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능력이 없는 당신도 히어로가 될 수 있는 세계관 [드라마/예능]

미국 ABC 방영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드라마 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
글 입력 2021.12.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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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가장 열심히 본 영화는 <해리포터>와 <트와일라잇>이다. 상상 속 세계관에 푹 빠진 나는 그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 두 작품을 거의 분석하며 반복 시청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상상을 했다. 이따금 공부가 하기 싫을 때면 난 어차피 호그와트에서 곧 수재가 될 거라서 괜찮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성인이 되어 공상을 멈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호그와트 졸업반 학생의 나이는 만 18세이기 때문이다. 입학 대기 명단에 있었다면 여태 편지를 안 보내주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 호그와트는 영국인과 아일랜드인만 입학시키는 학교임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한국 태생인 나는 호그와트 속 ‘초 챙’이 될 수도 없었다. 한평생을 호그와트의 부엉이 편지만 기다리며 살았는데, 애초에 그 부엉이는 유럽 땅을 벗어나지 않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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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포스터

 

 

해리포터에 잔잔한 서운함을 느낄 즈음 새로운 세계관을 만났다. 마블의 <인피니티 워>가 개봉하던 해였다. 소싯적 해리포터에 과몰입을 좀 해본 솜씨로 빠르게 마블 세계관에도 빠져들었다.


한동안은 마블 시리즈의 화려한 그래픽과 다양한 캐릭터 설정에 홀려있었다. 그러나 <엔드 게임>으로 마블 시리즈의 페이즈 3까지 끝난 후 금방 흥미가 뚝 떨어졌다.


마블 세계관의 양분화는 극심하다. 소수의 히어로가 등장하고, 나머지는 전부 구원을 바라고 두려움에 떠는 소시민들이다. 그러나 나는 몸에 붙는 우스운 슈트를 입은 히어로가 되고 싶지도, 소리 지르며 도망가는 시민 1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두 선택지 모두 매력적이지 않은 가운데 더 이상 마블 세계관 속 나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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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스틸컷

 

 

게다가 마블은 동양인 여성인 내게 히어로가 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게 상상일지라도 말이다. <어벤져스>의 초기 멤버는 전부 백인이다. 그중 여성 멤버는 블랙위도우 단 한 명이다. 또한, 2008년 개봉한 <아이언맨> 이후 2021년이 되어서야 첫 번째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가 개봉했다. 마블 영화 제작진이 그려오던 큰 그림 안에 내 상상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아쉬운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마블 세계관 자체는 여전히 흥미롭다. 포털을 통해 우주에 다녀오고, 시간을 오가며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재미있다. 같은 세계관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보고 싶었던 때에 <에이전트 오브 쉴드>를 보게 되었다.

 

 

 

Not all heros are super.

- <에이전트 오브 쉴드>의 표어


 

[크기변환][포맷변환]에오쉴 포스터 2.jpg
<에이전트 오브 쉴드> 시즌 6 포스터

 

 

<에이전트 오브 쉴드>(이하 에오쉴)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가끔 영화 시리즈에 등장했던 쉴드 요원이자 닉 퓨리의 든든한 동료인 ‘필 콜슨’이 주역이다. 영화를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필 콜슨은 <어벤져스>에서 로키의 묠니르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에오쉴>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에오쉴>은 처음부터 아주 뻔뻔하게 필 콜슨을 환생시키며 시작한다.

 

비밀스러운 환생 과정을 겪은 필 콜슨은 이전과 조금 다른 행동거지를 보인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직접 6인의 팀을 꾸린다. 각종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필 콜슨이 어떻게 환생했는지가 드러나는데, 이 부분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지금부터 은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닉 퓨리는 필 콜슨을 어벤져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로 여겨 그를 되살려낸다. 간절했던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필 콜슨의 신체 일부는 환생을 위해 개조되었다. 그의 몸에는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닌 부분이 몇 있다. <에오쉴>을 보며 필 콜슨의 연이은 신체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태도나 생각 변화에 주목해 보는 걸 추천한다.

 

 

 

Question. Why does it matter if the original May is dead or alive?

- 에이다, 시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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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오브 쉴드> 시즌 6 스틸컷

 

 

<에오쉴>은 아주 커다란, 존재론적인 개념에 도전한다. 이 드라마 시리즈가 던지는 질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기인한 ‘테세우스의 배’ 역설과도 비슷하다.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하던 후손들은 배 일부가 낡을 때마다 판자를 새것으로 바꾼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흘러 배의 모든 조각이 대체된다면, 그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필 콜슨은 시즌 중반부에 한 전투로 팔을 잃는다. 피츠와 시몬즈가 곧 기계로 새 팔을 만들어주지만, 그는 그것을 영 어색하게 느낀다. 시즌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그의 몸에서 기계로 대체된 건 팔뿐만이 아니게 된다. 필 콜슨은 태초의 몸을 잃고, 곧 자신의 기억 일부도 조작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당연히 큰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이런 상황도 있다. 에이다와 피츠는 인간의 뇌를 데이터로 변환하는 기술을 알아낸다. 해당 기술을 바탕으로 그들이 만든 복제 인간(LMD, Life Model Decoy)은 본체와 똑같은 뇌를 가지고 있다. 완벽하게 저장된 본체의 기억 데이터, 성격, 행동을 본체와 같은 껍데기를 만들어 기억을 주입한다.

 

소름 돋게도, 복제 인간은 자신이 복제본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당연히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여기고 살던 복제 인간은 진실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인다. 결국, 그는 본체의 가장 큰 특성에 따라 팀을 위해 희생한다. 슬프지만, 그것은 가짜 몸에 들어있는 백업된 기억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 행위를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본체가 죽고 복제 인간만 남는다면 어떨까. 상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주변인의 방어기제로 복제본을 본체처럼 대하게 되지 않을까?

 

 

 

Is this the future or the past? They look so similar.

- 젬마 시몬즈, 시즌 7



<에오쉴>의 세계관은 시즌이 이어질수록 거대해진다. 절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콜슨의 팀은 인휴먼(inhuman) 생체 실험에 휘말리고, 외계인의 본거지에 잠입한다. 시공간을 넘어 멸망한 지구를 마주하기도 하고, 새로운 타임라인을 만들어 동료를 구하기도 한다. 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멤버들을 보는 게 가장 흥미진진했다.


충격적인 팀 내부의 문제도 발생한다. 전적으로 신뢰했던 이가 하이드라(HYDRA)의 일원으로 밝혀지는 등 크게 뒤통수를 맞을만한 상황이 수차례 있다.


이만큼만 읽어도 알겠지만, <에오쉴>은 상당히 방대하고 긴 드라마 시리즈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청하기에는 시즌이 7개나 있는 데다가, 한 편당 분량도 50분가량이다. 모든 회차에 이야기를 가득 채워 넣어 정주행의 달인인 나도 후반부에는 숨이 가쁠 정도였다.

 

 

 

I’m choosing to stand up, to become a part of something bigger.

- 필 콜슨, 시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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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오브 쉴드> 시즌 1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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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바다> 스틸컷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에오쉴>을 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있다.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에오쉴>의 초기 멤버는 6명이며 3:3의 성비를 보인다. 짚고 지나갈 만큼 중요한 요소인가 싶겠지만, 진취적인 서사의 콘텐츠에서 이런 성비는 상당히 획기적이다. 최근 곧 공개될 넷플릭스 드라마 <고요의 바다> 스틸컷을 봤다. 11인의 단체 사진에 여성 우주비행사는 단 두 명이다.


우리는 콘텐츠를 볼 때 자연스레 자신과 가장 비슷한 모습의 캐릭터에 이입한다. 나는 <해리포터>의 당차고 똑똑한 헤르미온느가 되고 싶었다. 헤르미온느는 정말 멋진 캐릭터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마땅히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싶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한 캐릭터는 벨라트릭스였다.


여성 캐릭터의 수가 적으면 당연히 다채로운 성격을 보여줄 수 없다. 매체는 늘 뻔하게 여성을 해석하고, 그 결과는 그대로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주입된다.


하지만 <에오쉴>의 여성 캐릭터는 숫자도 많을뿐더러 모두 입체적이다. 메이는 방어적이지만 두려움이 없고, 학문에만 해박할 줄 알았던 시몬즈는 기개가 대단하다. 스카이는 전 시즌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출생과 자신의 능력에 얽힌 비밀, 사랑의 배신, 그리고 숱한 상실을 겪으며 매번 성장한다.


빌런 중에서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다. 레이나는 뛰어난 화술로 야망을 실현하며, 자잉은 잔인하지만 다정하다. 인간 여성의 외양을 했지만, 성별이 특정되지 않는 생명체들도 많이 등장했다. 인공지능 에이다와 크로니콤의 예언가가 그렇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는 많은 여성 배우에게는 도전의 기회를,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몰입할 만한 폭넓은 선택지를 준다.


<에오쉴>에는 성별 외에도 다양한 문화권에서 자란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한다. <에오쉴>은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방영된 ABC 드라마인데, 같은 시기 마블 영화 시리즈의 행보를 고려하면 <에오쉴>의 제작진이 사회 문제에 얼마나 깨어있는지 알 수 있다.


즉, <에오쉴> 세계관에는 동양인 여성인 내 자리가 충분했다. 이 드라마에서만큼은 약간의 상상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꿈꿀 수 있었다. 나는 그래서 장장 7개의 시즌 동안 지치지 않고 마음껏 상상하며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더 큰 세계관을 알고 싶어 <에오쉴>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에오쉴>의 내용이 마블 영화 시리즈와 엮이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시즌 1에서만 사소하게 언급이 될 뿐, 내용의 교차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블 영화 시리즈와 세계관 충돌을 없애기 위해 <에오쉴>도 시공간을 넘나들며 영화와 거리를 벌린다. 그래도 종종 마블 영화 시리즈의 캐릭터들도 얼굴을 비추니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오쉴>의 유일한 단점은 지루한 시즌 1이다. 마블 영화 시리즈와 교차점을 만들려던 의도 때문에 초반의 전개가 다소 소심하다. 그러나 뒷부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사실 나도 시즌 1에서 버티지 못하고 수차례 하차했기에,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즌 5의 예고를 남긴다. 스포일러는 거의 없는 예고편이며 뒷부분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적합하다. 이 영상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면 시즌 1을 무조건 버텨보는 걸 추천한다. 거대한 세계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당신도 <에오쉴>만의 분위기와 세계관에 빠져들어 나름대로 더 큰 상상을 해보면 좋겠다.

 

*현재 디즈니+에서 <에오쉴> 전 시리즈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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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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