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재 書齋

한껏 바람을 머금은 커튼에 얼굴을 부비고 싶어지듯
글 입력 2022.04.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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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가 생겼다.

 

바로 위층 옥상의 버려진 방을 나름 진지하게 닦고 쓸었다. 벌써 지난 여름, 동생이랑 같이 살 집을 찾아 서울을 전전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용인의 회사까지 가려면 경부고속도로에 가까워야 하겠고, 사회초년생이니 집값은 싸야 하니 막막했던 기억이 이제 탁 놓여난다. 그렇게 찾은 보광동, 이태원 바로 밑에 위치한 이곳은 재개발 확정지란다. 2년 전세 계약이지만, 언제 나가야 할지 기약이 없고 그마만큼 재계약은 아마 어려울 것이다. 이런저런 마음의 짐을 달고 들어온 집이었지만, 그것이 물어다 준 기연이었구나 한다. 투룸 전세는 많이 비쌌다.

 

우리 집은 1층의 원룸 몇 개와 2층, 3층의 전층 전세, 그리고 옥상과 옥탑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층을 다 쓴다니, 평수가 작아도 그것이 주는 기분은 퍽 좋았다. 회사에 적응하는 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집 옥상을 찾은 것은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재택근무 덕분이었다. 집에서 일을 하자니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 바야흐로 벚꽃 망울이 터지는 시기의 꼬박 일주일을 옥상에 앉아 멀거니 보냈다. 그러니 복수심이 좀 들어야 말이지. 나는 어떻게 나를 두고 저 홀로 즐거운 이 세상에 복수 해야 할지를, 봄볕 아래서 궁리했더랬다.

 

1년은 참 거짓같이 사라져 있었다. 너무도 바쁜 통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각 계절마다의 온도를 맞으며 땀 흘리는 표정의 내가 전부다. 그러다가 갑자기 맞은 시간의 홍수라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 모르겠더라. 그리하여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지를 찬찬히 궁리한다. 이 따순 봄 아래, 꽉 막힌 코 아래로 넘치려는 그것을 막으면서. 머릿속에는 '음… … 연애…? 아니 그런 거 말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 의미가… 있는 것…?' 이런 상념들이 춘곤증처럼 지나다녔다. 코로 산소가 투과되지 않을 때엔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이렇듯 혼자 하는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옥상에 홀로 앉아 있는 불쌍한 오라비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동생이 말을 건넸다. 서재를 만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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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의 상태를 확인했다. 몇 년이나 방치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방충망은 찢어져 있고 창문에는 이미 오래전 기화한 테이프의 찐득한 시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바 선생의 아사한 흔적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바닥에는 이게 먼지인지 슬러지인지 다 모를 것들이 잔뜩 있었다. 퇴근에 1초도 걸리지 않는 만큼, 나는 하루에 4시간을 번 셈. 우선 가구를 주문하고, 내친김에 빔프로젝터에도 손을 갖다 댔다. 주문부터 눌러 두곤 영상을 걸어둘 흰 벽을 찾아다니다간, 안 되겠다 싶어 스크린과 거치대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리곤 동생이랑 옥상청소를 시작했지. 물티슈를 2곽 정도는 쓴 것 같다.

 

그리고 빔프로젝터가 도착했다. 꼬박 하루만이다. 나도 물류 일을 하지만, 쿠땡은 정말 훌륭한 기업이다. 신나서 포장을 풀었지만, HDMI 선과 프로젝터 거치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기에 하루를 더 기다린다. 처음으로 사 본 빔프로젝터가 귀찮게 자리만 차지할 때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시겠는가? 옥상에 자리 펴고 구워먹으려 삼겹살도 미리 사뒀는데 말이다.

 

동생은 자기 일인마냥 신나서 쏘살거렸다. 몇 년간 방치된 방을 사람이 기거할 만큼 손보기 위해서는 그 녀석의 섬세함이 꼭 필요하다. 청소의 마무리를 맡겨두고 나는 옆에서 주문한 가구를 조립했다. 책상과 의자, 모퉁이 서랍과 책장 선반을 조립하는 데에 2시간은 쓴 것 같다. 휑한 느낌. 3평 남짓한 작은 방에 가구를 들인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구나. 그래서 책을 옮기고, 내가 지금까지 다녀왔던 공연장의 팜플렛들을 적당하게 배치했다. 그래도 아직 덜 채워진 것 같은 공간에 마지막으로, 불을 켰다. 낙조의 빛깔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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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는 바람이 분다. 열어둔 창으로는 밤바람이. 이런 심상한 시간대에 가만 앉아, 바람을 맞고 있자니 좀체 들지 않는 마음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작고 온유한 마음이고, 웬일 쏘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고만 하는 마음이다. 행복감일까. 잘은 모르겠다. 충만함이 비어 있는 이 감미로운 감각에는 어떤 옷이 걸맞은지, 나는 아직 언어를 다 모른다. 마음이 더일 수 없이 부풀어 오른 탓에, 첫날에는 아무런 글도 쓰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을 여기서 맞았다. 해가 들이치는 바람에 빔프로젝터는 달빛처럼 가려진다.

 

정체된 것 같던 생이 한 발자국 나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제 여기서 바라보는 동네의 적색 벽돌들과 십자가 위에 비친 것, 이웃집 벽의 그림자와 검은 칠로 도배된 나의 방에서 느낄 수 없던 그것, 햇살과 봄과 부푼 가슴과 어찌 되어도 좋다는 식의 희망과 등등 치기 어린 젊음의 것들이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온다. 늘 나의 삶은, 어쩌면 너무 진지했기에, 쉬이 품어볼 수가 없던 이런 감각들이 마음의 창을 넘나듦을 두고 본다. 넘나든다.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쉬이 들어온 만큼 쉬이 빠져나갈 것들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들과의 이별에 서툴러, 가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답지 않은 몸짓으로 부여잡으려고만 했다. 이별이 어려웠기에, 반복된 습관은 새로운 만남을 어려워하기까지 하였다. 굳어가는 몸, 만남에는 아마 이별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두고 본다는 것은 내게, 생각보다 새로운 일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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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회사 사이에 놓여 있는 물리적 공간들, 편도 2시간의 거리는 생각보다 삶의 많은 것을 앗아간다. 그건 뭐랄까, 퇴근 후 친구들과 만나 기울이는 술 한 잔과 한강 변을 따라 자전거 타는 일과 새로운 만남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 모든 길과 기타 여가생활 등이다. 칼퇴를 하고 동네에 도착하면 저녁 8시, 저녁을 먹으면 벌써 하루를 마무리해야 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다이어트를 위해 석식마저 포기하고 운동을 한 다음, 씻고 누워 자는 것으로 일상은 퍽 정체되어 있거나 정제되어 있었다.

 

서재가 생긴다는 것. 그것은 꽤 큰일이다. 이제 내게 시간은 더욱 한정적인 것이 되었다. 퇴근 후 귀로의 먼 길 덕에 줄어들었던 나의 시간들은 이제, 더욱더 귀한 것이 되어 있었다. 운동을 하는 것도, 친구를 만나는 것도 다 좋지만, 그래서 바쁜 근래에는 더더욱, 나는 집에 오고 싶어진다. 저번 주도, 이번 주도, 아마 다음 주까지도 이 공간을 충분히 맛보긴 어려울 테다. 언젠가는, 늘어지게 잔 다음 느지막 일어나, 한 끼 식사와 보고 싶은 책 한 권과 빈 백지와 햇볕을 준비해 두곤 그 앞에서 늘어지게 늑장을 부려 보고프다. 시간을 한정 없이 흘려보내고 싶다. 너무도 하고 싶은 것들을 앞에 두고 느껴보는 풍만한 시간의 감촉, 한껏 바람을 머금은 커튼에 얼굴을 부비고 싶어지듯. 나는 즉, 이 모든 시간들을 더욱 귀히 여겨 가까이서 느끼게 된다. 너무도 사랑하는 것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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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흐릿해진 감각의 파편, 너무도 사랑하는 것을 처음 만난 그때 그 마음 같은. 그래서 내 시간은 더욱 귀해졌다. 내게 언제든 돌아갈 품은 없지만, 언제나 돌아가고픈 공간 하나가 마련된다. 거기엔 봄바람도 시원스레 들락거리고, 밤새 지지 않는 낙조 하나 드리웠으며, 흰 빈 바람벽 위에는 지금 동경하는 모든 것들이 날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지나다닌다. 이 모든 것들이 좁고 높고 가난한 여기 방 안을 가득 채워, 나는 감미로운 듯 벅차오르지도 않고 다만 나른히, 내일 출근이 어찌 되어도 좋다는 듯이 밤을 까먹는다. 나는 이것에 쉽사리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어렵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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