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우린 결국 승리했다

영화 <서울의 봄> - 결국에는 서울의 봄이다
글 입력 2023.12.1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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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육군본부에 군부대의 책임자들이 모여있다. 어수선한 분위기와 어리둥절한 인물들의 표정 속에서 국무총리가 소식을 전한다.


“방금 박 대통령께서 사망하셨습니다.”


이후 일시 묵념과 비상계엄령 발표, 대통령의 장례식이 차례대로 비치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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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의 열기가 뜨겁다. 영화 흥행의 주된 척도인 2030세대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심박수 챌린지를 하며 분노한 마음을 표현하는 인증샷도 유행하고 있다. 간만에 극장이 활기를 띠는 데 영향을 미친 이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서울 군사반란 9시간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그려냈다. 그로 인해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잘 알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그날의 역사를 돌아보고 명확히 인지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영화는 120분이 조금 넘는 상영 시간 동안 다양한 사건을 전개해나가는데, 총 3번의 대통령 재가 요청을 통한 서사가 두드러진다.

 

 

 

1차 대통령 재가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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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는 핵심 인물 3명인 전두광, 이태신, 정상호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전두광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리더이다. 이때의 하나회는 전두광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식하고 있었다. 이에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은 하나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와는 거리를 둔 이태신 소장을 수도경비사령부(수경부) 사령관에 임명한다.


하나회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정상호 총장은 전두광을 좌천시킬 생각을 하며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지만, 그 소식은 전두광의 귀에 들어간다. 자칫하면 군복을 벗게 될 위기감을 느낀 그는 하나회 조직과 함께 총장을 납치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말도 안 된다는 조직 구성원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설득해서 실행하게 된 작전, 1979년 12월 12일 작전명 생일잔치. 이들은 계획대로 총장을 납치하고 전두광은 대통령과 독대하여 재가 요청을 한다. 10·26사태에 정상호 총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빌미로 그의 구속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지만,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함께 정식 절차를 거치겠다며 이를 거절한다.

 

 

 

2차 대통령 재가 요청


 

한편 정상호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이태신 사령관과 하나회 반란군에게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한 것도 모자라 대통령 재가도 받지 못하고 온 전두광을 보며 하나회 조직은 절망하지만, 전두광의 끈질긴 의지와 설득으로 다시 한번 힘을 합치기로 한다.


이로써 한밤중에 본격적으로 서울의 전쟁이 시작된다. 각자 여러 병력을 집합시키며 작전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회의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지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태신 사령관이 맡은 수경부의 군사 조직인 30경비단과 33경비단 등은 이미 하나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전사라고 불리는 공수부대 역시 대부분 하나회 소속이었다.


그리하여 이태신 소령관은 유일하게 하나회 소속이 아닌 공수부대 중 8공수 여단장을 설득해 서울로 출동할 것을 청한다. 당시 8공수는 서울과 가장 가까워 부대가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2공수를 출동시킨 전두광 세력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전두광 역시 2공수를 출동시킨 것뿐만 아니라 9사단까지 출동할 것을 명한다. 여기에서의 9사단은 서부전선 최전방 부대로 우리나라가 휴전국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함부로 빼 올 수 없는 병력이다. 실제로 전두광 세력의 반란군도 이 말을 듣자 아연실색하며 그의 명령을 제지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두광이 자행하는 모든 행위는 본인의 야망과 권력욕에서 비롯된 명백한 국가문란 행위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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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통령 재가 요청은 전두광의 독대였다면, 2차는 여러 핵심 인물을 동원해 다시 재가를 요청한다. 이들의 계속되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2차 재가 요청도 실패. 영화의 장면 중 그나마 다행스러운 모습이지만, 계속해서 감상하다 보면 왠지 모를 답답함이 마음속에 자리한다. 그 이유는 군부대가 철저한 수직관계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울 중앙청으로 부대를 출동시키라는 9사단의 사단장 노태건의 말을 듣고 참모장이 의아함을 느껴도, 전방 병력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판단했음에도 그는 사단장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리 뛰어난 사령관이 부대를 진두지휘할 능력이 있어도 전체를 총괄하는 리더가 무능하다면 결국 그 능력은 무기력함으로 바뀌는 군대의 위계질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반란군이 군대를 장악하고 육군본부를 무혈입성하자 본부의 장관을 비롯한 여러 지휘부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것에만 급급하여 그곳을 대피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하물며 모두가 찾고 있는 국방부 장관 역시 현재 일어난 일들에 대해 제대로 된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다. 누군가 옳은 말을 하며 육본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 그것을 하극상으로 치부해 직위를 거론하는 태도는 조직 내 위계질서의 절망적인 단면을 나타낼 뿐이다.

 

 


3차 대통령 재가


 

참모진의 무능력한 판단으로 막을 수 있었던 전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8공수 여단장을 끈질기게 설득해 서울로 출동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으나, 반란군의 신사협정 제안으로 상황은 모호해진다. 점점 거대해지는 서울의 전쟁을 막고자 2공수와 8공수 모두 회군할 것을 합의하지만 예상대로 2공수는 잠복을 하고 육군 참모차장의 어리석은 지시로 8공수만 회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숨어 있던 국방부 장관이 2공수에 발각되어 이태신 사령관에게 직위해제를 내린다. 긴박했던 9시간의 전쟁은 그렇게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때 8공수가 출동명령을 받은 시간은 13일 12:05분, 신사협정으로 인해 회군한 시간은 12:20분으로 약 20분 만에 모든 상황이 허무하게 종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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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두광 세력은 국방부 장관의 서명이 적힌 재가안을 가지고 대통령에게 마지막 재가를 요청한다. 그는 서명과 함께 날짜와 시간을 적은 후,


12.13.5:10A.M


나지막이 말한다.


“사후 재가입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결국 이 사태는 전두광을 비롯한 하나회가 독단적으로 계획한 부당한 사건이라는 점을 명백히 드러낸다.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의 재가가 있기도 전에 일을 행한 것은 그 행동이 분명한 불법행위였음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이들의 행동을 12.12쿠데타라고 일컫는다. 영화의 중반부 전두광은 반란 작전을 듣고 고민하는 하나회 세력에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며 참여를 독려한다. 결과적으로는 신군부가 정권장악에 성공했고 그들에게 이 사건은 혁명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12.12혁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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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쿠데타는 단어의 뜻에서부터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쿠데타의 경우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나 체제의 변화가 아니다. 주로 군대나 특정 지배 계급이 현 정권에 불만을 품고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고자 하는 행위다. 이때의 변화는 지배층의 단순한 권력 이동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통제권의 장악이다.


반면 혁명은 쿠데타와 달리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등 근본적인 체제를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부터 깊이 뿌리내린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보다 중요하고 심오한 변화이다.

 

그간의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의 첫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대부터 내려온 절대 왕정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거듭났으며 귀족의 특권보다는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강화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세계 여러 국가에 영향을 준 위대한 혁명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했기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4·19혁명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독재정치와 부정선거에 맞서고자 대한민국의 학생과 시민이 하나가 되어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역시 정부의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국민의 희생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혁명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체제 변화가 아닌, 기존 세력의 파벌과 폭력적 권력 장악의 12·12사태는 결코 혁명이 될 수 없다. 

 

 

 

서울의 봄은 없었지만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큰 분노를 표출했다.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하나회 조직이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그들의 행위를 자축할 때, 그들과 맞서 싸운 이들의 처참한 모습과 고문의 흔적을 대비해서 나타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의 끝부분에서는 이후에도 신군부 세력이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는 자막을 넣으며 안타까운 역사를 상기시켰기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영화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서울의 봄이 끝내 오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승리는 아주 잠깐 누릴 수밖에 없는 승리이며 결국은 역사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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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 보고 판단했을 땐 결국 서울의 봄은 없었고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영화가 끝났다고 역사도 함께 끝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언제나 끝까지 봐야 하는 법.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의 투입과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국민의 희생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쟁한다.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탄압하고자 하는 정부에 맞서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고 마침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서울의 봄은 없었다’라는 것이 그것 자체로 참인 문장은 아니다. 그들의 외침과 열망으로 이룬 세상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되었고 오히려 독재정권의 승리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음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끝까지 항쟁한 국민의 노력이자 우리가 지켜내고자 한 민주주의의 정신이요, 되찾았기에 더욱 값지고 찬란한 서울의 봄이다. 결국 서울의 봄은 다시 찾아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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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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