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허공에 떠다니는 것을 지상으로 끌어 내리기 - 슬픔에 이름 붙이기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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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주 작은 존재, 그러니까 세상에 나기도 전부터 우리의 부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여 고심하는 작업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름 짓기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의 고유함에 가치를 더하는 작업이다. 또한 평생을 그 단어로 불릴 것이기에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사는 동안 많이 사랑 받고 즐거웠으면 하는 염원이 가득 담긴다. 그리하여 생겨난 그 ‘이름’은 그 누구도 가지지 않은 독자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각기 다른 소리를 가진 글자와 뜻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이름을 짓는 행위의 의미다.
생명체나 사물에 이름이 있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라서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고유명사는 그런 것이다. 고유한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 모두가 A라고 하면 A인줄 아는 것. 그렇게 모두에게 A로 각인되는 것. 좋든 싫든 A가 되어 A로 사는 것. 사실 어떠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은 인간이 만든 언어라는 소통 체계를 가지고, 인간이 어떠한 뜻을 담아 만든 단어를 선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여부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생성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이름을 붙이며 놀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인형에도 이름을 붙여 보고, 소중히 생각하는 물건에도 이름을 붙여 보고, 원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 불러보기도 했던 시절. 이름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던 어린 나이였지만, 이름이 가진 힘만큼은 온전히 느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생명의 유무가 아닌 존재의 인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름을 부르다 보면, 그것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 이름을 붙인 사물이 살아있다고 철썩 같이 믿으며 그것을 벗 삼아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애정을 가득 담아 부르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많은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연스레 ‘명명의 힘’을 체득하게 된다. 이름이 갖는 힘말이다. 누가 “이건 정말 중요해!”라고 알려준 적도 없는데. 그렇다면, 감정을 구체적으로 풀어내어 그것에 이름을 달아줄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일단 필자는 그런 시도를 해본 적이 없다. 알고 있는 선 안에서의 최대한을 표현하려고만 했던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배운 언어 안에서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건 아닐까.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식견을 넓히고, 책을 많이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많이 배울수록 더 풍부한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낀 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다 보면 종종 그런 순간이 찾아 든다. 내가 사는 세계를 지금의 언어 수준에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 그런 우리에게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책을 만났다. 세상에 없던 단어를 만드는 방식으로, 세계와 나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말하자면, 허공에 떠다니는 홀씨 같은 구체적인 순간과 감정에 이름을 더하여 표현 도구를 늘리는 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아래에서 살펴 보도록 하자.
감정 명료화로 언어의 팔레트를 확장하다 - 『슬픔에 이름 붙이기』
도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사전에 등재된 정식 단어나 유행어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사건이나 감정에 대해 새로이 이름을 붙여 그것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책이다. 어휘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세상에서 새롭게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소개하기에 신선하고, 언어의 무한한 확장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책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아무리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더 많이 배운다 하더라도, 평소 쓰는 말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 표현에 한계를 느끼는 것에 어휘의 축소도 한 몫 한다. 이전에는 어색함 없이 사용했으나, 현재는 대화 속에서 잘 들리지 않는 단어들이 그렇다. 유행어 또한 비슷한 매락에서 감정 표현에 한계를 짓는 요소 중 하나다. 한 가지 단어로 다양한 감정을 소위 말해 ‘퉁’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가 그랬다. 짜증난다는 말 대신, 다른 어휘를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습을 해보라고. 사실은 짜증났던 것이 아니라 서운했던 것일 수도 있고, 기대했다가 이내 실망을 경험해서 속상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짜증난다'는 단어로 그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작가는 사람들에게 섬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볼 필요성을 강조한다. 생각해 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한계 때문이 아닌,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 볼 시간이 부족해서 뭉뚱그려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아닐까 싶은 추측에 이르렀다. 효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몇 십 년간 감정은 늘 뒷전이었으니 말이다.
필자의 경험을 돌아봤을 때, 특히 슬픈 감정을 느낄 때 유독 언어를 축소하여 사용한 것이 떠올랐다. 슬픈 이유는 다양하고 복잡한데, 우울하다거나 아릿하다는 표현만을 주로 사용했다. 그 선택 뒤에는 스스로도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려 했던 유약한 내면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너무 아파서, 끝내 외면하겠다는 선택지를 택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느낀 감정을 대체할 단어가 없다는 생각도 종종했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과 사건을 담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슬픔을 등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보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그것의 존재를 부정한다 해도, 살면서 슬픔은 계속 우리를 찾아올 것이니까. 그리고 그 감정은 신기하게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색이 짙어진다. 기억 저 편으로 보내도, 언젠가 비슷한 순간을 마주했을 때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또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 뿐이다. 표현할 길이 없어도 꾸준히 감정을 살피며, 말이나 글로 자세히 풀어내어 상태를 인지하고 비슷한 감정을 겪는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공감을 건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행위가 아니였을까?
책은 저자의 한 프로젝트로부터 시작한다. 존 케닉이 책과 동일한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단어는 실재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무척이나 크고, 감정을 설명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겪는 것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공백을 메울 해법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상태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단어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공허함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책의 뒷편에는 <신조어학>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이 작업을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이 단어들은 진짜인가요, 아니면 만든 건가요?”라는 것이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인데, 진위여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왜 우리는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답을 찾으려고만 할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저자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보다 말하는 세상이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닿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재를 정의에 끼워 맞추는 것에 정신이 팔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표현한다.
감정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몰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이 이름을 붙여주는 것으로,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명료하고 선명히 만들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해당 의견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이니까. 슬픔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그건 중요치 않다는 소리다. 원래 단어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이지 않은가. 또한 그는 우리에게 단어를 우리의 의지대로 사용할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단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당신에게 상기시켜줌으로써, 길을 잃었을 때 온 길로 되돌아가게끔 하기에 충분하다고 일러준다.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작업은 개인적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말은 곧 새로이 만든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처럼 사용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건 실제로 저자가 경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독자로부터 “제가 평생 느껴온 무언가를 말로 표현해줘서 감사해요”라는 피드백을 들었다고 한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가 있다던 안나 카레리나 속 문장처럼 각자의 슬픔이 있겠지만, 슬픔 또한 보편적 감정이기에 그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경험하고 나눌 때 강한 연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것이 슬픔에 이름을 붙여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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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시작부터 꽤나 흥미로운 방식으로 독자를 집중시킨다. 우선 서문에서 슬픔의 어원에 대해 설명한다. 슬픔(sadness)은 '충만함'을 뜻했던 단어로, 라틴어 satis (충분한, 만족스러운)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 책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아는 슬픔은 절망, 즉 '희망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본래 진정한 슬픔은 '인생이 얼마나 찰나적이고 신비롭고 무제한적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활기 넘치는 솟구침'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되려 삶을 열심히 살게 된다는 말을 많이들 접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올 해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삶의 유한성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매순간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 슬픔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눈물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 기쁨의 땅에 도착했을 때 즐겁게 뛰어 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는 슬픔에 휩싸여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저자가 만든 단어들을 보며 혼돈스러운 머릿속과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여 감정의 쓰나미를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부유하는 것들을 지상으로 끌어 내리는 작업은 어렵다. 모호한 것을 명료화 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홀씨처럼 허공에 떠다니는 감정들을 잘 정리해서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는 일은 꽤나 흥미롭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 원래 있던 단어도 새롭게 조합하여 뜻을 추가하면 새로운 단어가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얘기를 차츰 꺼내어 보며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봄으로써 감정을 정돈해 보는 것이다. 감정을 이리저리 조립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선명히 하기. 이 책이 주는 또다른 즐거움이자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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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의 생각과 손을 통해 새로이 태어나는 작업. 그 작업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은 신선함과 즐거움을 함께 선물한다. 특히나 쓰는 사람에게 말이다. 현존하는 단어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좀 지겨울 참이었던 필자에게 이번 책이 더욱 재밌게 다가온 이유다.
각 단어에 달려 있는 설명들을 읽다 보면, 메모장에 있는 글들을 사전처럼 정렬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간 순간의 감정을 생생히 기록해 두었다가 직접 만든 이름을 붙인 듯 보인다. 저자가 겪은 어떠한 사건은 아주 긴 문장이지만, 그것을 함축하여 명명한 단어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대조해 보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알트슈메르츠 altschmerz
[명사] 늘 있었던 똑같은 문제,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괴롭하온 똑같이 지겨운 문제와 걱정거리로 인해 느끼는 피로함. 지겨운 고통 따윈 내던져버리고 마음속 뒷마당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좀 더 새로운 고통을 파내고 싶게 만든다.
어원 : 독일어 alt (오래된) + Schmerz (고통)
필자가 알트슈메르츠를 느끼는 지점은 바로 “미루기”이다. 특히 글 관련해서 마감기한 직전까지 미루고 미루는 아주 오래된, 나쁜 습관이 있다. 이런 스스로가 지겹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번 제자리다. 나아질 기미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이 습관은 자기혐오로 이어지기에, 굉장한 문제다. 지금 바뀌지 않으면, 평생 이렇게 살 거라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힐 정도다. 이걸 내던지고 다른 고통을 겪는 편이 낫겠다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참 많다. 차라리 계획 강박이 있어서 마감기한보다 훨씬 이전에 일처리를 끝내야만 하는 버릇 같은 것말이다. 이러한 문제를 겪는 사람도 나름의 고통이 있겠지만.
접점의 순간 MOMENT OF TENGENCY
당신과 나는 예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우리의 행로는 온라인이나 길거리에서 한두 번 교차했을 수도 있다. (...) 당신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바로 당신만을 위해 일어났어야 했는지 당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운명이 얼마나 쉽게 당신의 방향을 틀어서 영혼의 동반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어느 낯선 사람을 만나게 할 수도 있었을지 당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늘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당신이 만난 바로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많은 장애물이 끼어들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기적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모든 게 그저 우연의 일치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우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자주 맞는 직업이다 보니, 우연의 신비함과 인연의 소중함에 감사함을 더 크게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그래서 접점의 순간이, 이 작은 확률로 이어진 우리들의 시간이 사랑으로만 가득 찼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현실에서 그럴 경우는 적겠지만.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어제는 생판 남이었던 사람이 말 한마디로 연인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사. 그래서 삶이 더 재밌기도 한 게 아닌가 싶다. 접점의 순간이 끝나거나, 시작되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니. 뭔가 소설 속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든다. 상황에 너무 빠지지 않고, 이렇게 한 발 떨어져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늘 현실에선 이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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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즉 삶은 어떠하겠는가. 훨씬 더 복잡미묘할 테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다양한 표현이 필요한 이유다. 설명하기 애매모호한 것에 선명함을 더하는 작업.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지워내, '아는 것'의 범주를 넓혀 나를 알고 타인을 천천히 이해하여 오래오래 잘 살 수 있게 연습하는 것. 그리고 새로이 단어 만들기는 슬플 때만 사용가능한 방법이 아닌,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새롭고 자세한 각주를 달아줄 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감정을 명료화 하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현주소를 솔직하고 또 가감없이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을 객관화 하는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행동이나 말을 내뱉거나, 감정에 매몰되고는 한다. 그러한 일들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흘려 보내지기 일쑤다. 그러한 것들을 찬찬히 보고 또 곱씹으며 자신을 이해할 시간을 갖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무척이나 필요한 시간이 아니였을까.
슬픔을 뭉뚱그리지 않고 선명히 하기
며칠 전 또 다시 드리운 슬픔에 서서히 잠식될 즈음, 이 책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이윽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은 어디서 기인한 것이고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어떤 맛의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며, 어떤 것으로 해소될 지에 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자주 슬펐지만, 처음 시도해 보는 생각법이었다.
나의 그림자, 나의 부끄러움, 나의 아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나의 동반자, 나의 슬픔.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없앨 수만 있다면 싹 다 지워버리는 상상만 했지 그것에 이름을 달아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질 못했다. 아니, 안 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정말로 살아있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던 너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편이 맞을까. 어둡고 축축한 시간으로 이끈 너를 말이다.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이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 빛날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하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한 감정이다. 몇 개의 형용사나 명사에서 그치기에는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뭉뚱그려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슬픔에 정의를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세상에 완벽히 같은 DNA가 없는 것처럼, 각자에겐 각자의 슬픔이 있을 테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 보면,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껴안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에 대한 선명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시작되는 변화. 존 케닉은 그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어 혼자서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 어원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래 사용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는지는 중요치 않다. 맥락이 전부다. 어쩌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맥락일지도 모른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에서 의미란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 삶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게 느껴지고 모든 게 뒤섞일 때마다, 단어는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주는 분명한 선들로 명료함과 선명함의 감각을 제공한다.
- p. 291~293, 『슬픔에 이름 붙이기』
저자가 말한 해법 - 단어 만들기 - 이 미궁에서 빠져 나오게 한다는 실과도 같다는 점에 깊은 공감을 하며, 여러분도 한 번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다.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 너무 아픈 시간들을 건너고 있을 때, 모든 것을 끝내고만 싶을 때,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감정을 정확히 표현해 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을 갖고,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비슷한 상황을 겪는 타인들이 있음을 알자. 더욱 빛나는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감정에 숨구멍을 뚫는 작업을 내 손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다. 나아가 슬픔 뿐만이 아닌, 다양한 감정을 뭉뚱그리지 말고 선명히 그려내 보자.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미래를 써내려 가는 것은 당신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강윤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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