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성적인 도망자들을 위한 변론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8.2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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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었다. 내게 맡겨진 업무들과 책임들, 마감기한들로부터.

 

나의 도망의 역사는 꽤 깊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이 사람들로부터 도망친 기억으로서, 상당 부분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 그 이유였다.

 

나는 혼자 슬그머니 가게를 둘러보다 종업원이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며 다가오거나, 나의 동선대로 따라오시는 걸 느끼면 다시 슬그머니 그 가게에서 도망쳤고, 나의 마음속에서 그리 거리가 가깝지 않은 지인이 “우리 언제 밥먹을거야?” 하고 물으면 멋쩍게 웃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으며, 다니던 실내 암장에서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사람이 없는 시간을 찾아다녔고, 어떤 모임을 파하고 가는 방향이 같아 친하지 않은 사람과 단둘이 남게 될 상황이 두려워 “저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들어가세요!”라며 도망쳤으며, 별로 나가고 싶지 않은 날 약속에 거짓말로 둘러대고 침대에 다시 누운 적이, 그래 부끄럽지만, 종종 있었다.

 

내가 벌인 일들에서 오는 막중한 분량의 일과 부담감, 쌓여있는 일을 두고 만나야 할 사람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막함에 나는 근 몇주간 모든 것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기에, 그 대신 '도망'과 '내성적인 사람들'에 대한 콘텐츠들을 들여다보며, 그 세상 속으로 도망쳐갔다.

 

     

 

일드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얻었던 나의 최애 일본 드라마로서, 제목이 강한 인상을 남겨, 종종 떠올리게 되는 드라마다. 취직 활동에서 전패한 한 여자가 가사 노동에 대해 급여를 받는 형태의 계약결혼을 선택하게 되는 내용의 드라마로, 오프닝에서도 정장을 입은 여주인공이 빌딩숲 사이에서 무언가에 쫓기듯 달리다가 웨딩드레스로 그 옷이 바뀌고, 계약결혼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헝가리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 하지만 도움이 된다’

 

소극적인 선택이라도 괜찮지 않은가? 부끄럽게 도망쳤다고 해도 살아남는 쪽이 중요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이론도 반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 에피소드2, 히라마사

 

     

구직 활동에서 도망치고, 평범한 결혼에서도 도망쳐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히라마사가 미쿠리에게 해주는 말로, 드라마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꽤 큰 위로를 주어, 종종 다시 꺼내보는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 말고도 나는 고백컨데 꽤나 부끄럽게 도망친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그때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생각해본다면, 분명 더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곳에 분명 '더 아프지 않은 나'는 있을거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소중한 사람에게서 도망치면 안 된다.

 

잃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볼품없어도 꼴사나워도

 

- 에피소드 10, 히라마사

 

 

도망쳐버리는 날이 있어도 심호흡하고 다른 길을 찾아서 다시 돌아오고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언제든 다시 화요일부터 시작하자!

 

- 에피소드 11, 미쿠리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때로는 부끄럽지만 살아남기 위한 도망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도망치지 않아야 할 때도 분명히 존재하며, 도망치더라도 심호흡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메시지를 주는 이 드라마를 사랑한다.

 

 

 

<내밀 예찬> - 김지선 지음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이라는 문구를 보고 홀린 듯이 독립서점에서 사왔던 책이다. 나 또한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내향인이다. 혼자 사는 집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쉽게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정이 없다”, “재미없다”, “깍쟁이다" 등의 말을 하곤 한다. (실제로 나는 “성격을 좀 고쳐야겠다”라는 말도 들어보았다.)

 

세상에는 결국 외향적인 사람들이 내어보인 목소리와 이야기가 더 많기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고충이나 생각이나 취향 따위의 것들에 대해 잘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만 이런가? 내 성격이 문제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던 적이 한번쯤 꼭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향성, 소심함, 소극성에 대한 글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대부분의 회사에는 점심시간이면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불만이 떠돈다. (중략) 사정이 뭐가 됐든, 사라지는 사람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해독제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단체생활에서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나 또한 이런 ‘점심시간이면 사라지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같이 밥을 먹더라도 주어진 시간까지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학창시절, “누구랑 앉지? 옷은 뭐입지?” 하며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서 들뜬 친구들 사이에서, 불편한 상대와 같이 앉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벌써부터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큰 함성소리에 응원점수가 주어지며 즐겁게 춤추기를 요구하는 지옥같은 레크레이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는 잠자리 등에 괴로워하며 늘 도망치고 싶었던 학생이었다.

 

단체생활에 알러지가 있는 탓에 단체에 무난히 적응하기도 힘들어하고 “은근한 불만”을 받기도 하는 그런 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옹호가 좋았다. ‘소심’이라는 단어가 아닌 ‘내밀함’이라는 한층 고급스러운 단어로 포장된 우리의 성향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내밀함이란 나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이해받고, 각자가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서로의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내밀한 기쁨과 복잡한 행복이 지켜질 수 있기를,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밀함'이라는 단어처럼 저자의 글은 온통 세심하게 선택된 소재와 단어로 가득하며, 정중하며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저자는 외향적이거나 당당함, 솔직함, 친근함을 가장한 무례함을 경계하며, 소극적이기에, 조심스럽기에, 상처받고 싶지 않기에 타인에게도 상처주지 않고자하는 그런 내향인들을 옹호하며, 예찬한다. 나도 그러했듯, 누군가에게는 "피곤하게 산다"고 여겨지는 당신의 내밀함도 이 책을 통해 위로받기를 바란다.

 

 

 

<난 여전히 도망치는 중> - 오휘명 지음


 

이 책의 저자 역시 내성적인 사람이다. 모험을 두려워하고, 익숙하고 느린 걸 좋아하며, 나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걸 즐기지만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며, 걱정이 많다. 도망치는 사람의 특징으로 책에서 언급된 다섯가지 모두 구구절절 공감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세상에는 활달하고 외향적인 사람들만큼 시도 때도 없이 사람으로부터,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사람도 은근히 많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니 너무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말라고요.

 

 

나는 일명 "콜포비아", 즉 전화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다. 어릴 때는 배달전화도 극히 꺼려했고, 그래서 부모님의 답답함을 사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배달의 민족이란 너무도 감사한 혁명이다.) 최근에야  배달전화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린시절의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있었으며, 전화를 꺼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콜포비아"라는 단어도 존재할 만큼 꽤나 흔한 성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서야 나의 유별난 문제라고 생각했던 전화공포증을 보다 편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함께 업무하는 사람들에게 문자나 카톡, 메일로 주시는 편이 편하다고 미리 알리는 정도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향적인 척’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처음 만난 사람들로부터 mbti의 첫글자가 e(외향적) 일 것 같았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는 I(내향성)이 80퍼센트를 넘어가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저 사람은 당당해서 참 멋있다, 진짜 ‘인싸'다, 하고 바라보았던 그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하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는 여전히 도망 예찬론자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도망을 쳐서 안 좋았던 것보단 좋았던 때가 훨씬 많았거든요.

 


*

 

도망과 소극적 선택에 대해 보고 읽는 동안 내 마음은 한결 진정될 수 있었다.

 

나는 제주도로 도망친 적이 있다. 휴학을 하고 전공과 진로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스펙쌓기’에 도전하던 나는 냅다 제주도 한달살이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다” 였다. 모든 고민과 현실로부터 벗어나 나는 그곳에서 마냥 행복할 수 있었고, 비슷한 이유로 도망쳐온 사람들도 보았으며, 가끔은 도망치더라도 그렇게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았다.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은, 분명 다시 현실을 나아가는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할 일을 쌓아두고 잠시만이라도 피시방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책상에 앉는 것도, 괜찮을거라 변명해본다.

 

 

[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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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무던히도 도망쳤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아무도 무엇도 날 잡지 않았는데...
      결국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요
      자의식의 감옥에서~~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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