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로 마음 챙기는 법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2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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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을 읽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경험해본 적 있는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살면서 한 번쯤은 시를 읽고 울어보고 싶었다. 그때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오래 전부터 나를 울릴 시를 기다려 왔다.

 

책 『마음챙김의 시』에 담겨있는 시들은 나를 울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고 정화시켜 주었다. 눈물이 필요치 않은 카타르시스였다.

 

엮은이 류시화 시인은 말했다. "시를 읽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여러 색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마음챙김의 소중한 도구이다."

 

나에게 마음챙김의 도구가 되어준 시를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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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 앨런 긴즈버그 <어떤 것들>


 

나는 늘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했다.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이별이 있다는 것이고, 이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으로 다가오곤 하니까. 그래서 어떤 대상에 크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뭐든.

 

그 헛된 노력은 보통 마음의 크기를 정해 놓는 일이었다. 이 정도까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은연중 '그래 봤자'라는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마음을 품은 채, 일정 수준 이상 넘어가지 않도록 선을 그어 놓았다.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되뇌었다. 언젠가는 상처받고 말 거라고, 기어이 울고 말 거라고, 그러니 온 마음을 다하면 안 된다고.

 

그럼에도 상대의 무한한 마음을 바랐다는 것은 어리석었고, 그 '정도'의 크기는 매번 달라졌다는 것은 우스웠다. 애초에 마음의 크기를 정해 놓는다는 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일까. 그런 게 가능했으면 이별이 그리 아플 리가 없는 거다. 누군가를, 어떤 것을 떠나보내고 떠나는 게 그리 어려울 리는 없는 거다.

 

시 <어떤 것들>은 더 이상 내가 사랑하지 않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도 언젠가 원을 그리며 나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들은 잠깐일지라도 나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나와 함께 숨 쉬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모으고 모으면, 결국 '나'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책에 실린, <아닌 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영원할 수는 없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잊혀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내 머릿속에, 내 가슴속에 남아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구슬이 장기 기억소로 옮겨지는 것처럼, 영화 <코코>에서 망자가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다면 사후세계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관계에서 끝의 모양이 어떻든 이제는 괜찮을 것도 같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시간들, 추억들은 결국 나의 일부가 될 테니. 여기 기록해 놓은 이 시도 영원히 나의 것이 되겠지.

 

 

 

<의자는 내주지 말라>


  

 

마음은 우주의 중심인 

하나의 점과 같고,

마음의 다양한 상태는 이 점에 찾아와

잠시, 혹은 길게 머무는 방문객과 같다.

 

이 방문객들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대가 자신들을 따르도록 유혹하기 위해

그들이 그린 생생한 그림을 보여주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것들에 익숙해지되,

그대의 의자는 내주지 말라.

의자는 그것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의자를 계속 지키고 앉아

각각의 방문객이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고

알아차림 속에 흔들림이 없다면,

만약 그대의 마음을 깨어 있는 자, 아는 자로 만들면

방문객은 결국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 방문객들에게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몇 번이나 그대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대화를 해보라, 그러면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게 될 것이니

마침내 그대의 마음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 아잔 차, <의자는 내주지 말라>

 

 

이 시를 읽자마자 떠오른 것은 즐겨 보았던 웹툰 <유미의 세포들> 속 한 장면이었다. 꿈속에서 세포 마을로 간 유미가 게시판에 자신의 소원인 웅이와의 해피엔딩을 적은 메모를 붙이자, 게시판 관리자 세포가 건넨 말이다. "미안하지만 웅이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야.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어. 이곳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내 인생의 주인공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으로 정해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주인공 자리를 내주지 말라는 웹툰의 메시지가 방문객에게 의자를 내주지 말라고 말하는 시인의 의도와 닮아 보였다.


웹툰 <이태원 클라쓰>에서는 이런 대사가 있다. "지금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순간은 편하겠지. 근데 말이야 그 한 번들로 사람은 변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박새로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사이다.

 

<의자는 내주지 말라> 시에 비추어 본다면, 그는 타협이라는 방문객이 와도 자신의 신념이라는 의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의자가 신념이었지만 유미에게는 자아였고, 다른 누군가에는 그것이 양심이 될 수도, 가치관이 될 수도, 꿈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무엇'인 것이다. 내게 의자는 무엇일까. 나는 그걸 내주지 않고 잘 지키고 있는 걸까.

 

 

 

<위험들>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것은

순진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시도하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므로.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배움을 얻을 수도, 느낄 수도, 변화할 수도,

성장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

확실한 것에만 묶여 있는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오직

진정으로 자유롭다.

 

- 자넷 랜드, <위험들>

 

 

과연 나는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고백하자면,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피하기에 급급한 사람이다. 가던 길만 가고, 하던 일만 하고, 만나던 사람만 만나는. 그것이 불상사를 피하는 길이며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 위험하다는 이유를 대며 피했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고 감당하기 두려워서 도망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호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를 가두고 통제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안에서는 자유롭지 않냐며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새장 속이 따뜻하고 아늑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새장 속'일 뿐이다. 새장 밖, 더 넓은 세상의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험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두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시 <위험들>를 만나면서 알아간다. 책에 실린, <새와 나> 시가 떠오른다.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 세상 어느 곳으로도 / 날아갈 수 있으면서 / 새는 왜 항상 / 한곳에 / 머물러 있는 것일까 / 그러다가 문득 나 자신에게도 / 같은 질문을 던진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에 더 이상 망설이고 싶지 않다. 한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길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더라도, 그 상처가 흉터로 남더라도, 이 시들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내고 싶다.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 네이이라 와히드, <흉터>

 

 

*

 

이 외에도

라이너 쿤체의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타일러 노트 그렉슨의 <무제>,

조니 웰치의 <꼭두각시 인형의 고백>,

마야 안젤루의 <나는 배웠다> 시가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시'가 마음챙김의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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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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