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종로 스케치 4-2, 인사동 쌈지길

나와 담배연기와 나무시계
글 입력 2022.06.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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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사물. 내가 사물을 욕망하면, 사물에 비치어 그 욕망이 내게로 돌아온다. 그럼 나는 저 사물이 나를 욕망한다는 착각을 가장 먼저 받게 되지. 욕망을 사랑의 얼굴 조각이라고 치자면, 바꾸어 써볼 수도 있겠다. 아침 출근길 2층 버스 앉은 자리서, 걸어놓고 잊어둔 시계가 햇빛을 반사해 저를 알리는 때, 아직 에어컨을 틀지 않아 땀이 찬 등을 들썩이는 순간 풍기오는 향기가 자신을 알리는 때, 잠깐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것. 그런 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잠깐만 사랑을 느끼고 다시 일상의 감각에 묻히어 잊히고, 또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일련이 빈번해졌으면 좋겠다. 다 다른 감각으로, 여러 가지 사랑으로 왔으면 좋겠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 종로 스케치 4, 인사동 中

 


글쟁이들은 이 피로한 작업을 어떻게 밥 먹듯이 하나 몰라. 하루에 두 개의 글을 쓰려 하니, 버거움부터 든다. 사고회로가 멈추었다. 텅 빈 것이 바보가 된 기분마저 든다. 그래도 내일이면 다시 출근해야 하고 그러는 동안 글감으로 쌓아두었던 것들이 사라질까 봐 억지로 잡는다. 리프레쉬를 위해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와선 나의 해방일지를 2연참이나 하고 친구랑 1시간가량 통화했는데, 아직도 이러는 걸 보면 4시간이 아까운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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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했지? 글의 톤이 달라져서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 조금 막막하다. 무드를 잡기 위해 그때 한 곡 반복으로 내내 틀어둔 검정치마를 재생한다. 스웨이드 수첩을 사고 나온 때부터였지. 이제 일상 내내 함께할 사물이 추가된 이 기분을, 굳이 자세히 풀어 적지는 않겠다. 아마 여러분도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의 그것을 궁금해하련다. 어떤 사랑하는 사물을 가지고 있고, 그것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것을 기쁜 눈으로 조잘거리는 동안, 나는 당신을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내게 대입하며, 마저 남은 쌈지길을 걸었다.


한 손에 수첩을 꼭 쥐고 걸었다. 사랑이 으레 그랬듯, 첫 순간은 억제되지 않도록 들뜨는 까닭이다. 거기에 최초로 문댈 것이 쓴 지 오래된 모나미라는 것이, 이 도취에 찬물을 끼얹어준다. 잉크가 조금 퍼져 나올 정도로 오래 썼고, 또 가방에 담아둔 채 이리저리 빙빙 돌린 모나미 펜.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가지고 정 같은 것을 네게 대입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곧 잉크가 마를 너를 알기에 사사로이 대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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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적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쌈지길을 지금보다 4배는 빠르게 돌곤, 에이, 이쁘긴 한데 살건 없네라고 말했던 나를 똑똑히 기억한다. 수공예품의 향연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를 이해할 수 없다. 고로 즐거웠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이 어떤 변화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때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의 내게도 애호하는 것 정도는 있었겠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하나도 간직되지 않은 것으로 보면 분명 사랑한 게 아닐 거다. 사랑이란 단어를 남발하기엔 조금 자신이 없지만… 나무시계를 위시해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조리, 내게로 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 아직 사랑의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것인가?! 탐구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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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물들이 몸에 더불어 있고, 새로 온 것이 비어있는 나머지 한쪽 손에 셋자리를 잡았다. 전전 글에 썼듯 날씨는 겨우 적당했고, 그래서 사실 이미 땀에 젖었고, 나는 행복했다. 이런 느낌, 땀이 나건, 덥건, 무엇이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은 되게 귀해서 만끽하기로 했다. 더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다. 쓸 것이 아무리 많이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도, 더러는 서울 하늘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제집으로 지치어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기분이 이미 아무래도 좋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책 없음이라는 상태는 다 지나가는 때까지는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


찬찬히 걸었고, 더 오래 바라보았다. 그 왜, 강아지 털을 모아서 강아지로 만드는 밈이 있던데, 심지어는 그런 것도 팔고 있었다. 진짜 강아지 털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레고블럭으로 만든 커다란 강아지들도 있었고, 빈티지한 느낌을 잔뜩 풍기는 수공예 시계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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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내게 주인장이 와서 말을 건넸다. 뭐에 쓰시려고 사진을 찍냐기에 글을 좀 쓰려고 한다 했다. 흔쾌히 '이것들은 스테인레스 강을 박박 갈아서 만든 시계'라고 답한다. 확실히 수공예의 거친 흔적들이 보인다. 매끈하지 않은 마감처리, 그것들은 마음을 톡 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내겐 이미 시계가 있는 걸. 파란색 라피스라줄리를 닮은 어느 시계 앞에서는 진짜 오래도록 망설였지만, 시계가 하나 있는 통에 또 살 수는 없다. 내가 이 시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주인장은 내가 사지 않을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결국 다음으로 구매한 건 자수 손수건이다. 나는 새로운 관심사 하나를 알게 된다. 자수를 놓은 에코백 앞에서도 느긋하게 고민해보았지만, 지금 들고 있는 가죽 가방이 더 마음에 들어서 내려놓았다. 손수건을 샀다. 땀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흔한 손수건 하나 사둘 생각을 안 했다는 것에 어이없어하면서. 그렇지만 결국 손수건을 구매하게 된 이유는 땀이 아니라 순전히 자수 때문이었다. 흰 무명천에 파란색 꽃이 우둘투둘 쪼맨하게 나 있는 것이 글쎄, 여백의 미를 팍팍 풍기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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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난다. 무작정 관심 리스트에 넣으려고 보니, 내 관심 리스트 안에 어떤 게 있는지 모르겠다. 따로 정리해둔 게 없어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내가 어떤 것에 끌어당기우는지 궁금해 본다. 앞서 말한 것, 잘 무두질 된 가죽과 스웨이드, 약간 거칠한 종이와 파피루스. 그리고 또 골덴 재질, 결이 잘 다듬어진 나무, 색깔이 있는 목재, 수정과와 계피, 향기, 향기…


향기는 막 관심이 생긴 분야라서 뭉뚱그려두고, 그 뒤에다가 자수를 추가했다. 손수건의 자수는 그렇게 화-악 날 끌어당기진 못했지만, 언젠가 자수에 대한 내 애호를 기억하기 위해서 샀다. 그것은 구매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전 글에 써두었지만, 구매하는 데 엄청 망설이다가 못 산 것들이 많기 때문이고, 산 다음 후회하느라고 사는 습관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작정 사기로 했다. 어차피 통장에 썩혀두다간 주식에 들어가, 갈 곳 잃은 파랑색이 돼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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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쯤 꼭대기에 도착했다. 하늘이 보이는 곳부터는 테라스와 앉을 곳과 마실 것들이 있다. 앉을 데도 넉넉잖은데 혼자 자리 잡기는 부담스러워서 사진을 좀 찍고 돌아 나온다. 테라스 한편으로는 뭔가 사진 찍기 좋을 것 같은, 잎사귀들로 덩굴 흉내를 낸 좁은 출입로가 있다. 그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쌈지길 바로 옆 건물인 아이디어스 마켓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쌈지길에 왔을 때 유일하게 건져온 것이 '비 내린 사려니 숲길'이라는 이름의 섬유향수였는데, 여기서 만났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말 그대로 비에 완벽히 젖은 상태로 사려니 숲길을 걸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3박 4일 중 3일이 비였고, 우리는 그대로 스쿠터 일주를 강행했다. 비에 젖은 상태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그중 한곳으로 사려니 숲길을 택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창과 완전히 우거진 수풀림을 연상시키는 나무들의 한 중앙으로 들어가서, 이미 속옷까지 다 젖었는데 이파리 우거진 곳 아래 떨어지는 물줄기가 대수냐면서 샤워했던 기억이, 하필 내게 있었던 것이다. 


마음껏 호흡했다. 그 숲의 땀 냄새는 독특했다. 비에 완전히 젖은 숲의 향기를 모르진 않는데, 그것과도 다르다. 다른 한 가지 향기에 대한 기억은… 훈련병 때의 각개전투 이야기라서 스킵하겠다. 그것도 되게 좋은 기억이긴 하다. 여튼, 여기서 저렴한 향수를 구매했었다. 이번에 가니 새빨간 거짓말과 그 형제들은 방을 빼두었고, 다른 향수들이 채워져 있다. 마구잡이로 흠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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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에 대한 취향을 정립해가고 있다. 이 분야도 되게 깊고 다양한듯해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향수 거의가 선물받은 거라, 그게 무슨 향기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산 건 시트러스향의 섬유향수와 남탕 스킨 냄새의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 머스크 향이라는 것은 말로써는 대단히 유명한 것이라지만, 아직 그것이 정확히 어떤 향을 특정하는지 각인이 덜 되었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머스크 베이스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화이트 머스크를 하나 고른다. 그래야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자 향수 쪽에 유독 관심을 가진다고 여동생이 얘기한 적이 있다. 자기는 남자 향수가 좋은데, 우리끼리 자주 하는 말이지만, 영혼이 바뀌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빼먹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란, 상대방이 원하는 향기를 얹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는 것이다. 향수의 용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아직은 2층 버스에서 맡는 내 냄새가 좋아서 사는 것이라 잘 모르겠다. 나는 플로럴이랑 파우더리를 좋아한다고 동생이 그랬다. 오늘은 화이트 머스크와 페어트리라는 이름의 향수를 골랐다.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다. 방금 포장을 뜯었지만, 그 안에도 설명서가 안 들어 있다. 노트가 어떻다는 둥, 베이스가 어떻다는둥, 이런 걸 자주 접하다가 보면 향기의 체계에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쉬움을 낳는다. 머스크는 어떤 향기라고 말해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페어트리는… '비내린 사려니 숲길'의 그 냄새다. 그 향수가 대신해 이미지화를 해준 덕분에, 이 냄새는 한동안 청록색 숲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머스크는 아직 이미지화가 안 된다. 향기 자체에 대해서 심상화나 공감각화가 잘 안 된다. 연상되는 이미지가 적기 때문이겠거니. 향기를 얹고 세상을 거닐다가 보면, 언젠가 그 향기가 내리 앉을 사물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또는 내 왼쪽 손목에 언제나 걸려 있는 나무시계에 여러 가지 향수 내음이 베이면, 그것이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때까진 아무렇게나 뿌리고 다닐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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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쌈지길을 나왔다. 얼마나 오래 걷고, 멈추었는지 그려지시려나. 다음으로 갈 곳은 '안녕 인사동'이다. 지난번 르네 마그리트 展으로 처음 알게 된 곳이고, 그쯤 오픈한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입점이 덜 된 휑한 건물로 기억하고 있다. 가는 길, 잠시 거리 한중간의 돌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다시 출발하려 고개를 들었는데, 또 발이 걸렸다. 그쯤엔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곧 해가 지고 하루가 마감될 것 같아서, 글로 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걸을수록 쓰는 시간은 줄어들고 쓸 것들만이 늘어날 것 같아서, 마음속에는 지면을 박차는 힘찬 관성이 생겨나는 즈음이었으나... 구면이 공교로움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걸어왔다. 내 나무 시계에 적힌 글씨와 똑같은 글귀가 간판에 걸려 있었다. 


나무 시계는 입사 후 처음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다. 당시면 얼마나 오래 고민했겠는가. 친구한테 물어보니, 꼬박 3번 만날 동안 고민했단다. 나무 시계라니, 나무로 된 소품에 눈을 뜬 건 우연히 유튜브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이 매장, 보우드 덕분이다. 구매를 결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그 중 어느 한 가지를 고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친구는 3번 봤다고 하지만, 나는 몇 번을 들여다보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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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자심목은 지금 내 왼쪽 손에 있다.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이 양측에 걸린 호두나무의 색. 호두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원관념이다. 그리고 저 색깔은 가장 나무다운 빛깔이고 수더분한 성격의 색깔, 특히 시계 안의 주황빛과 너무 아름답게 어울린다. 결국은 신비롭고 독특한 보라빛을 띤 자심목을 선택했고 후회는 없지만, 다시 보아도 마음이 마구 흔들린다. 


오늘은 뭐가 되려는 날인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계는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오프라인 매장이 어딘가 있겠거니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매장은 또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오프라인 매장은 인사동 매장 한 곳뿐이란다. 점원이 내 손목을 보고 반가운 눈치이다. 자기네 시계를 차고 매장에 들어온 나를 보고 점원도 신기해했을 것이다. 


*


'안녕, 인사동'에 얽힌 이야기를 한참 적었으나, 이번에도 분량 조절에 대차게 실패하여 종로스케치 4-3으로 그 내용들을 전부 다 옮겼다. 공교롭게 전부 먹을 것에 관한 이야기라서, 4-2번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물들에만 집중해주기로 했다. '안녕, 인사동'을 빠져나오고 종로방면으로 다시 걸어서 빠져나왔다. 중간중간 많이도 멈췄고, 스웨이드 수첩을 벌써부터 많이 사용한 것 같아서 조바심을 느낀다. 더구나 잉크가 마구 번지는 모나미펜이라서 더욱 그랬다. 


이젠 더 살 것이 없겠거니, 그래서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길가의 1층 매장들과 좌판을 들여다보았다. 스와로브스키 매장에 호객되어 은 목걸이랑 그에 달아줄 팬던트도 열심히 고민해보았다. 팬던트로는 지난번 영화에서 본 '다윗의 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거기 없었거니와 내가 유대인이 아닌 이상 그들의 진지함을 침해할까 보아 구매하지도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잇는다. 크롬하트 링을 목걸이에 꿰어보라길래 이것저것 반지들도 꿰어 목에 걸어도 보았으나, 결국 구매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호기심만으로는 구매하지 않았다. 


거리의 좌판은 액세서리를 많이들 판다. 안 그래도 장신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만큼 이 좌판, 저 좌판 기웃거렸다. 목걸이는 아직 아닌듯했고, 귀걸이는 차마 아니고, 남은 게 반지랑 팔찌뿐인데, 반지는 다가올 때를 기하여 미뤄두었으니 결론적으로는 팔찌뿐이다. 팔찌론 뭐가 있을까. 예전에 흐르듯 보아둔 것들을 기억해보면, 가죽으로 된 띠가 있었고 은이나 금, 금속으로 된 것들과 비즈를 염주처럼 꿰둔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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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가짜 염주들, 플라스틱으로 된 비즈들을 꿰어둔 양식에도 각양각색의 모양이 있다. 그러고 보니 1년 이상 된 애호하는 사물이 하나 기억났다. 염주, 나무로 된 구슬들을 만지는 기분이 좋아 꽤 오래 차고 다녔다. 좌판에서 산 싸구려 염주라 본새는 안 났지만, 애초에 염주라는 것이 그런 용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는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좋아서 오래 차고 다녔다. 그러니까 사람이 많은 곳에 홀로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목에서 빼 손에 쥐고 돌리곤 했다. 한 알, 한 알 느리게 꼽으면서 시간을 까먹으려 했다. 그건 내게 다른 집중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로 뻗어 나가려는 의식을 바로 앞 손안에 가둬두는 일이기도 했다. 


어쩌다 터져버린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염주의 줄은 끊어졌다. 거리로 알알이 쏟아졌고, 수습할 수도 없이 끝나버렸다. 그 후론 다시 사지 않았는데, 시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지금 내게 그것이 필요치 않아 시나브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사람들한테 의식을 뺏기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그래서 이 좌판, 저 좌판 다녀본 끝에 아무 염주도 사지 않게 되었다. 지금 그것을 사랑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다. 


좌판에서 팔기엔 조금 뜬금없지만, 풍경을 올려둔 매대도 있었다. 거기 있는 쉰 가지의 종을 다 한 번씩 쳐봤다.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태어난 까닭에, 소리가 같은 것이 하나 없었다. 서재에 매달아둘 요량으로 어렵사리 하나 구매했다. 글 쓰느라 아예 까먹어버린 동안, 바람 같은 것이 불어와 툭 쳐주었으면 싶었다. 서재가 있는 옥상에는 빈 바람 소리가 노도같이 들어차 두려운 소리를 내는 정도이니, 쉴 새 없이 울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생각보다 바람에 울리지는 않았다. 내가 문을 여닫는 때, 혹은 바람에 문이 쾅하고 닫힐 때나 울려주었다. 다음에는 풍경을 사기 전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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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스름이 깔렸다. 글 쓸 시간은 완전히 사라졌구나. 차피 자리 잡고 쓰지 못할 값이라면, 집중 못 할 여기서라도 되는대로 깔짝여야지, 인사동 초입에는 빈 상가가 많아 스산했기에 오히려 적기 좋았다. 키워드 위주로 적되, 떠오른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줄 글로 적었다. 발이 아파 신발은 벗어두었고 몸에서 열기가 다 빠져나가고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신발을 신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 수첩을 들고 짤랑짤랑 걸었는데, 사위 모조리 어두운 상가 틈바구니에서 혼자 빛을 내는 상점이 용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눈길을 주었다. 


되게 유행에서 뒤처진 것 같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크리스탈 환타지', 적나라한 네이밍이다. 뭐하는 곳인가 들여다보았는데, 생각지도 못 한 자수정 원석이 죄다 귀찮은 듯이 앉아 있었다. 묵직한 무게감을 선보이는 크기의 원석들, 아가리 사이로 다듬지 않은 이빨들이 잔뜩 나 있다. 속으로 누군가 이제 그만이라고 외쳤지만, 진짜 수정 파는 가게인지는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양옆으로는 색색들이 수정 원석이 무거운 엉덩이를 퍼질러 앉아 있었고 세공품들도 더러 있었지만 내가 해보이기에는 너무 진지한 모양들이어서, 결국 팔찌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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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수정이라는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면 끝 발음 뒤로 웅웅거리는 공명음이 생긴다. 수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느 동굴 안에서 발광하는 수정체가 떠오르는데, 그 동굴 비슷한 느낌이 이름에서도 난다. 보는 이가 점원뿐인 곳이라 계속 그 이름을 부르면서 팔찌를 골랐다. 수정을 가지게 된다는 기분은 여남은 피로를 가게 바깥으로 힘주어 밀어놓는다. 수정, 동경하는 수정의 실체와 비밀을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안의 크리스탈 환타지를 벗어내는 시간이었다. 빛이 투과되는 예쁜 돌, 수정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딱 이 정도로 차분하다. 그래도 비즈를 만져보면, 좌판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매끈하고 단단하다. 손에 놓고 굴려보면 속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 속의 크리스탈 환타지는 수정구에 조명을 쏘아 놓고, 뭐랄까, 인센스 향기와 몽롱한 음악에 더불어, 내 마음 안을 들여다보려는 아라비안 집시의 두렵고도 신비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둥글게 세공한 크리스탈에는 그런 몽롱함이나 사람을 홀리는 화려함이 없다. 오히려 잔뜩 옹골차고 투명한 느낌이다. 


팔찌 두 개를 골랐다. 기왕이면 색이 있는 게 좋고, 빛이 투과되면 더욱 좋다. 예쁘게 세공해둔 라피스라줄리 목걸이가 눈에 띄었지만, 가격이 상당해 바라보기만 하고 나왔다. 그러자 매장 바깥으로 밀어놓은 피로가 한꺼번에 업힌다. 더구나 내 몸에 주렁주렁 달아둔 것들이 많아서 밥도 안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 


이번엔 구매한 것, 사물들만으로 잔뜩 썼다. 그러지도 못했겠지만, 한편으론 부러 진지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퐁퐁거리는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너무 길어지는데다, 그렇게 해서는 이 많은 애호를 다 녹여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보고 사고 느낀 것만으로 글을 써본 것은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비는 낯선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물들을 구매하는 것은 아름답고도 드문 일일 것임에. 그래도 그렇지, 사고 보고 느낀 것만으로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랬으니 이전 에세이에서 그 정도 분량으로 끊었겠지. 


사물을 구매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구나. 인사동의 어디쯤에서 그런 생각에 젖기 시작했다. 쇼핑은 대게 귀치 않은 일로 여겨지곤 했는데, 그것은 사물을 필요에 의해 구매하려는 습관의 결과였다. 필요치 않고도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라, 그것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번지게 한다. 가죽 수첩, 자수 손수건, 향수, 나무시계, 수정 팔찌, 풍경, 이런 것들은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지만, 내 마음에 많은 것을 던진다. 누군가 한 말을 이제 이해하겠다. 소비는 취향이고, 실은 자신을 사물에 투영하는 일이라는 말을. 


인사동을 좋아하는 이유도, 인사동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만나게 된 이유도 그것이다. 날 입혀볼 공간과 사물들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 그렇다면 인사동은 내 억눌리고 미뤄둔 한 가지 욕망을 닮은 것이다. 공간이 내 욕망의 어느 구석을 겨누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교롭게 닮아있는 셈이다. 수공예품 같은 것들, 수더분하고 소박하며, 화려하지 않은 것, 오후 햇발 아래 누워 잠들어 있는 것들. 말하자면 회사에 가져갔을 때, 신기하다는 듯이 무관심하게 치어다보게 만드는 것들. 반짝이지 않는 것들이고, 눈을 사로잡지도 않는 것들이며, 찾아오는 손님이 드문 것들. 좀체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향기롭다기에는 아리송하면서도 머금고 지나간 자리에는 의문을 남기는 것. 빛을 비추면 머금어 속 깊이 삼켜내는 것. 여백으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옹골찬 것. 오래도록 변치 않거나, 애초에 유행이 아니었기에 오래도록 제자리에 있을 것. 여기엔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과 나이길 바라는 모습들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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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머지 반쪽, 담배 연기와 보라색 인센스, 까지고 부르튼 손등, 거친 피부, 성나있는 눈썹, 좁은 미간, 잘라도 잘라도 자라나는 지저분한 수염과 분출되려는 성질과 그 닮은 욕망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여전히 나인 것들이고, 나의 모순이며, 결코 융화될 수 없는 것들. 나는 온순하거나 거칠다, 지극히 그랬다. 둘 중 어느 한 것으로 존재할 수 없어, 다만 가만 앉은 채로 있는 나를 오래도록 고민하게 만든 이 사실들. 그런 사실들은 아직 덮을 수도 섞어볼 수도 없는 나라서, 그래서 아직은 계속 글을 쓰게 된다. 이런 것들엔 온순한 사물이 덮이지 못하는 나머지, 맨살에 돋아난다. 그래서나마 글로써 바꾸어 분출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글 쓰는 영혼, 나의 글 짓는 마음은 결코 온순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잠들어 있으려 하지도 않고 적당히 머무려 하지도 않고 자꾸만 무언가 더 커다란 것을 바라고 부르짖는 형태를 띤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인 것들, 나의 바른편 양지바른 모습들이 또다른 한 가지 사실로서 내 안에 있고, 의식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중의 어딘가에 있다. 멀리 떨어진 두 가지 사이를 오고 가는 모습으로 있다. 사랑하는 사물들, 저기엔 나이길 바라는 온순한 모습들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념과 태도, 즉 나의 눈빛이 그랬고, 나의 한쪽 편 양지바른 의식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온순한 욕망들이 사물에 진득한 시선으로 묻어난다. 욕망하는 사물들, 나는 저 무용한 것들을 되게 사랑하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핥아본 사물들이 내 모습을 하고서 나를 돌아본다. 나의 파편들을 간직한 하나하나들이 나와 눈을 맞추면, 그 특이점에 빛이 맺히는 듯하다. 


사물들을 통해, 그에 빗대어, 잘 드러나지 않고 가만 앉아 기다리기만 하는 나의 모든 부분이 조금씩 드러나려고 한다. 미루고 섣불리 인정하지 않고 당차게 긍정하지 못하는 소심함들, 실은 모순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스스로 긍정해 보일 수가 없는 마지못함들이 사물을 통해서 보이기 시작한다. 눈 바깥에 전시되기 시작한다. 더 정확히는 그것을 사랑하는 통에, 비추어 드러나곤 돌아 들어온다. 사물은 흰 벽이고 거기에 눈빛이 맺힌다. 


그럼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응시하고, 그렇게 나를 조금 더 이해하고, 마침내 받아들이길 원한다. 또 수더분하고 반짝이지 않으며,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으려 하고 잠자코 꿈꾸고 멈춰있으려는 것들, 그런 사물들이 나를 덮어주고 기억해주길 바란다. 가죽과 골덴과 나무와 수정 같은 내 부분을 덮어두고 보존하길, 어느샌가 슬며시 잊혀버리는 나의 부분들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내 몸에 길이길이 얹혀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일상을 빛나게 해주었으면 한다. 출근길로부터, 지루한 사무실로부터, 반복되는 모든 일상으로부터 나를 잠깐씩만 꺼내주었으면 한다. 그건 별것 아닌 일일 수도 있다. 시계에 반사된 햇빛을 통해서, 펄럭인 셔츠 품에서 고개를 뺀 향기를 통해서, 바쁜 마음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는 때 걸리적거리는 오른쪽 손목의 감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고, 땀을 닦아야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처럼 잠깐씩만 돌아와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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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나무시계인 너희를 발견하였듯, 누군가 나의 나무시계를 발견해주었으면 한다는, 저 안 깊숙이로 도망치려는 이 마음을 되게 어렵사리 써본다. 두 가지로 분리된 욕망, 섞일 수 없이 이격된 모순이 내 안을 오가고 있었음에도, 내 가죽은 너무 두껍고도 거칠게 나 있고 털이 무성해 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얼굴에서 이미 나를 충분히 읽었노라 생각했고 그랬노라 말해 온다. 그리곤 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의무도 없는 것이었을 테며, 실은 내가 체념해 그 모습으로만 남으려 한 까닭이다. 


오해가 많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쪽짜리로나마 충분하고도 강렬한 인상이고 거기서 누군가는 상처 입어버리기도 했거니와, 나 또한 그런 그들로부터 멀어져 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먼 어느날, 누군가에게 선보일 나를 어렴풋이 그리는 한편, 그보다는 누군가 발견해내기를 소망했다. 기다리고 있는 나를 꿰뚫어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지막이 날 불러보길 바란다. 너는 참 사납지만 수더분하고 소박하다고, 나는 네가 무섭지 않다고. 


이것이 현재의 시간 축 위에 그려지는 나. 종로가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했지. 그것을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안의 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쌈지길에서의 오후는 내 현재의 시간을 겨눈다. 단 하루 동안, 오래 미뤄두어 슬며시 잊힌 내 한 가지 욕망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다루는 습관이 탈피를 원하기 시작한다. 그 모든 욕망은 현재적인 것이고, 그것을 다루는 습관, 그러니까 미루고 체념하고 억제하는 습관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현재의 시간과 그 안에서 동기화되는 과거의 시간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내게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 내가 더 정확히 이야기해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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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는 길,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그 고마운 말이 기억났다. 그때의 내겐 대수롭지 않아 잊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내겐 인사동이 어울린다며, 아메리카노보다는 수정과를 시킬 때 훨씬 어울린다고 해주었던 그 고마운 말이 이제야 마음에 닿는다. 깊숙이 밀어 넣었다. 수더분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요령은 없지만 자존심은 강해 속앓이를 많이 하던, 그런 이상스러운 나를 그렇게 빗대어 표현해주었구나, 너는. 

 

이제 누군가 날더러, 너는 네가 찬 나무시계 같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또는 속이 꽉 찬 촌스러운 수정팔찌 같다고, 수더분한 가죽 수첩 같다고, 귀엽다가 만 자수 손수건 같고, 비내린 사려니 숲길처럼 축축하고 푸근하다고, 그렇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더더욱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더더욱 그런 모습, 그런 욕망만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내가 먼저 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욕망한다. 욕망하기 시작했다. 나를 떠미는 불안한 바람이 멎어 나는 노 젓는 손을 고민하던 중, 사랑하는 무용한 것들, 날 닮았거나 내가 닮고싶은 사물들의 앞에서 나는 이제 막 피어나 망설이기 시작하는 욕망을 굽어본다. 그것은 긍정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저 사물들과 닮았노라고 말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나는 변할 것이고, 이미 의뭉스러운 정도로만 변화는 시작되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요즘 보고 있다고 서론에 썼지. 이것은 나의 해방일지다. 오래도록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지만, 이렇다 할 선택 없이 나의 소심한 욕망은 있을 자리를 잃어간 것이 아닐까. 그 욕망은 무언가를 갖겠다는 소박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창할 것도 없는 것이다. 나의 양지바른 수더분함들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그러기 위해 내 안의 부정이 마침내 눈을 감거나, 서로 잘 섞이어 하나의 모습만으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 것도 아니면 나의 수더분함들이 나의 부정에 미루어 잊히지 않는 것. 그래서 내가 온전한 나의 일체를 최소한 잊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 날을 제대로 골라, 쓰다만 에세이 '무애'로 돌아올 때 써보려 했던 것들이 여기 와르르 쏟아졌다. 나의 지금, 나의 현재, 그리고 이 모든 현재의 시간을 오래도록 보아온 내가 마침내 맞은 해방의 초입. 인사동에서 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겨눈 나의 현재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마무리를 지어주는 것이 좋을까. 그것은 마무리 지을 수 없으며, 그를 필요치 않는 것들이라고 나는 얼른 생각을 매듭지어버린다. 그것이 현재이기 때문이고, 현재가 뒤쪽 방향으로 흘러 고이면, 즉 이야기해 보일 수 있는 것인 과거가 되면, 이미 다른 글로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략 올봄을 기하여 바뀌는 중이고, 그것이 어떤 해방을 불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러와, 지금 막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충분히 형체를 갖추지 못한, 연기 같은 것이라 섣부르게 불러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글을 써두었으니, 나는 앞으로 언제든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품 안의 수첩을 꺼내어 오늘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충분히 변하고, 해방됨을 느끼는 어느 날까지, 내가 계속 쓰고 있을 까닭이다. 이렇게 길게 씀으로써, 이제부터 인사동은 22년 초여름 지금으로 길이 남아 있을 까닭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래도록 푸르를 어떤 서론이고 하나의 예언, 내지는 예감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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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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