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

'심장'으로 기억하는 생의 순간들
글 입력 2022.09.0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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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기고 새기는


 

나는 공연을 보고 나면 해당 공연에 사용된 색상을 한 줄의 '이미지'로 만들어 그 공연에 대한 대표 이미지로 기억에 남기는 편이다. 예를 들어, '뮤지컬 <풍월주> / 옅은 물안개가 낀 세룰리안 블루'처럼 말이다.

 

이런 내게 최근 'image'가 아닌 'meaning'로 남겨진 어색한 극이 나타났다.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보면 괜히 딥해지고 원액을 맛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 자신에 대한 밀도가 높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극 말이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현대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인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베스트셀러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극으로 2019년과 2021년에 이어, 올해 2022년 3연으로 돌아왔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 판정을 받게 된 19살의 청년,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식의 과정을 담은 24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이 극을 처음과 마지막까지 함께 서술해 주는 서술자 이외에도 그의 심장과 관련된 15인이 돌아가며 주인공이 되는 군상극이다.



SYNOPSIS


언어와 감정 사이에 있는 그 무엇, 우리의 '심장(마음)'에 대한 기록


새벽 5시 50분, 한 젊은 청년이 혹한의 겨울 파도에 도전하는 시간이다.


서술자는 그 해변가를 들어오고 나가는 이 청년의 몸과 기억, 그리고 앞으로 24시간동안 그의 심장을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미지를 들려준다. 확장되고, 수축되고, 피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매순간 애쓰고 다급해 하는 심장과도 같은, 생의 순간들. 한 청년의 심장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몸의 기억.


매 순간 존재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심장의 윤곽, 그 심장이 기록해온 삶이 서서히 드러난다.



한 명의 배우가 서술자 외 15명의 등장인물을 담당해야 하는 1인 극인 만큼 배우 개인의 역량과 장면의 연결성에 따라 작품의 질이 좌우되는,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극이지만 전 캐스팅을 꼭 봐야만 한다고 소문난 명작이기도하다.


친절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지만, 배우들(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의 흐름에 따라가면 기존을 뛰어넘는 생의 순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박동을 각자의 박동과 맞추는 것이 핵심이다!




수선하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이 극을 보기 전부터 보고 난 후인 지금까지 가장 좋다고 생각된 부분은 한결같이 '제목'이라 말할 수 있다. 뭔가 이치에 딱 알맞은 것은 아닌듯한데, 그렇다고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은 느낌의 제목은 극을 곱씹으면 씹을수록 이 문장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이 극의 제목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수선하다


1. (형용사) 정신이 어지럽거나 마음이 뒤숭숭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다.

2. (동사)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치다.

 

출처ㅣ네이버 국어사전 [수선하다]



'수선하다'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에, '수선하기'는 내 머릿속에 이 두 가지로 좁혀진다.

 

- 죽음을 당하고 접하고 전하는 과정에서의 남겨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수선하도록 하는 스토리

- 장기이식을 직접 경험하는 당사자들의 신체를 수선하는 스토리

 

이 두가지 중 후자의 의미는 당사자들을 다소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수선'을 단지 행동으로써만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이때의 우리는 물리적으로 진행되는 수선의 '행위'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극에서 의사와 코디네이터는 '최선의 수선'을 위함으로 '필요성'을 1순위로 두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과 신체가 지내온 시간의 흔적에 의한 형태와 의미를 꼼꼼히 관찰하며 최소한의 필요와 최대한의 의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뜻을 우리에게 노출시키려 한다.


이러한 텍스트와 연기에서 드러나는 강약 조절은 우리가 장기기증의 행위 자체보다는 그 너머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며 더불어 두 사람 각각의 끝과 시작을 극의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시켜 우리에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되물어 주기도 한다.

 

단어에 대해서도 대사에 대해서도 행위에 대해서도 연기에 대해서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문장인 것이다.




암흑과 빛


 

 

심장으로 박동을 느끼고 생을 느낀 자의 전부가

순간만큼은 전부로 여겼던 자들의 손을 거쳐

다른 이의 박동으로 생으로 전부로 돌아온

 

 

마지막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이식할 때, 그의 심장은 물질적인 소품이 아닌 무척이나 환한 한줄기의 '빛'으로 표현된다. 의사의 두 손 가득 담긴 그 빛은 시몽이 아닌 타인의 몸에 안착되며 또 다른 이의 박동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는 해당 장면에서 유일하게 '무대의 전부'로 존재했던 '빛'처럼 시몽의 심장이 (그 자신을 포함하여) 과정 안에 섞여있던 모든 사람들의 전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때의 빛은 극의 흐름을 전달했던 서술자와 그것을 처음부터 보기만 하고 있었던 관객들에게도 그 순간 그들의 전부로 각인될 만큼의 인상깊었는데, 그만큼 그 빛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있었다.

 

삶의 바로 그 옆에 자리한 죽음인듯 자리한 그 암흑의 공간은 언제든 누구한테로 쉽게 덮쳐 '그 빛'을 꺼트릴 수 있는 존재로 그려져, 죽어가는 자와 살고자 하는 자 그 경계에 있는 우리에게 '죽음의 평범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heart monitor beep


 

내게 'image'가 아닌 'meaning'으로 새겨진 이 극은 지금껏 봐온 극들 중 가장 어렵게 다가온다. 단순히 감정에만 치우칠 수 있는 극이 아닌 윤리적인 문제도 내포되어 있어 그 너머에 숨겨진 의미를 나 스스로가 찾아내야만 하기에 그런듯하다.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서 내가 삶을 살아가고 무엇인가를 해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때 본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살아있는 나를 수선해주기에 알맞은 극이었다.

 

공연 일정 후반에야 처음이자 마지막 관극을 한 나를 원망하며 빠른 시일 내에 사연으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발.



+ 원작이 되는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2017년 빌게이츠가 여름 필독서로 권장하기도 한 소설이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상태이기에 극과는 어떻게 다른 기분을 줄지 기대된다.

 

++ 공연이 끝나면 극장 밖 로비 천장에서 극의 처음에 등장한, 시몽 랭브르가 생을 느꼈던 파도가 물결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극의 여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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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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