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드 '길모어 걸스' [드라마/예능]

작은 마을의 평범하지 않은 일상과 사랑스러운 사람들
글 입력 2021.11.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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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방 창문은 꽤 큰 편이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도 창문이 아주 크다는 점이었다. 옥에 티가 있다면 우리 동은 아파트 단지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 밤엔 꼭 블라인드를 잘 내려주어야 한다는 점인데, 그러지 않으면 내가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유리로 만든 집처럼 훤히 보일 것이다.

 

해가 지고, 블라인드를 내릴 때,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 창문들이 아름다운 야경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꼭 벌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촘촘히 모여 살고 있을까? 가끔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꼭 붙어 몇백 세대가 살고 있지만, 엘리베이터가 아니라면 마주치고 인사라도 할 일은 거의 없다. 올해 이사를 하고, 어머니가 인사를 나누기 위해 과일을 한가득 들고 주변 이웃분들에게 찾아가셨을 때, 부담스러워서 받지 않겠다고 교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웃분도 계셨다. 살짝 충격이었지만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공짜는 없다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럴 수 있겠다고 머리로는 받아드렸다. 내심 뭐든 나누길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해받고 거절당한 것 같아 속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릴 땐, 나중에 살 집을 상상하면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작은 마을을 그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을 지도였다. 그 당시 친했던 유치원 친구들과 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고, 매주 파티가 열리는 마을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속 파티들처럼 화려하고 성대한 파티는 아니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티파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어릴 적 로망을 제대로 실현한 미드가 있다. 오늘은 그 드라마의 어떤 매력에 빠져버린 것인지 덕후의 마음으로 신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드라마 제목은 ‘Gilmore Girls (길모어걸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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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어 걸스> 시즌 1 포스터

 

 

2000년 워너브라더스에서 시즌 1을 시작으로 방영하였고, 2006년까지 시즌 7개로 종영했다. 한참 전 종영했지만, 다행히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덕에 모든 시즌을 다 감상할 수 있다. 작년 봄, 이 미드를 접하고 3일 만에 21개 에피소드의 시즌 1을 끝냈다. 시즌 7까지 모두 본 이후에는 영어 공부를 핑계로 영어 자막을 설정해 처음부터 다시 몰아봤다. 그 이후로는 돌아오는 계절에 맞게 에피소드를 골라 보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는 현재는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들을 몰아보고 있다.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5회 이상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빠른 대화 속도와 캐릭터들의 환상적인 티키타카, 그리고 필자에겐 생소한 미국 문화들에 대한 풍자와 세심하게 연출된 세트장들 덕에 매번 새로운 기분이다. 물론 '로리 길모어'역의 '알렉시스 블레델'이나 그녀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미모도 눈을 떼기 힘든 이유 중 하나이다. 집밥같이 속 편하고 아늑한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제대로 같이 살펴보자.

 

*

 

<길모어 걸스>는 소소한 일들이 왁자지껄하게 벌어지는 ‘스타즈 할로우(Stars Hallow) 마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두 모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이 모녀의 관계는, 대부분이 생각할 보통 모녀사이의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로렐라이 길모어’는, 엘리트 코스를 강요하던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16살에 미혼모가 되어 가출한다. 그리고 근교의 ‘스타즈 할로우’ 마을에 위치한 ‘인디펜던스 호텔 (The Independence Inn)’에서 일하며 정착하고, 그 마을에서 딸 ‘로리 길모어’를 키운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엄마 ‘로렐라이 길모어’와 그녀의 어머니이자 로리의 할머니인 ‘에밀리 길모어’의 갈등으로 버무려진 애증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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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 길모어, 에밀리 길모어 그리고 로리 길모어까지 3대 길모어 걸스


 

시즌1은 해맑고 철없는 30대 초반의 엄마 ‘로렐라이 길모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온,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16살의 딸 ‘로리 길모어’로 시작된다. 그리고 천천히 엄마 로렐라이 길모어의 과거사나 그녀와 부모님과의 관계사, 그녀가 딸 ‘로리’와 함께 살아온 역사가 밝혀진다.


7개의 시즌까지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마무리에는 고등학생이었던 로리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렐라이는 꿈을 이룬다. 그렇다고 시즌 7이 꽉 닫힌 비현실적 해피엔딩은 아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두 모녀는 수많은 장애물을 넘고, 수많은 변수를 맞닥뜨린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고, 휴학하고는 방황하기도 한다. 졸업한 로리가 넘어야 할 취업의 관문 또한 그녀가 오래도록 바라왔던 모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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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어 걸스> 시즌 1 주요 등장인물 포스터

 

 

시즌 7까지 달려와서 뒤돌아보면 나이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끼리의 관계나 지금까지 성취해낸 것, 마을의 모습 등 수많은 것들이 제법 바뀌어있다. 필자는 마지막 시즌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로리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로렐라이 길모어’와 딸 ‘로리 길모어’ 이 둘의 관계성과 이를 둘러싼 수많은 등장인물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성장이 드라마의 첫 번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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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즈 할로우 마을과 그 중심에 위치한 시그니처 정자

 

 

이 드라마의 특별한 두 번째 매력은, 배경인 스타즈 할로우 마을 그 자체이다. 이 마을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든 인물은 모두 입체적이고 특색 있게 설정되어있다. 주연 못지않은 특색있는 캐릭터들이 시즌 7까지 50명 이상 등장하는데, 모두가 시즌이 지나감에 따라 드라마와 함께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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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EP10 눈사람 만들기 축제, S3 EP7 댄스 마라톤 행사

 

 

또, 매 시즌 계절의 변화가 에피소드의 중심이자 변화의 축이 된다. 한 시즌에 사계절이 모두 황홀하게 연출되고, 마을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물론, 계절마다 상상도 못할 전통적인 축제들이 열린다. 축제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끝내는 과정까지 전부 전개되고, 단순히 재미를 위해 진행되는 행사도 있고, 마을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진행되는 행사도 있다. 이런 비주얼적 연출 덕에 시각적으로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다. 이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주민들 간의 갈등과 화해도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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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축제인 S4 EP6 - '살아있는 그림 축제' 속 '로리 길모어'

 

 

이 마을에서는 주민 모두가 모여 주민 회의도 한다. 마을의 이장인 ‘테일러 두즈’가 회의를 진행하고, 거수로 안건을 결정한다. 작고 아늑한 마을인데다가 서로 매우 오랫동안 봐온 관계인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꼭 인형 놀이를 하던 유치원생 때 내가 그렸던 그 마을 같다. 심지어 마을의 길거리 싱어송라이터도 등장한다. 그가 부르는 상황에 꼭 알맞는 노래들과 그 멜로디가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시즌을 거듭하며 전개되는 모녀 각각의 설레는 사랑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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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5 EP7- 로리와 그녀의 대학 시절 연인 '로건 헌츠버거'. 비밀 클럽 '삶과 죽음의 연대'의 행사 장면

 

 

이 드라마는 200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어서 그런지 보다가 ‘이게 뭐지?’ 싶은 내용도 있다. 로리의 동네 친구이자 단짝인 한국계 미국인 ‘레인’의 한국인 어머니 'Mrs.Kim'은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잔뜩 묻어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매우 보수적이고 꽉 막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려졌다. 한국인, 기독교인, 의사 지망생이어야만 딸 '레인'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락 장르의 음악은 듣지도 못하게 한다. 로렐라이와 함께 일하는 호텔 프런트 담당 ‘미셸’의 캐릭터도 그렇다. 프랑스인이자 흑인 남성으로 등장하는 '미셸'의 언행은 모두 웃음 포인트로 연출되었다. 다양한 유명인들을 조롱하고 비꼬는 대사들도 상당수 등장해 수위 높은 농담들에 괜히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개그 코드가 너무 황당해서 ‘앗, 이런 말에 웃으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게 된다.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춘 어른이니 잘못된 발언이나 편견에 가득 찬 연출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시즌이 길어짐에 따라 형성되는 답답한 갈등의 전개 또한 아쉽지만, 스타즈 할로우 마을 그 자체와 정 많은 다양한 캐릭터들이 7개의 시즌을 어느새 완주하게 만든다.

 

지금은 막상 스타즈 할로우 마을에서 실제로 살 수 있다고 하면, 심각하게 고민할 것 같다. 내 모든 사랑 이야기와 실패담 등이 온 마을에 퍼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골치 아프다. 다행인 점은 직접 스타즈 할로우 마을에 살아보지 않더라도, 정 많고 유쾌한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며 다양한 축제와 사건들을 드라마를 보면서 경험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지만,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가 존재한다. 이해되지 않던 인물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필자는 이 긴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통해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유쾌하게 넘어갈 줄 알고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다. 드라마와 함께 성장하고 싶고 스타즈 할로우 마을의 구성원이 되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드라마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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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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