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태양과 시간이 만든 인간성 - 태양

글 입력 2021.10.1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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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2011년 초연된 일본의 극작가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SF 연극이다. SF, 즉 공상과학이라는 장르는 보통 특수효과나 컴퓨터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전제로 하는 장르다. 보통 CG 등의 가상현실을 바탕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강한 연극에서 SF 장르를 다룬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걱정과 기대를 품고 관람한 연극 <태양>은 꽤 만족스러웠다. 배우들의 연기력, 몸짓의 무게감이 공간의 제약을 압도했고, 탄탄한 극의 서사와 메시지가 터무니없는 현실성을 채워 준다.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중간중간 툭 튀어나오는, 다소 뻔하지만 유쾌한 웃음 코드도 좋았다.

 

 

포스터.jpg

 

 

줄거리


 

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21세기 초, 바이오 테러로 인해 퍼진 바이러스로 전 세계 인구가 급감하고, 감염자 중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우월한 신체를 가진 신인류로 부상하지만 자외선에 매우 민감하여 밤에만 활동할 수 있는 ‘밤의 인간, 녹스’로 불리며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된다. 구인류가 되어 녹스에게 권력을 뺏긴 평범한 인류는 골동품이라는 뜻의 ‘큐리오’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큐리오가 사는 작은 집락촌 중 하나인 나가노 8구에서 녹스 주재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나가노 8구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된다. 그렇게 10년 뒤, 봉쇄가 해제된 나가노 8구는 다시 녹스와의 왕래가 시작된다. 검문소를 사이에 둔 녹스와 큐리오는 점차 서로를 삶에 물들이면서도 경계한다.


가짜를 가정하고 만들어진 과거의 공상 작품은 모순적이게도 현실적인 문제와 지금의 우리 사회를 투영한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의 붕괴, 그로 인해 경계와 동경, 멸시가 혼합된 기득권과 소외계층의 공존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양극의 공존


 

하나의 선으로 숭덩 잘려나간 반쪽짜리 민족들의 내부적 유대감을 그려낸 부분도 흥미로웠다. 우월한 인간인 녹스는 오로지 종족 유지를 위해 성관계를 맺고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되는 것을 하찮아 한다. 나이도 먹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그들은 이따금 감정이 치고 올라오는 순간에 ‘나이를 먹었나 봐’하고 농담을 던진다. 그러고는 다시 아주 쿨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녹스끼리의 단결력을 유지한다.


반면, 큐리오는 퉁명스럽다. 모나고 울퉁불퉁한 자신의 분노와 불만을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10년 전, 녹스 주재원을 살해해 마을을 망친 주범인 카츠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큐리오는 그를 비난했다. 우리 마을을 망친 것은 녹스가 아닌 큐리오라고, 살해범인 카츠야와 이미 도망간 그를 잡겠다고 여기저기 방화를 지른 마을 주민들 때문에 나가노 8구는 빛을 잃었다고 절규한다.


정말 그것이 큐리오 때문일까. 온갖 멸시와 차별을 먼저 일삼고 급을 나누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베푸는 것’으로 바꾼 것은 녹스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내부를 향해 화살을 꽂고 날을 세웠다. 우리의 보편적 사고에서 도덕적으로 어긋난 것들을 같은 종족이기에 용인하는 녹스와, 궁지에 몰려 서로를 헐뜯어야만 하는 큐리오의 대조적인 행보는 연대의 힘조차 빼앗긴 약자들의 현실에 씁쓸함을 남겼다.

 

그렇게 차림새부터 행동, 사고방식까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두 집단 사이 경계선에 바짝 붙어 선 이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녹스였던 검문소 직원 ‘후지타’는 큐리오를 좋아했고, 그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나가노 8구에서 자란 ‘데츠히코’는 녹스의 자유로움과 학교를 갈망해 녹스가 되고 싶어 했다. 서로 세울 날이 없던 두 청년은 쉽게 가까워졌고, 우정은 깊고 진해져 저 먼 미래의 여행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반면, 서로의 진영에 한 발자국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했던 인물들도 있다. 녹스인 ‘세이지’와 큐리오인 ‘유’가 그랬다. 세이지는 본래 나가노 8구에 살던 유의 아버지, 소이치의 친구였으나 녹스가 되었다. 그 후로 한껏 그들을 무시했고 큐리오를 경멸했다. 유는 청년들에게 주어진 녹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음에도 떨떠름해 하며 처음엔 완강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본래 인간이던 그들을 ‘큐리오’라 비하하는 것에 가장 분개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완전한 동맹을 맺은 둘과 영원히 섞일 일 없을 것 같던 둘의 결말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쿵짝이 잘 맞던 후지타와 데츠히코는 녹스가 되려는 데츠히코와 그를 말리는 후지타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립했다. 큐리오를 실패한 것이라 말하던 세이지는 녹스가 패배자라며 스스로 태양 아래 목숨을 잃었고, 유는 녹스가 된 친엄마를 만나 그토록 혐오하던 그들과 같은 종족이 되어 큐리오였던 지난 과거를 부질없었다 평한다.


데츠히코는 후지타에게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이었던 너는 나의 삶을 모른다 말하며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고, 유는  과거의 너 자체도 의미 있었다 말하며 오열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위층으로 올라선 자신이 당신들을 위해 힘쓰겠노라 말한다. 녹스인 후지타와 유는 분명 큐리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들과의 공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그들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왜


 

그들의 말을 듣는 데츠히코와 유의 아버지는 왜, 그들의 도움에 절망했는가. 그것은 아무리 녹스가 그들 사이의 선을 흩뜨려트려도 그 선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녹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녹스는 절대 큐리오보다 낮아질 수 없다. 설령 그들이 태양을 가졌더라도, 이미 견고히 쌓아 올린 위계는 자잘한 지진 따위에 무너지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선뜻 아래로 베풀어주는 것이다. ‘보존되어야 할’ 존재이며, ‘가여운’ 사람들이니 말이다. 회의로 포장된 선민의식은 큐리오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상황에서조차 그저 너는 모른다며 울부짖고, 참혹한 심정을 눈물로 억누를 뿐이었다.


그렇게 권력의 선택을 받은 녹스, 세이지는 왜 스스로를 질병이라 여기고 종말을 택했을까. 생명체들은 멋모르고 태어나 갑작스럽게 죽는다. 태양을 보며 깨어나고, 달을 보며 잠든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특별한 것은 생각하고, 고통 이외의 무수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내뱉을 수 있음에 있다.


이 모든 섭리를 거스르고 밤을 정복한 그들은 과연 인간일까. 세이지는 그 물음에 긍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에 마주했던 태양, 그것이 상징하는 들끓는 감정과 시간을 잃은 자신은 스스로의 본질을 잃었다 여긴 것이 아니었을까.

 

 

 

골동품 인간


 

극은 인간의 낮과 밤을 반으로 똑 떼어 함께 살게 했다. 한 쪽은 사회적 지위로서의 자유를, 한 쪽은 보편적인 인간이 누려야 할 자연의 자유를 주었다. 극 안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은 큐리오지만 그것이 곧 그들의 패배이자,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 절망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 인류를 비하하는 골동품이라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 모른다. 시간과 태양빛에 바랜 우리는 모두 골동품일 수밖에 없다. 녹스 같은 자들은 이것을 저주라 여기며 쇠퇴하는 것이라 비웃겠지만, 겹겹이 옅어진 세월의 흔적들은 누구도 탐할 수 없는 시간을 품고 있다. 지나간 시간만큼 아쉽고 가치 있는 것이 없기에 인간은 뒤로 흩날릴 지금을 최대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태양을 등에 업은 채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런 제약이 없는, 그 자체로 인간 다울 수 있는 큐리오는 오랜 시간과 세대를 거치더라도 반드시 본래의 자리를 쟁취하리라 믿는다. 인간의 본질은 태양과 시간에 있다. 그것을 가진 현실의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인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연극 <태양>이었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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