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 여기서 길을 만들자 - 영화 '너에게 가는 길'

글 입력 2021.11.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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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의 부모'라는 존재


 

자식과 부모는 복잡한 관계다. 부모의 입장에서 나의 일부였던 것이 어느덧 내게서 떨어져 나와 내가 모르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신비롭고도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의 커밍아웃은 부모로서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까.

 

특히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이해도 부족한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대부분의 부모가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겠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일은 진짜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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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M 트랜스젠더 한결의 어머니 나비, 동성애자 예준의 어머니 비비안. 이 두 여성이 <너에게 가는 길>의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현재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성소수자 자녀와 그 부모가 스크린에 등장할 때 흔히 떠올리는 클리셰적인 갈등 대신 이 영화는 두 어머니가 자식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인 이후 자식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담는다.

 

나비-한결의 이야기는 나비가 한결과 함께 한결의 법적 성별정정신청을 준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예준-비비안의 이야기는 비비안이 예준의 애인을 소개받고 더 나아가 그 어머니를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다루지만 쓸데없이 비장해지지는 않는다. 심각한 표정으로 보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느 부모 자식 사이가 그러하듯이 이들은 사소한 일로 부딪히다가도 그다음 장면에서는 세상에 다시 없는 동지가 되기도 한다.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것은 독립적으로 뚝 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일상을 살아가는 성소수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존재이다.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와 '얼마나 다르냐'보다 '얼마나 비슷한가'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퀴어영화, 여성영화, 그리고 가족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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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길>은 부모 자식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나비와 비비안은 단순히 '이해심 많은 어머니'로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각자의 직장에서 일을 할 때는 20년이 훌쩍 넘는 경력을 지닌 여성 노동자이고,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활동하며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외칠 때에는 인권운동가이다.

 

처음 자식의 커밍아웃을 접했을 때는 '트랜스젠더'나 '게이'라는 말조차 어색했다는 이들은 이제 각종 기자회견과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 기꺼이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새로운 세계로 기꺼이 나아가며 용기를 내고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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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영화가 필연적으로 그러하듯이, <너에게 가는 길> 역시 이른바 '정상 가족'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한결이 법적 성별정정신청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18개가 넘는 서류 중에 부모동의서가 포함되어 있는 건 블랙코미디 같다.

 

물론 2019년부터 해당 조항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혼가정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자랐기 때문에 담당판사가 딸이 아버지 역할을 하려 든다고 여길지도 모른다는 한결의 말은 헛소문이라며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담당 판사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는 아버지의 동의서를 받아야만 했던 한결의 이야기와 오랫동안 함께한 사이임에도 혼인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서로의 수술동의서도 써줄 수 없다는 동성커플의 이야기는 서로 교차되며 이 사회가 공인하는 가족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너에게 가는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예준이 비비안에게 자신의 동성 연인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모습이나 한결과 나비가 한결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영화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건 언제나 이들이 사회와 맞닿는 순간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바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소수자에게 너무나 폭력적이고 안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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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의 모습이다. 갖가지 모욕적인 피켓을 들고 있던 한 혐오자는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걸 인지하자마자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반대한다'를 빠르게 반복해서 외친다. 고장난 태엽인형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퀴어문화축제 쪽 참가자들 중 많은 이들이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모자이크 처리가 된 채 영화에 등장했다.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과 얼굴이 나올까 봐 늘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모습은 이 사회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무언가에 대한 혐오는 많은 경우 그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려움은 혐오로 이어진다. '반대한다'를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반대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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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쉽고 이해와 포용은 어렵다. 혐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이해와 포용은 많은 시간과 품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낸 길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더 있을까. 영화를 보며 나비와 비비안의 행보에 마음이 벅차오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사회는 '너'에게 닿을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사회이다. '차별금지법'은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어줄 수 있는 법안이지만 아직 국회에서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이다. 영화 무대인사에서 나비 님은 이 영화가 차별금지법 제정의 시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힌 바 있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란다. 어떤 식으로든 '너'에게 가는 길이 더 많았으면 좋겠고 우리가 함께 그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길에 이 영화가 큰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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