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예능]

임인년의 첫날, 고전소설을 통해 띄우는 작별 인사
글 입력 2022.01.0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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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였다. 클리셰처럼 굳어진 영ㆍ정조 시대가 소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이리도 환대받을 수 있는 것일까. 유구한 역사가 주는 장엄함이 작품성을 더하고 사실에서 기인한 비극은 충만한 개연성을 선사한다. 난세의 현대인들이 정조와 같은 개혁 군주를 고대하고 있는지도. “북풍은 쌀쌀하게 불고 눈이 펄펄 내리네.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떠나리라.” 『시경(詩經)』을 읊조리는 동궁 이산(훗날 정조, 이준호 분)과 성덕임(훗날 의빈 성씨, 이세영 분)의 그림자에 미혹되어 모든 의문을 거둬낼 수 있었다.

 

균형을 지켰다. 원작과 드라마의 제목 <옷소매 붉은 끝동>을 일견 곱씹으면 여인의 전유물이었던 끝동의 특성상 여성이 작품의 중추임을 예상할 수 있다. 궁녀를 ‘홍수(紅袖, 붉은 옷소매)’라 칭한다는 점에서 주역의 지위도 유추할 수 있다. 남존여비의 조선 시대에서 어엿한 직무를 가진 궁녀란 주체적 여성상을 드리울 수 있는 장치이기에 자칫 왕조의 틀을 거스른 채 여성 중심의 서사만이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했으나 표제에 서린 왕권의 그늘을 유념해야 했다. 붉은 옷소매는 왕의 여인임을 뜻하므로 궁녀의 양가적인 역할을 적절히 풀어낸, 가히 수식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길을 잃지 않았다. 전일이 후일을 견인했기에 가능했다. 제조상궁 조씨(박지영 분)는 생각시 덕임(이설아 분)을 영빈 이씨(남기애 분)의 빈소에 조문을 보냈다. 무더운 여름밤 덕임은 행로를 헤매다 배동 아이의 복장을 한 세손 이산(이주원 분)을 조우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시작한 구중궁궐에서의 삶은 아니었으나 덕임은 비빈이 아닌 유능한 궁관을 꿈꾸는 자의를 소신껏 밝힌다. 그들은 혹자의 계책으로 선견치 못한 국면에 놓이기도 하지만 무거운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세손과 그의 곁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덕임은 동궁전을 비춘다. 밤길이 붇는다는데 어른거리는 등불에 의지하여 걸어가듯 필자는 매회의 실마리를 길잡이 삼아 여정을 떠났다. 썩 명쾌한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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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했다. 어렵게 도착한 빈소에서 덕임은 영조(이덕화 분)로부터 영빈의 저작 『여범(女範)』을 하사받는다. 그는 덕임의 운명도 영빈과 닮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옛일을 회고한다. 이후 제조상궁은 덕임을 동궁의 후궁으로 앉히려 했는데 이를 거부하자 궁녀들의 처소를 감찰하고 하사품을 간직하고 있던 그녀는 왕실의 재물을 훔친 죄목으로 영조를 다시 알현한다. 과거는 어제의 오늘이었고 그 오늘의 내일인 현재가 될 수 있음을 명증했다. 훗날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를 떠나보내는 정조의 뒷모습도 영빈과 사도세자(도상우 분)를 잃은 영조의 것과 퍽 닮았으리라. 세월의 통감을 소상히 그러나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순간은 가히 역사물의 백미이다.

 

끝내 서책이었다. 인연을 잇고 목숨을 살리며 마음을 얻은 시간의 매개는 다름 아닌 책이었다. 헤어진 오라비를 찾으려 생각시 덕임은 동기들에게 책을 읽어준 대가로 돈을 받아 모으고 있었다. 이를 제조상궁에게 들킨 그녀의 영특한 대처는 상궁으로 하여금 덕임을 동궁전 나인으로 적합하다 판단케 했다. 요직에 앉을 홍덕로(강훈 분)와의 관계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영조가 자신의 천출을 의식하여 금기시 한 『사기(史記)』 「노중련전(魯仲連傳)」의 한 대목 ‘이모비야(爾母婢也, 너의 어미는 계집종이다)’를 세손이 읽어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자 책장을 찢어 수렁에서 그를 구해준 덕임과 자신이 그리하였다고 거짓을 고해 총애를 얻고자 한 어린 홍덕로(최정후 분)는 정조로부터 상반된 말로를 맞이할 것을 암시한다.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었다. 세손의 목욕 시중을 들다 탕에 빠져버린 덕임과 그녀를 부축한 그의 미묘한 감정이 너울거렸다. 사라진 나인 경희(하율리 분)의 향낭을 연못에서 발견하고 곧장 물가로 뛰어든 덕임과 이를 보고 나무라는 세손의 곡해는 격랑이었다. 물살을 감각할 수 있었으나 갖은 시선과 위험의 터전에서 진정 사람의 마음을 예단하기란 요원했다. 따라서 읽고자 한다. 일렁이는 인물들의 심정을 극 중에서 언급된 실제 문헌을 통해서 말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의 흐름을 타고, 책을 읽어드리겠나이다.

 
 
 

운영전


 

 

“사람들에게 알리면 안 돼. 알리면 모두 공포에 질린 채 한 곳으로 뛰어가겠지. 출입문은 저 작은 곳 하나인데 이 안에는 오백 명의 궁녀가 있어. 나 먼저 살겠다고 서로 짓밟고 나간다면 어찌 될까? 누가 죽거나 기절하면 한순간에 저 문이 막힐 수도 있어. 너희가 날 도와줘. 난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할 거야. 나 책을 읽을 거야.”

 

“지금부터 제가 운영전이라는 소설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운영이라는 궁녀의 이야기인데 이 궁녀는 결코 연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연모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연습을 하나 해야 합니다. 이 연습이 빨리 끝나야 제가 책을 읽어드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줄을 서서 문밖으로 나가는 연습입니다.”

 

- <옷소매 붉은 끝동> 3회 中 성덕임의 대사

 

 

『운영전(雲英傳)』은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고전소설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별궁 수성궁에서 자신의 호를 딴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집현전 학자들과 시 48수를 주고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궁녀와 선비의 염정을 창작한 이야기다. 이의 필사기가 여인의 순정을 주제로 한 세 소설 『삼방요로기(三芳要路記)』의 기록에서 대명천계(大明天啓) 21년(1641)에 전해 옴을 알 수 있다. 운영을 비롯한 열 명의 궁녀를 선발하여 경서와 시문을 가르친 대군의 처소에 김 진사가 방문하게 되고 운영과 김 진사는 서로를 사모하게 된다. 금지된 사랑을 한 그들은 자결하였고 폐허가 된 수성궁에서 잠이 든 선비 유영의 꿈속에 나타나 전말을 알린다.

 

“여기선,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설령 사소한 거라도 좋아. 선택이란 걸 하며 살고 싶어.” 호랑이가 사람들을 공격하자 기지를 발휘한 덕임과 타위로써 소동을 진압한 세손은 생살여탈권을 갖지 못한 이와 가진 자의 극명한 대비를 은유한다. 쉬이 대처할 수 없는 변수가 어김없이 도사리는 작금을 관통한다. 지금껏 권위란 변화에 능동적일 수 있는 아량을 베풀었으니 말이다. 궁녀의 삶만큼이나 세손의 자리도 쉽지 않다는 동궁의 말처럼 인축의 삶을 정하는 권세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사념하게 한다. 목화에서 뽑아낸 무명실이 장수를 의미하는 것에 견주어 익선관의 비단실 장식은 곤룡포를 입은 임금의 어두운 뒤안길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녀는 크게 세 개의 결말을 마주한다. 오래도록 궁에 남아 질곡을 거친 사도세자의 보모 박 상궁(차미경 분)과 동궁의 지밀상궁으로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서 상궁(장혜진 분),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며 음모를 꾸민 제조상궁 조씨, 영조의 승은을 받은 궁인 출신의 영빈 이씨와 숙의 문씨(고하 분)로 구분된다. 때문에 덕임의 행동은 유의미하다. 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함과 동시에 목숨을 걸 만큼의 열정을 표출하는 그녀는 시간이 지나 누군가와 같은 결말로 기억될지언정 매 순간 충실했다. 인생을 결정짓는 운을 운운하는 청춘들이 바스러지게 될지언정 일순간이라도 모험에 자신을 내던지길 희망해본다. 혹시 아나. 몇 없는 선택지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게 될지도.

   

운영은 비로소 죽음 이후에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연대의 고전소설 『영영전(英英傳)』 역시 성균진사 김생과 회산군의 시녀 영영의 허락지 못할 사랑에 죽음이 수반될 수밖에 없음을 그렸으나 그들은 행복한 결말로 맺어진다. 주종 관계의 질서를 표징하는 회산군의 죽음이 그들의 해로를 살린 셈이다. 당시 사회는 굳건했던 성리학이 실학사상의 대두로 흔들리는 17세기의 과도기라는 점에서 작품 속 신분제의 양면성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궁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한 해에 서너 번씩은 일어나는 흔한 일이지요.”라는 덕로와 “난 언젠가 이 나라의 모든 노비들을 해방할 것이야. 조선의 임금으로서 이루고 싶은 가장 중요한 목표야.”라는 정조의 대사는 다른 장면에서 같은 문맥이 짚어짐을 일깨운다.

 

 

 

동국문헌비고


 

 

“그러고 보니 너에게 사줄 것이 있는데.”

“동국문헌비고 좋은 책이지.”

“아니 이 책이 여기 있었구나.”

“혹시 이 책을 아느냐?”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이지. 너도 읽거라.”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읽고 모르는 문장을 필사하여 들고 오너라. 뜻을 가르쳐 주마.”

 

(중략)

 

“벌이라니. 이리 귀한 책들을 하사하고 어려운 내용은 내가 친히 가르쳐주겠다는데 그게 왜 벌이냐.”

“네가 늘 그 쓸모없는 패관소설이나 읽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내 특별히 하사하는 것이다.”

 

- <옷소매 붉은 끝동> 5회 中 세손 이산의 대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완성된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및 정리한 책이다. 상고시대부터의 계통을 망라한 해당 전서는 활자본으로 인쇄되어 민간에서도 상당히 유행했으며 정조와 고종 대에 증보되었다. 실제 정조는 기본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 국왕의 행적이 담긴 『국조보감(國朝寶鑑)』과 군사훈련 교범인 『병학통(兵學通)』 등을 초계문신으로 등용된 정약용에게 하사하였다. 특히 『팔자백선(八子百選)』도 하사품의 하나였는데 이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일환으로 패관잡기나 소품문(小品文)을 엄격히 금지하고 모범이 되는 문장을 가려 간행한 책이다. 세손 이산이 덕임에게 패관소설 대신 동국문헌비고를 건넨 건 한낱 궁녀로 하대하지 않고 정치적 동반자의 역량을 갖췄음을 인정한 셈이다.

 

동덕회의 소집일이었다. 세손 이산과 그의 즉위를 돕는 이들의 결사는 궁 밖 기방에서 이뤄졌고 덕임은 혜빈 홍씨(강말금 분)에게 세손을 미행하여 행적을 보고하라는 명을 받는다. 동궁의 호위무사이자 익위사의 수장인 강태호(오대환 분), 세손이 왕위에 오른 뒤 도승지가 될 겸사서 홍덕로, 소론 출신의 대신이자 영조 말년 세손의 대리청정에 주력을 가한 서계중(문정대 분), 세손의 누이와 혼인한 부마 김두성(김강민 분)과 정재화(배제기 분) 등 앞에 세손은 덕임을 앉힌다. 그리고 어머니 혜빈에게 덕임을 사사로이 부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덕임이 동궁의 사람임을 암묵적으로 공표한 그와 은애와 은혜 사이 복잡한 심사의 그녀는 충심을 다짐한다. 반드시 그를 지켜내겠노라고.

 

“나는 동궁의 궁녀야. 세손 저하는 나의 주인이야.” 웃전을 섬기며 군주를 사모하는 태도는 궁녀의 덕목이었다. 그중에서도 덕임은 짐짓 필자가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별한 충직을 보였다. 어쩌면 생득적이었겠다. 덕임의 아버지 성윤우가 혜빈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의 청지기였고 후에 무관의 반열에 올랐다. 가세가 기울자 혜빈은 덕임을 친히 길렀고 영조 49년 덕임은 궁녀로서 세손의 누이인 청연군주(김이온 분), 청선군주(조승희 분) 그리고 궁인 영희(이은샘 분), 경희, 복연(이민지 분)과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을 한글로 필사했다. 선대부터 비롯된 연고는 극 중에서 덕임이 세손을 여러 번 살리는 포석이 된다. 덕임의 필체를 칭찬한 영조는 그녀에게 소원을 묻는다. 동궁을 용서해달라며 영조의 심기를 건드린 덕임은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경위를 그에게 들려주며 감응하게 한다. 식구였기에 절로 행해진 일인 것이다.

   

도깨비보다 무섭다고 설정된 원작에서의 이산은 드라마를 통해 서늘하지만 애처로운 눈빛으로 시각화된다. 임오화변을 거쳐 뙤약볕의 칠 월에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른 세손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붕당 정치는 국정의 혼란을 야기하고 왕위의 정통성을 위협했으므로 탕평을 주창한 영조는 동궁을 총애했고 이에 부응하려는 세손 이산은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금등지사로 토막 난 권세의 시간들을 메울 뿐이었다. 겹겹이 쌓인 서책은 자신과 조선을 지키는 화살이 되었다. 이러한 세손의 행동을 극 중 영조는 자신의 열등과 강박을 잣대로 해석한다. 기방에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사도세자를 닮아간다며 세손의 뺨을 때리기도, 궁을 위협한 호랑이를 금군이 아닌 세손의 익위사들로 제압했다는 이유로 능멸을 의심하며 분노한다. 덕임과 함께 하는 순간에서야 순수하게 미소를 보이는 동궁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계월전과 이형경전


 

 

“평국이 전쟁을 다녀온 후로 중병에 걸려 밤낮으로 약을 쓴다 아뢰니 천자께서 급히 명의를 보내셨더라. 의원이 진맥하고 돌아와 가로되 병세는 그리 위중하지 않으나 수상한 일이 있더이다. 이에 천자께서 물으시니 의원이 망설이며 아뢰기를 평국의 맥을 짚어보니 사내의 맥이 아니더이다.”

 

“궁녀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중 하나가 네 동무라지. 사람을 찾는데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리는구나. 주상께선 대체 무얼 하실까. 설마 하찮은 궁녀들의 일로 치부하여 관심이 없으신 걸까. 나라면 그리 느긋하게 보고만 있지 않을 텐데. 너는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니?”

 

- <옷소매 붉은 끝동> 14회 中 성덕임과 중전 김씨(장희진 분)의 대사

 

“저하, 어인 일로 친림하셨나이까.”

“어. 사냥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군. 앉게.”

“그자는 여전히 저잣거리에 자주 나타나며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군다 들었사옵니다.”

“홍덕로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곧 새로운 후궁을 들이실 터이니 홍덕로, 그자도 헛된 야망을 버리겠지요.”

 

“자가, 구하시던 책을 찾았사옵니다. 이형경전이 맞사온지요?”

“어. 용케 찾았네?”

“내용이 홍계월전과 비슷하던데요? 여인이 남장을 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모험을 하는데……”

 

- <옷소매 붉은 끝동> 15회 中 정조와 부마들, 성덕임과 청연군주의 대사

 

 

작자와 연대 미상인 『홍계월전(洪桂月傳)』과 『이형경전(李馨慶傳)』은 극 후반부 덕임과 정조의 서사를 미리 알려주는 예고 격이다. 홍계월이 무남독녀의 몸으로 어버이와 헤어진 채 물에 던져졌으나 여공(呂公)의 구조로 살아나 그녀의 아들 여보국과 수학한 뒤 장원급제하여 대원수로 거듭나는 내용은 혜빈의 비호 아래 무탈히 성장하고 나인이 된 덕임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계월이 어버이를 다시 만난 것처럼 덕임도 오라버니 성식(양병열 분)과 해후했다. 반란군의 공격 속에서 계월이 보국을 구출하여 과거의 갈등을 해소한다는 이야기는 오해로 앙금이 남은 정조와 덕임의 관계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형경전(李馨慶傳)』에서 재주와 기상이 남다른 형경은 열 살에 부모님을 잃는다. 고통에서도 형경은 남장을 한 채 학업을 수행하다가 자신과 비슷한 장연과 교우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세손 이산과 양친을 잃은 덕임이 신분의 고하를 차치하고 자연스럽게 친교를 가질 법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장연이 늘 형경과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하니 형경은 불편해하며 삼십 이후에야 혼인하겠노라고 대응한다. 이후 천자의 계책으로 장연과 형경이 성혼하나 그녀는 동침을 거부한다. 이에는 의빈 성씨가 나인 시절 몇 차례 승은을 거절한 일화가 투영된다. 한편 장연의 첩 위영이 형경에게 무례하게 굴자 형경이 곤장 삼십 대로 다스렸으나 위영은 시어머니에게 형경을 모함하고 본가로 돌아가게 한 내용은 극 중 덕임을 거칠게 대하는 화빈 윤씨(이서 분)의 복심을 연상케 한다.

 

명맥이 경각 간에 위태로워야 본심이 드러난다. 광한궁의 발을 감아올리기 전까지 흑막의 원사를 펼쳐 보일 수 있었으랴. 오직 드라마에만 등장하는 궁녀들의 사조직 광한궁은 제조상궁 조씨를 중심으로 궁녀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왕좌를 잠식하고 있었다. 영조를 대신하여 능행을 떠난 세손은 행궁에서 광한궁의 소행으로 변고에 봉착했고 이를 감지한 덕임은 전쟁에 사용될 신호연을 띄워 세손에게 알린다. 계월이 보국을 살린 것처럼 난관에서 그녀는 또 한 번 세손을 구한 것이다. 모든 것이 발각되자 제조상궁은 자신 대신 영빈을 택한 영조에 대한 원망과 영빈에 대한 미움을 토로했다. 일찍이 제조상궁은 덕임을 동궁의 후궁으로 점찍어 자신의 눈과 귀로 이용하려 했으나 덕임으로부터 응낙받지 못했다. 그녀는 예견했을 것이다.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더 높은 지위로 승격되는 만큼 신변의 위험도 커지리라고. 이형경처럼 줄곧 승은을 거절한 연유는 정조를 몹시 사랑하여 그저 오래 곁에 머물고자 한 의빈의 진심이었으리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구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영조의 말이 들어맞았다. 사냥 중 비를 피해 청연군주의 사가로 들어선 정조와 덕임은 1년 만에 재회한다. 이로써 공간은 궁궐과 달리 정조를 호위하는 이들로만 채워진다. 제조상궁 조씨와 결탁해 세손을 내몰고자 했던 홍정여(조희봉 분)는 혜빈의 작은 아버지이자 동궁의 외종조부이다. 세손의 고모인 화완옹주(서효림 분)와 그녀의 아들 정백익(권현빈 분)도 이들에게 합세했으므로 정조는 옥좌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그와 오래도록 동고동락한 홍덕로가 원빈으로 봉해진 자신의 누이 홍단(박서경 분)이 급사하자 패악을 부린 것에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정순왕후의 말처럼 정조는 즉위 이후 생존에 급급했다. 진실이 약점이 될까 더욱 가리기로 했다.

   

덕임도 같았다. 마냥 천진했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동궁의 지밀나인이자 제조상궁 조씨의 육촌 조카로 악행을 저지른 강월혜(지은 분)는 덕임의 어릴 적 이웃이었고 궁에서도 그녀에게만큼은 친밀히 대했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인물이 몇 없다. 동궁 내관(윤효식 분)의 발걸음이 적요하게 보인다. 산다기보단 살아남는다고 해야 어폐가 아닐는지. 남은 회차 동안 홍문관 부교리 심휘원(김병춘 분)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실제 정조와 정적이었던 노론의 벽파인 그가 비밀 어찰을 주고받을 만큼 다량의 국정 논의를 이어왔음과 동시에 독살설의 주범으로도 꼽히기 때문이다. 역병이 돈 지 어언 삼 년째이다. 현세에서 타인의 진실에 경청하는 일은 입과 코를 버젓이 드러내는 일이 도래하는 때보다 까마득할 것이다. 적자생존은 참이므로.

 



 

“사소한 소망이 꽤 있었사옵니다. 나 하나만 최우선으로 여기는 지아비를 만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어미라는 말을 가르치고, 거리낌 없이 아이 이름을 부르고, 외숙부들로부터 말 타는 법도 배우게 하고……. 하지만 전하 곁에서는 하나도 이룰 수 없었나이다.”

 

울긋불긋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임금이신 게 좋다고 하셨으니 그저 좋은 임금으로 사소서. 신첩은 평범한 계집으로 살겠나이다. 진실로 신첩을 아끼신다면, 다음 생에선 알아보시더라도 모른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소서.”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낫다더니…….”

 

『옷소매 붉은 끝동(강미강, 2017)』 2권, 청어람, 403-404면.

 

 

옷깃이 스치면 으레 서로의 옷소매도 닿을 것이다. 소매의 홍실은 연의 타래가 되리라.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시절 궁녀였던 영빈의 붉은 끝동을 보고 가슴 아파했으나 천명을 받아 보위에 올랐고 그녀의 소생 사도세자를 얻었다고 그려진다. 일시 스친 옷깃이라도 후에 손을 맞잡을 수 있음을 인력으로 어찌 알겠는가. 꽤 오랜만이었다. 대강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고 오로지 화면에 의탁한 일은 세필로 수놓아진 인물들의 감정선 덕택이었다. 뇌리를 스쳤던 비애의 자취를 다시 채록해본다. 산수화를 좇은 문인처럼 정조와 의빈의 실경을 품에 간직하고 싶다.


문후를 드린다. 예년만큼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는 세밑과 세초였다. 고로 임인년의 첫날 <옷소매 붉은 끝동>의 마지막 회를 시청하며 가족들과 둘러앉아 옛일을 회고하는 일도 의미 있을 것이다. 세찬 비와 눈보라에 가끔 관절이나 근육이 아픈 것처럼 다가올 사철마다 이따금 그리워할 것이다. 작품을 보며 인물들과 호흡했던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음에 더욱이 그렇다. 붉게 지는 석양이 산을 뒤로하고 종적을 감추는 동안 숨을 길게 내쉬어 본다. 잘 버텨왔노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상서로운 한해의 일성록을 시작한다.

 

 

 

윤하정.jpg

 

 

[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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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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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nny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드라마에 간간히 나오는 고전소설이 드라마와 연결고리가 된다고 짐작되서 검색해 보다 님글을 만났습니다. 언급된 고저소설도 같이 감상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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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 fanny글쓴이입니다. fanny 님께서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높이 평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 문화와 옛 문헌들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기원해봅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풍부한 문화를 향유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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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은
    •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정조와 덕임의 역사 또한 궁금했었는데 덕임이 그만큼 후세에 이름이 남겨질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많네요.
      이렇게 또 새롭게 역사의 한 단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기회가 되면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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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다
    • 지은글쓴이입니다. 지은 님께서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사를 조명하는 여러 방법이 있는 가운데 문화 콘텐츠의 파급력이 매우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글을 쓰면서 잊고 있던 대한민국의 시간들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풍부한 문화를 향유하는 한 해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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