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한국 SF 스펙트럼의 매력적인 확장”
- 책 소개 中
〈문윤성 SF 문학상〉은 1965년 한국 최초 SF 장편소설 《완전사회》를 발표한 故 문윤성 작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출처; 아작 출판사. 그리고 2022년 중단편 수상작품집에는 이신주 작가의 〈내 뒤편의 북소리〉, 백사혜 작가의 〈궤적 잇기〉, 이경 작가의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육선민 작가의 〈사어들의 세계〉, 존 프럼 작가의 〈신의 소스코드〉가 실렸다.
총 5편의 수상작이 수록된 이 작품집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작품은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였다. 대상을 수상한 〈내 뒤편의 북소리〉 등 여러 작품을 읽어보았지만, 모두 괴랄한 길이의 제목에 그렇지 못한 분량을 뽐내는 이 소설만큼의 임팩트를 가지지는 못했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는 마포 곽산시영아파트 E동 108호에 전세로 살고 있는 한 신혼부부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태어난 지 한 달 된 딸 '세리'에게 분유를 타주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인 '미주'와 그의 남편이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서 AI로 구현된 스웨덴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의 주인공이다를 맞닥뜨리고 기절초풍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분량이 중단편인지라 이야기를 더 늘어놓게 되면 작품을 읽는 재미가 반감될 것이므로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AI와 인간의 유대 관계와 육아의 고단함과 인간의 고립감에 대한 철학적인 농담' 정도로 줄일 수 있겠다. 굳이 '농담'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글이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경쾌하고 웃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철학적'이라 평가한 것은 미주와 남편, 그리고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우당탕탕 육아기 속에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이 은은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상보다 임팩트가 큰 수상작이라니, 그 정도야? 라고 묻고 싶겠지만 사실 내가 이 소설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경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의 세계는 삐까뻔쩍한 히어로의 등장도, 물렁물렁한 외계인 군단도 없이 너무나 조용하다. 사소하다. 그런데, 사소하고 보잘것없기에 강력하다.
알렉산더는 진짜 사람도 아니고··· 친구? 친구··· 친구라기엔 인공지능이고··· 튜링 테스트 정도는 누워서 통과할 것 같긴 한데··· 전기도 많이 먹고···.
꺼어어어어어어억!
그리고 세리가 굉장한 트림을 했다.
-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中
나는 페이지를 한 장 넘길 때마다 유머와 투덜거림 그 사이에 있는 문장들 탓에 속절없이 웃음을 허락해야 했다. 심지어 이경 작가는 이러한 시트콤 급의 즐거움 속에서 부모의 고독감, 친구를 떠나보내는 인간의 우울감, 그리고 부동산 문제 및 한국의 조직 문화 등 사회적 이슈까지도 짚어내 독자들에게 생각하는 재미까지 선사한다. 덧붙여 작품의 주된 배경이 전형적인 한국 사회 그 자체라 특별히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작품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를 읽은 직후 나의 감상은 대충 이랬다 ─ 노골적인 표현 없이도, '개같이 멸망'한 인류 없이도, 거창하고 거대한 세계관과 설정 없이도 이렇게 큰 재미와 교훈을 주는 SF 작품도 존재하는구나. 어쩌면, SF는 Science Fiction이 아니라 Social Fiction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내게 제일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유능한 AI와 위대한 엄마 사이의 한 대화를 인용한다.
"미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난 이제 그 답도 얻었어."
"뭐로 사는데?"
"사랑."
"그건 원작에 나온 답이잖아."
"그래. 나는 그 답을 다시 확인했지.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구나."
"틀렸어. 사람은 분유로 살아."
-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中
+ 다만 제가 SF 장르를 잘 모르더라도 Science Fiction의 정의 자체가 '과학을 소재로 한 소설'인 것은 자명하므로, SF물은 자연히 현재보다 과학이 더 발달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접한 SF 영화 및 소설(매트릭스, 스타워즈, 메이즈러너, 인터스텔라, 1984, 이퀄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더 기버)들은 일관적으로 과학이 발달한 미래의 비관적인 전망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혹시 제가 글에서 소개한 작품 외에 반례로 참고할 만한 SF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1님의 코멘트가 본 글 뿐 아니라 앞으로의 글쓰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가 <매트릭스>, <더 기버> 외에 1900년대의 작품은 살펴본 적이 없어 2000년대 이전의 SF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예로 들어주신 작품들이 대부분 1900년대 작품인 것을 보아 어쩌면 제가 생각한 SF의 이미지(인류의 멸망)는 장르 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최근에 두드러진 유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당 내용 반영하여 기사문 수정하겠습니다. 제 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본 기사 말미에 추천해주신 작품들을 함께 싣고자 하는데, 정보를 제공해주신 1님께 허락을 먼저 구하고 싶습니다. 제가 추천해주신 도서 목록을 사용해도 괜찮으실까요? (원하신다면 출처 표시도 하겠습니다!)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풋님도 제가 모르고 있었던 다른 좋은 SF작품들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