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커피와 삶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1.0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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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 자유롭게 적어보라는 문항이었나.

 

문학 비평 강의 기말고사였는데, 막대한 범위를 깊게 다룬 수업이었던 만큼 시험 역시 난이도가 높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듯하다. 문학 작품에 관한 견해야 내겠지만, ‘사랑’에 대한 견해라니.


냅다 내놓은 대답은 ‘커피’였다. 서툴고 딱딱한 문장으로 그렇게 적었었다. 필요해서 마시는 것처럼, 없이는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싶다고. 제출하면서도 어렴풋이 생각했던 듯하다. 교수님이 보시기엔 제가 그리는 사랑의 형태가 현실적이긴 한가요. 당신이 생각하시는 사랑과는 얼마나 다른 모양인가요. 많이 의문스러웠달까.


 

[크기변환]모카포트.jpg

 

 

모카포트를 선물 받았다. 생각 없이 흘린 말이 실체가 되어 돌아온 격이었다. 원두 냄새로 방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났다. 온갖 원두를 알아보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주문을 해버렸다. 무어든 맛이 좋을 터였다. 애정이 담긴 선물이니.


3번의 세척을 마친 뒤 내린 첫 커피는 향이 좋았고, 맛도 좋았다. 문득 그 기말고사에 적었던 답안이 떠올랐다. 커피를 끓이다 생긴 훈김에 데워진 공기가 가득 찬 방처럼, 그렇게 네 흔적이 들어찬 방이 참 좋을 것 같다고도 적었었다. 어쩌면 소유욕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사랑을 꿈꿨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끓일수록 커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영원을 믿지 않는 나는 언제까지고 흔들리며 살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제대로 뿌리가 박힌 안정적인 삶보다는 빠르진 않더라도 항상 많은 것이 바뀌고, 쥐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놓아야 하는 그런 삶. 영원이나 사랑을 말하는 이들은 멀리하면서 당장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려고만 들었다.

 

함부로 말한다 생각했고, 용감하다고 여겼다. 조금은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서는 정원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아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울지 않는 법만 익히려 했다. 흔들릴 각오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모든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오려 애쓴 것에 비해 무시당하고 발에 걷어챈 마음이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소중하단 듯이 굴었다. 하찮게 여겨진다고 하여 나마저도 홀대한다면 더없이 하찮아질 마음들이라, 있는 힘껏 손으로 쥐었고 깨질까 조심히 다루며 간직했고 결국 버려질 적엔 구석 한편에 조용히 넣어두었다. 쓸모 없어진 것이라 하여 함부로 내동댕이칠 것들이 아니었기에. 어찌 되었건 내 조각들이니.


모카포트를 너무 꽉 조여버린 탓에 잘 열리지 않아 한참을 끙끙댔다. 커피는 다 내렸으니 원두를 비워줘야 하는데. 비워야 하는 것을 비우지 못하는 기분은 조금 찝찝하긴 하다.


카페에서 대략 2년을 일하며 배운 수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커피는 굳이 세제로 닦아낼 필요도 없고, 빠르게 씻어낼 필요도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흰옷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기계마저도 원두에 익숙해지면 커피 맛이 더 좋아진다고도 한다.

 

잠시 급한 일 먼저 해치우고 모카포트를 다시 덤벼들자 아까와는 달리 쉽게 열렸고, 커피 자국은 쉽게 닦여나갔다. 컨테이너를 열자 또 풍겨오는 원두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당장에 비우지 못한다고 급하게 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나름의 모닝커피를 선물해 준 짝꿍에게 고맙다고 하자 맑게 웃었다. 앞으론 눈 오는데 커피 사러 나가지 마. 힘주어 잡아오는 손에 꽁꽁 얼었던 몸이 녹았다. 오늘 저녁은 김치볶음밥 해먹자.


커피가 내 일상인 것처럼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썼던 답안이 생각났다. 그래서일까, 예의 이상과 지금 삶의 형태가 얼마나 다를지 커피를 내릴 적마다 궁금해지곤 한다. 현실이 되고 마는 꿈이 세상에 얼마나 많더라. 한 번 쥔 것은 놓기 싫어하는 심보를 겨우 죽여놓았는데, 이젠 다시 살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커지는 요즘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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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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