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연

글 입력 2022.10.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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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전시]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할 때 그 감상은 진공속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의 맥락속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관람자가 관람을 할 때 ‘보이는 것’은 관람자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 가끔은 비약적이고 가끔은 신비한 관계를 맺는다. 특히 아주 구체적이거나 독특한 주제가 설정되어 있는 경우, ‘주제’라는 것은 관람의 시작(혹은 시작 전부터)에서 끝까지 지배적인 기반이 된다. ‘주제’를 놓고 기대와 설렘, 예상 같은 것들이 발생하고, 작품을 보고나서도 제시된 주제의식으로 생각은 귀향하려하는 것이다. 해당 전시가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아주 구체적 대상을 모티브로 한 것을 생각할때, 관람자에게 보이는 디자인 작품과 주제에 대한 머릿속 생각 사이에는 거미줄 같은 빗금들이 더 힘차게 쳐지는 전시가 아닌가 싶다(제시된 주제가 관람자에게 끼치는 영향과 이런 영향이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는 시선에 끼치는 영향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생각건대, 디자이너에게는 조금 더 무거운 짐이 지어질 수도..) 아래에서 해나갈 말들도, 그렇기에 작품과 주제 관계에 입각한 인상이다.

 

 

1-디자이너 수빈, 강

 

 

도트 1.png

2022 도트 전시회, Designer Subin Kang

 

 

[존재와 본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싶진 않다.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뭐든 유치하게 들리는 시대가 된 탓이다. 존재와 본질은 공존하고 그 공존은 칼을 들어 분리해낼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럼에도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존재와 본질은 가끔 유효하게 분리될 수 있다.]

 

존재와 본질(가치 내지는 용도)을 뚝 떼어놓기는 참 힘든 일이다. 그 와중에 언어는 이 떼놓기의 한계로서 작용할 때가 많다. 시계라던지, 소파라던지, 컵이라던지. 시계, 시게 발음하면 전형적인 시계의 이미지 하나가 떠오르고, 누군가 그 용도를 묻는다면 뻔한 대답을 할 것이다. 애초에 시계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센다’라는 말이니..이렇게 사물에는 각기 하나의 본질이 대응되어 있고, 많은 사물의 세계에서 ‘존재는 본질’이라는 수식이 의심없이 성립되는 중이다.

 

그런데 본질도 은퇴를 (당)한다. 이제는 고쳐볼 수도 없어 제 기능을 할 가능성이 소멸된 시계가 있다. 존재는 그때서야 드러난다. 시간을 보는 물건이였다는 본질의 아이러니한 그림자 아래, 다양한 모양과 재료로 이루어져 있는, 보면 볼 수록 기괴함과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하나의 존재가 보인다. 버려진 사물에서 그 존재와 참된 개성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묘사하는 버려진 라디오의 검은 낯도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검은 라디오 하나를 떠올리자면, 기능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되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른다.


인간도 은퇴를 (당)한다. 거리에서 걸어다니거나, 뛰거나, 산책하거나 하는 가시적인 인간은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는 것도 무리하자면, 기능이 다해 거리에 내놓인 사물들과 들어맞는 은유가 된다. 용도로부터의 자유가 된 존재. 한편, 갑자기 성과사회에서 꿀렁꿀렁 내뱉어져 스스로의 존재가 낯낯히 들어나는 것이 익숙치 않고 되려 부대낄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사교댄스클럽, 산악회를 비롯한 숱한 동호회 및 외부활동들로 시간을 채우는 사실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도트 2.png

2022 도트 전시회, Designer Subin, kang

 


모양과 크기 등이 다 달라도 용도라는 하나의 공통점 아래 ‘시계’ 로 불리는 사물과 달리 인간 개개인을 묶는 용도는 없다. 따라서 개별 인간의 뜻을 풀이하는 사전도 있을수 없다-인간은 각기 이름을 가졌다. 다른말로 하면, ‘cup’은 ‘drink’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sofa’는 ‘sit’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치면 what about ‘human’? 성과사회라는 이 사회 자체가 아니고서야, 글쎄, ‘performance’라고 답할 human이 몇 있을까.


미디어를 품은 자본주의 아래 물건들은 끝없이 생산되고 버려지며, 성과사회도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인간을 대하는 관점으로 전이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물건 하나를 한없이 원하는 욕망이 금새 부풀었다 또 금새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성과사회라는 것도 사실은 누구도 진심으로 욕망하지 않는 하나의 허구일수 있겠다.


그런데 왠지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현실 성과사회에서의 인간은 성과라는 추상적이고도 거대한 제단위에 바쳐지는 하나의 주술 인형과도 같다. 우리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진실된 이론에 기반한 것도 아닌 이 성과사회는 그럼에도 우리를 잠식하곤 하는 것이다. 사회란것 자체가 그런거일수도 있겠지만...


디자이너의 시선은 이런 사회에 조금은 거리를 둔 시선처럼 보인다. 거리를 관찰하고, 사물을 관찰하고, 또 사회와 인간인 스스로의 존재를 관찰하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태어남과 버려짐의 수순이 필연적이라는 우연에 갇힌 현재, 이따금씩 존재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무언가가 태어난다.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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