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록된다는 것 [문화 전반]

기록하는 나와, 기록되는 우리
글 입력 2021.09.1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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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하는 것은 두렵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가족, 친구들, 사랑하는 고양이들 모두 지금처럼만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나의 바람과는 참 아이러니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더 두렵다. 변화는 어떤 방향이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건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니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홀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있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다행인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대부분 변한다는 사실이다. 당신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하물며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일상조차 사소한 이벤트에 너무 쉽게 변해버린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변수로 가득한 삶이 상당히 감사하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더 좋아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밉상인 친구도, 도대체 일 처리를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선배도, 언제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런데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 중 변하지 않는게 있다. 바로 ‘기록물’이다. 우리는 모든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당장 오늘만 봐도 나는 카페에 다녀오면서 길거리, 건물 내부의 CCTV에 찍혔을 것이다. 건물 출입을 위해 출입안전확인증을 작성하고 카페에 들어갈 때는 QR 코드까지 찍었으니 그 시간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기록’이 새로 쓰인 셈이다. 기술이 발전한 덕택에 한 번 남겨진 기록은 웬만하면 쉽게 지울 수도 없다. 앞선 내용과는 상반되지만 어쩌면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변하지 않는 것들로 만들어진 날 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변하지 않는 것,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좋다/나쁘다, 찬성한다/반대한다 식의 이분법적인 의견 제시가 아니라, 모든 게 끊임없이 기록되는 시대에서 ‘기록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색하는 시간을 전함에 그 목적을 둔다.

 

 

 

2. 기록하는 나와, 기록되는 우리



아주 오래 전 동굴에 새겨진 한 벽화에서 시작된 기록의 역사는 오늘날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채워져 가는 중이다. 간단한 그림부터 글, 사진, 영상, 녹음파일 등… 모든 것은 기록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기록되는 내용도 다채로운데 이 글에서는 날씨 등의 과학적 데이터나 단순한 역사적 사실과 같은 정보에 대한 기록물이 아닌 각 ‘개인’에 대한 기록을 다룬다. 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 말이다. 우리는 자주 기록하고, 기록된다.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직접 찍은 음식사진… 모두 우리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고흐가 자신의 동생인 테오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들이 지금은 책으로 엮어져 사람들에게 읽히는 세태를 보면, 어쩌면 나중에 우리가 한 카톡이 책으로 출판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기록은 사람들에게 일단 전해지고 나면 본래의 의도, 목적과는 상관없이 새롭게 해석된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에 대한 기록물이 때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지어는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전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폴 칼라니티의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가 그랬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죽음을 목전에 둔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이 남긴 마지막 2년의 기록이다. 폴은 담담하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충실하게 보내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할 뿐이다. 폴의 사적인 기록은 살아생전 폴을 만나본 적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특히 이 기록을 접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게 됐다. 당시 폴의 배우자 루시가 폴에게 보내는 신뢰와 지지에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개인적인 기록물이 누군가에겐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간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폴의 기록은 전세계 사람들의 해석으로 새롭게 쓰여진다. 기록은 이처럼 각자의 해석이 더해질 때 더욱 빛난다. 그런데 한편으로, 기록에는 해석이 더해지기에 우리는 기록을 남길 때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고민이 부족한 기록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잘못된 편견을 만들기도, 기록된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웹사이트 배너나 TV 광고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모금광고를 떠올려 보자. 어떤 모습이 생각나는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이 스쳐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자극적으로 묘사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금운동을 쉽게 ‘빈곤 포르노’ 라고 부른다. 당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빈곤 포르노 광고는 결국 사람들의 무의식 속 편견의 불씨를 키우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사람들을 무디게 만든다.

 

특히 빈곤 포르노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아프리카 어린 아이의 모습은 결국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곧 빈곤, 기아, 질병 등의 부정적인 키워드로 개념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사람들이 자극에 둔감해지는 것도 큰 문제다. 결국 이목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콘텐츠가 양산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비단 후원 광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전 손택은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테러, 전쟁과 같은 국제분쟁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기록한 재앙의 이미지가 결국 분쟁 속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다고 말한다. 분쟁을 기록해 궁극적으로는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나름의 목표가 있을 터인데, 오히려 사람들 사이 잘못된 인식을 확산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에 우리는 일말의 고민이 없다.

 

이 외에도 때로 우리는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기록한 ‘나’로 인해 상처받을 수도 있다.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육아 브이로그, 육아 예능, 육아 사진 공유 등 아이가 등장하는 콘텐츠를 보며 든 생각이다.

 

‘셰어린팅(Sharenting)’이 유행이다. 공유를 뜻하는 ‘Share’와 육아를 뜻하는 ‘Parenting’을 합친 단어인데 SNS를 통해 자녀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내 자식을 자랑하기 위함도 있고, 부모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해 육아 정보를 공유하는 목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이의 제대로 된 동의를 받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시간이 흘러 SNS에 공유된 나의 어릴 적 사진을 아이가 과연 반길 지는 모르는 문제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온 부모를 고소한 사건도 있고, 프랑스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사진을 동의 없이 게시했을 경우 벌금형에 처하기도 한다. 단순 부모의 사랑으로 치부하기에는 기록물이 가지는 무게가 너무 큰 것이다.

 

 

 

3. 기록된다는 것


 

우리는 앞선 내용을 통해 기록물이 새롭게 해석되는 특징을 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본래의 의도와 다른 해석은 때로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전하고 기존 기록물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하지만 이따금씩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 벽을 세우고 편견을 키우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해서 기록한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안긴다. 참 묘한 일이다.

 

아마 기록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기록을 둘러싼 해석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일 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기록된 사실은 바꾸기 어렵고, 그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다양하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 ‘기록되는 사람’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말자. 우리는 기록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기록되는 사람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기록’에 대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뜻이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 글이 ‘기록된다는 것’의 의미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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