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백십일에 료칸 안에서, 세상 그리고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을 그리다. – 연극 ‘이백십일’

글 입력 2023.02.14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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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저자이자 일본의 대문호로 알려진 ‘나쓰메 소세키.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 작가의 이름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단편소설인 <이백십일>은 우리나라에서 단권으로 출간된 적은 없으며 ‘긴 봄날의 소품’이라는 단편집에만 수록된 바 있다. 소설의 제목을 검색해봐도 볼 수 있는 리뷰나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다. 즉,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신생 연극 단체인 극인단 이치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고전 소설을 통한 연극 제작’을 중시하며, 소설 <이백십일>을 각색한 전세계 초연 연극 작품을 극단의 창단 기념 공연으로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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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백십일>의 배경은 1906년 일본 구마모토의 아소산. 서로 친구지간인 두 청년 ‘게이’와 ‘로쿠’는 함께 전통 료칸에 머물며 잡절기 중 하나인 이백십일에 산을 오르려 한다.


여기서 이백십일이란 입춘날부터 헤아려 이백 열흘 되는 날로, 특히 일본에서 태풍이나 해일로 인한 농수산업 피해가 많아 액일로 여겨지는 날이다.


산에 오르기 전부터 하늘에서 화산재가 떨어지고, 아소산은 시뻘겋게 보일 정도로 성이 잔뜩 나 있다. ‘게이’는 이런 궂은 날씨와 조건일지라도, 아니, 이런 날일수록 더더욱 산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로쿠’는 그저 료칸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과 행동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게이’는 웅대한 걸음걸이로 걷고 근엄한 표정을 주로 짓는 데 반해, ‘로쿠’는 어딘가 움츠러들고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웃을 때 역시 장쾌하게 울리는 ‘하-! 하-! 하-!’ 소리와 실낱같은 ‘푸히히-’ 소리.


이 둘은 이렇게나 다르지만 공연 내내 스스럼없는 만담이나 시시한 농담을 나누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며 영락없는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대한다.


‘로쿠’는 태풍이 몰아치고 땅과 화산이 진동하는 걱정스러운 날씨에도 결국 친구와 함께 산을 오르기로 하고, 두 사람은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충동과 이성, 열정과 현실의 사이



이 둘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내 모습 같기도 했다. 단순히 여행 스타일이 지독히 안 맞는 친구와 여행할 때를 떠올리게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인생 전반에서 나의 내면에는 저 두 청년의 모습이 공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충동과 열정에 가득 차 세상의 많은 것을 직접 겪어 알아가고자 하는 ‘게이’의 모습, 그리고 현실적인 조건을 판단하고 합리적이고 안전한 결정을 하려는 ‘로쿠’의 모습.


그들은 내가 인생의 방향성을 생각할 때는 물론 작은 결정을 할 때조차 끊임없이 성가신 토론을 나누기 때문에, 나는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거나 적절한 중재안을 찾아내야 한다.


각각의 결정들이 누구의 영향을 더 받았고 결과는 어땠는지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필요함을 깨닫는 것이다.


‘게이’는 ‘로쿠’가 아니었다면 산행 중 무작정 걷다가 굴러떨어졌던 골짜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굉장히 위험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로쿠’의 경우 혼자서 방 안에 머물렀다면 위험한 상황 따위 일어날 리 없이 안전하긴 했겠지만, 성취감이나 도전의식을 일으키는 특별한 경험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조로운 여행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등을 떠밀어주는 열정 가득한 마음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때로는 잠시 멈춰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쨌든 이 둘은 우선시하는 가치가 다를 뿐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다.

 

 


회피와 마주봄의 차이



반면에 두 청년의 옆 방에 투숙하는 ‘도요사부로’ 도련님은 어떠한 의지도 상실한 채 조용히 시간만 견디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명문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지만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밤과 고구마 장사를 해보려다 실패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료칸에 머무르고 있다.


점점 숙박비를 낼 돈도 쪼들려가지만, 그는 일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현실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그가 잔병치레로 앓을 때는 의사가 단순 감기라고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력을 근거로 들며 자신이 폐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구애를 받고 괴로워한다.


자신의 생각과 걱정이 스스로의 발걸음을 옭아매고 있으나 벗어날 도리도, 의지도 없이 한탄만 하는 병약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그는 지인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보기도, 여관에 시간을 달라며 무리한 요구해보기도 하지만 이런 대책 없는 행동들이 언제까지나 통할 리 만무하다. 결국 그는 부디 여기 머무르게만 해달라고 무릎을 꿇게 되고, ‘그저 의미 없는 머무름을 위해’ 여관의 시종 일을 하며 그 시간을 늘려 간다.


세상과 현실로부터 도피한 채 그저 세월이 흘러가도록 두는 수동적인 도련님의 모습은 ‘게이’와 ‘로쿠’의 모습과 대조된다. 그 둘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한 행동과 시도를 하려는 의지가 있고, 투닥대며 시끄럽긴 하지만 인간 그리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게이’와 ‘로쿠’의 방, 도련님의 방 사이의 복도를 분주히 누비며 각 방의 투숙객들을 살피는 하녀는 그야말로 현실과 현재를 사는 인물이다. 반숙이 뭔지 몰라서 반절은 완숙, 반절은 날계란으로 대접을 하고, 맥주와 아사히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여관 바깥 세상의 일에는 어둡지만, 여관 안에서의 자기 일은 솔직하고 똑부러지게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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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세상에 대해 논하는 두 청년, 실패와 두려움에 구애를 받으며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도련님, 현재 속에서 단순하고 솔직하게 열심히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하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느긋한 노인의 모습까지.


<이백십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특성과 이미지를 명료하게 제시하며, 료칸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사회를 표현해낸다.


 

“국내 연극이 가진 정통성을 존중하고 이야기 중심의 순수성 회복이라는 열정을 가지고 창단하였습니다. 사회적 메시지 전달 목적이 아닌 순수하게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 극인단 이치 윤영성 대표의 단체 소개말 中

 


이러한 극단의 성격과 목적성을 표현하기 위한 창단 기념 공연의 희곡으로서, 등산을 하려는 두 친구의 일상적인 대화와 만담이 주를 이루는 <이백십일>을 선택한 것은 굉장히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원작 인물들의 성격을 더욱 과장되게 표현하고 이미지가 확실한 인물들을 추가로 구성해서 단조로움을 피했을뿐더러, 열정적인 게다 소리와 북소리의 조화, 무대의 시각적 효과를 가미해 몰입도를 높였다. 이러한 장치들은 극 중 상황과 인물들 자체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객석에 앉아 공연을 보던 그 순간만큼은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인물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행동과 몸짓을 관찰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들과 함께 웃고 긴장하고 한탄하며 같이 흘러갈 수 있었던, 그런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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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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