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응, 편집, 태도 -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시인 채호기가 감응해온,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
글 입력 2024.03.2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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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여전히 어렵지만, 보는 일에 계속 도전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예술의 심오한 사유나 형식이 어느 날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작동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회화는 평면이라는 단순한 형식이기에 그것의 종말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며 생존해왔다. 화가 이상남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회화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시절에 이상남은 그리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왜 회화를 선택했고, 무엇을 그렸으며, 그리하여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이루었을까?

 

평생을 바쳐온 회화 세계를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을 통해 꼼꼼히 엿볼 수 있었다. 시인 채호기가 1부 평론, 2부 대담으로 나누어 화가 이상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속에서 인상깊은 구절을 재조립하여 몇 가지 키워드 ‘감응, 편집, 태도’로 나누어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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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응



'감응', 어떤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 행위.

 

신체에 직접 작동하여 신체를 바꾸는 ‘표상 없는 사유’지만, 그에 비해 시와 회화는 표상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음악은 감응의 예술이다. 이상남의 회화는 ‘회화의 바깥에서 음악에 위치한다’. ‘음악에 빗대어 표상 없는 사유로서의 회화, 즉 감응의 회화’라고 명명된다.

 

이상남 역시 자신의 회화에 대해 ‘이미지를 츄잉(chewing)한다’고 표현했다. ‘츄잉해서, 그림과 수용자가 만나 새로운 신체가 생성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회화의 수용은 회화의 기능에 참여하는 것이고, 회화는 그림과 관객이 만나 맺는 관계에 대한 실험의 장소가 된다.

 

‘회화라는 정체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기존 회화의 활동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여행’을 떠난 회화는 음악을 건너 건축에 도착한다. 그림을 전시실에서 벗어나 건축물에 배치하는 것은 단순한 장소 이동을 넘어서 회화와 건축의 접속을 통한 새로운 생성, 즉 감응으로서의 회화의 실천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2. 편집


  

“예술에 있어서 근본적인 창조는 없다.”

 

화가로서의 ‘편집(Editing)’은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의 기본 토대를 이룬다. 자신만의 고유한 그림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해체’와 ‘조립’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조립의 방법이 ‘편집’이라고 저자는 정의내린다.

 

책 속에서 ‘편집’과 관련된 내용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상남은 ‘쿠킹’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는데, 이 역시 편집이라는 용어에 포함되는 범주이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분자가의 도형들을 어떻게 편집해서 보여줄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곧 쿠킹을 의미한다. ‘그의 편집은 깊은 감각을 만들어내는, 아니 따르는 리듬의 자유로운 표시이다’.

 

대담에서 그는 말한다.

 

“많은 정보를 이여붙여서 자기 얘기로 만든 것이죠. 처음부터 기승전결이 있는 게 아니라 뒤죽박죽이 되더라도 맥락 자체의 투명성이 있으면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편집, 에디팅의 세계, 이게 포스트모던의 정신이 아닐까요? (중략) 내가 당신을 통해서 드러난다면 당신의 능력과 사유의 깊이와 편집에 의해서 드러나는 거지, 결코 나의 자질에 의한 건 아니겠죠. 이게 편집의 세계죠. 당신과 나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죠. 뭐든지 쏟아내라, 그러면 내가 알아서 편집하겠다고.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편집의 힘을 이해하는 화가이다. 결국 모든 건 편집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관통하고 있다. 뉴욕에 머물던 시절 방향성을 고민하던 경험도 그는 편집의 계기로서 회상한다. “표현주의를 하려니 나 자신을 크게 배신하는 것 같고, 하던 것을 하려니 지금 이곳에서 먹히지도 않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한 절벽에 부닥친 거죠. 오직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밖에. 미술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두 가지를 다 봤으니까 내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죠. 편협하게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두 개를 다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거죠. 모든 걸 극단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편집하여 끊어 쓸 수 있는 힘이죠.

 

 

 

3. 태도


  

예술가의 태도나 삶의 방식에서 종종 많이 배운다. 이를테면 규칙적인 생활 같은 것.

 

“작품 생활은 평생 할 건데, 라고 생각한 후 쉰다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고 주말은 무조건 쉬려 합니다. 좀더 체계적이고 건강한, 패턴이 있는 삶이 중요하다고 느꼈거든요. 휴식도 작업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고 주말은 무조건 쉬려고 합니다. 작업과 운동이 하루 일과예요.”

 

이상남도 같은 말을 한다. 대개 예술가는 새벽에 영감이 떠오른다, 밤낮이 바뀌어 산다 같은 선입견이 많은데, 지속적인 창작을 하기 위해선 규칙적인 생활습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한다. 탁월함은 꾸준함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떠드는’ 힘에 대해서도 대담 내내 강조한다.

 

"지속적으로 떠들다보면 말이 안 되던 것도 말이 됩니다. 강제도 투쟁도 혁명도 아닙니다. ‘넌지시’, 이 말이 참 멋있는데, 넌지시 그 옆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또하나의 열린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중략) 그래서 삶과 예술을 얘기할 때 혁명이나 투쟁보다도 ‘넌지시’라는 말이 멋있더라고요."

 

그는 그만의 길을 간다. 시대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지정해놓고 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들이라고 말한다.

 

그를 작업하도록 부추기는 요소는 혼돈스러움, 아이러니의 세계, 절대 고독이다. 작업을 하면 모든 게 정리되고, 절대 고독은 그에게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바뀐다. 그의 창작적 예민함은 작업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작업실은 높은 천정과 빛이 중요합니다. 스튜디오에는 내 신경계의 거미줄이 무수히 겹쳐지고 있어요. 외부인이 스튜디오에 들어오면 그것들이 뚝뚝 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공포스럽습니다.”

 

그런 그에게 24시간은 작업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드로잉을 시에 비유해 표현한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엄청난 메모를 하고 그 안에서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시가 탄생하듯이, 그 역시 드로잉을 위해 수시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치고 그렇게 탄생한 이미지는 드로잉의 바탕 재료가 된다. 영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니, 24시간 내내 생활이 작품에 젖어 있다고 말하는 이상남. 그의 담담한 답변에서 예술과 업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하는 화가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에 대한 답변을 인용하고 싶다. 화가뿐만 아니라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문장들로 읽힌다.

 

 
“심각하지 말고 세계를 조롱하는 자. 가벼운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워서 가벼운 상태가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하다 보면… 말이 됩니다. 열 가지를 어느 정도 잘하는 자보다는 한 가지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끊임없이 나라는 사람을 버리는 것. 가벼워지는 것.”
 

 

[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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