딛고 관계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감동을 주는데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우리의 모든 처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가 그녀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교회에 처음 가는 장면 혹은 단지 오렌지 껍질을 누가 더 길게 까는지를 대결하는 일상적인 모습들에서도 고갤 돌리지 않는 이유이다. 


윌에게 숲은 안락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전장과 같은 공간이다. 그래서 그는 조그만 소리에도 예민하게 움직이며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톰과 함께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가며 생활한다. 윌이 퇴역군인이었다는 설정은 미국 홈리스 현상의 한 단면을 포착하지만 그것이 윌의 은거 생활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영화는 윌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는 과거를 함께 앓는 인물로 그린다. 일견 가혹해 보이는 영화적 설정이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기억으로부터 트라우마가 생겼으며 또 숲을 방황하는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그의 상처를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의 침묵이 일종의 미스터리나 맥거핀 같은 영화적 장치로 기능하는가. 그 역시 틀렸다. 차라리 영화가 그것을 밝힘으로써 가능해지는 윌의 트라우마에 대한 관객의 동일화를 거부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톰이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질문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윌은 어떤 트라우마를 가졌는가. 왜 정착하고 더 안락한 삶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는가. 그는 이제 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모든 질문들 역시 우린 스스로에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그를 괴롭혔던 설문 기계와 다름없어진다. 

 

 

Leave_No_Trace_(2018)_1080p_Bluray_H264_DTS_Omikron(134664)2021-06-10-18-51-.jpg
영화 《흔적 없는 삶》 스틸컷

 

 

 

관계할 수 없음에 대하여 



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로서 가족인 톰조차 그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톰은 윌이 자신처럼 이제 그만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를 바란다. 톰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자신이 느낀 작은 벌집의 온기를 윌에게 전하려는 장면은 그녀가 벌집과 같은 작은 사회 군집의 일부로 들어간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윌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이겨내기란 톰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다시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즉, 영화는 결말을 통해 윌의 트라우마가 완치되는 것이 아닌 앞으로도 그가 주체적으로 헤쳐나가야 할 숙제로 남긴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가정이 실로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화는 알고 있기에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윌과 관계하기 위한 첫 걸음이 된다. 영화는 끝이 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다.


동시에 그러한 영화의 결말이 톰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그녀가 땅에 떨어진 목걸이조차 윌에게 허락을 받고 가져야 했던 영화의 초반부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톰은 윌이 걸어줬던 목걸이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작별한다. “아빠는 가야만 해” 라고 단호히 말하며 자신에게 전승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체적으로 끊어낸다. 이와 함께 톰이 자신은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영화 초반 장면을 복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톰의 말에 윌은 “엄마도 노란색을 좋아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윌이 무의식적으로 톰으로부터 사별한 아내를 떠올리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윌에게도 톰과의 작별은 그의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트라우마의 일부와 작별하는 것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 역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윌의 눈물에서 영원한 이별이 아닌 언젠가 각기 한층 더 성장한 주체로서 이루어질 톰과의 재회를 읽을 수 있는 여지도 톰이 숲에 생필품을 걸어두는 장면이 아닌 바로 이들의 이별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된다. 


데브라 그래닉 감독이 전작 윈터스 본에서 가족주의의 질긴 연을 끊어내려 분투하는 딸의 모습을 그렸던 적 있는바 신작 흔적 없는 삶에서 반복되는 아버지와 딸의 부녀 서사는 그녀가 다시 한번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윈터스 본이 강가 아래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끄집어 올려 두 손을 절단해 죽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냉엄하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면, 영화 흔적 없는 삶은 생명의 숨결을 느끼면서 개인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전작과 같은 구조와 캐릭터의 외형을 취하면서도 정반대의 맥락을 이끌어내는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글을 마치며 



분명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에선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따듯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분명 영화 전반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과 토끼에서부터 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식물들의 이미지에서 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의 숨결을 느끼는 윌과 톰이라는에게 있을 것이다. 톰의 얼어붙은 발을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오는 따듯함으로 녹이려는 윌과 벌집을 꺼내며 “봐, 겁낼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톰의 모습은 단숨에 우리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벌집 속에서 날아오르는 벌들이 원하면 우리를 해칠 수 있는데도 그런 벌을 신뢰한다는 건” 말 그대로 정말 멋진 일이다. 두려움을 바로 마주하는 용기를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서두르거나 보채지 않는 이 영화의 속도가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내 마음에 작은 흔적을 남긴다.

 

 

[최정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