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네가 나오는 꿈.

사랑 이야기
글 입력 2021.08.2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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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났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 이제 막 입기 시작한 교복은 어색하고, 늘어난 수업 시간과 과목마다 바뀌는 선생님도 낯설게 느껴지던 때였다. 남자 아이들은 머리에 왁스를 바르기 시작했고 여자 아이들은 눈 위에 아이라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난 이마의 여드름을 가리기 위해 앞머리를 일자로 잘랐을 뿐, 뿔테 안경에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다. 매일 아침 얼굴이 하얘진다는 선크림을 바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내 얼굴을 꾸미는 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빠르게 무리를 지었다. 목소리가 크고 거리낄 것 없이 할 말을 내뱉는 대여섯 명은 반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 무리에 낄 만큼의 반항심도, 숫기도 없는 아이들은 내심 그들의 왁자지껄함을 부러워하며 서너 명씩 모여 자기들만의 무리를 만들었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삼십 명 언저리가 모인 반의 물 밑에서 우리는 누가 누구와 친하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며, 누가 누구와 싸워 함께 놀 다른 무리를 찾고 있는지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쉴 틈없이 서로를 관찰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교복을 입으면서 갑자기 내 앞의 상대가 이성이라는 게 느껴져서인지 허세와 서열 다툼으로 날 선 남자애들의 헤어왁스는 점점 더 진해졌고 여자애들은 빨간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남자애들의 어깨를 때렸다. 어떻게 분출할 줄도 모르면서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서투른 열기, 설익은 여드름같은 욕구가 그 해 우리들의 책상, 서랍장, 교탁 아래 내내 배어있었다.


너는 2학기가 시작했을 때 전학을 왔다. 얼굴이 하얗고 테가 얇은 안경을 썼었다. 첫눈에 봤을 때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보였다. 너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영어 시간에 놀랄만큼 유려한 발음으로 지문을 읽었고, 쉽게 무리 속에 합류했다. 지저분한 서열 다툼에서 떨어져 나와 구석에 모여 적당히 수다를 떠는 남자애 서넛의 무리와 함께 다녔다. 잘 웃었고, 은근슬쩍 장난치는 것도 좋아했다. 아직 남아있는 더위에 아이들이 하복 옷깃을 펄럭이며 땀을 식히던 무렵 나는 너와 짝이 되었다. 그 당시 내 팔뚝에는 펜 자국이 길게 나 있었는데, 내 앞에 앉은 남자애가 장난이랍시고 계속 뒤를 돌아 내 팔에 대고 펜을 그어댔기 때문이다. 그 여름에 하복을 입은 내 팔뚝이 여러 남자애들에게 괜찮은 도화지로 여겨졌고, 난 그걸 기분나쁜 장난으로 생각하고 넘겼다. 남자애들도 나도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얼룩진 팔뚝을 갖고 집에 갔을 뿐이다.


네가 옆에 앉았을 때, 나는 피부도 눈동자 색도 옅은 너에게 혼혈이냐고, 아니면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냐고 물었지만 너는 다 아니라고 했다. 비웃지도 놀리지 않고 그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날 선 느낌없이, 비웃는 느낌없이 웃는 열네 살 남자애라니. 네 덕분에 내 팔뚝의 펜자국은 거의 줄었는데, 앞에 앉은 남자애가 신나게 펜을 휘두르려는 참이면 네가 “하지 마”라고 말하며 팔을 들어 막았기 때문이다. 뒤에 앉은 남자애도 내 교복에 은근슬쩍 펜을 묻히기 일쑤였는데 너는 슬쩍 뒤를 보는가 싶더니 손을 저어 내내 막아주었다. 난 너의 교과서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네가 남자애들을 막아준다는 게 좋았다. 내가 휘젓는 손은 아무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나중에야 그 남자애들을 불러다시 내 교복에 낙서를 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혼내는 걸 보고나서야 내가 당한 게 장난이 아니라, 지저분한 괴롭힘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와는 한 달 동안 짝이었다. 내가 졸려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네가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 선생님이 다가올 때 날 툭 쳤다. 숙제를 베끼기도 여러 번이었고, 삼각자따위의 물건도 몇 번 빌렸다. 계속 너와 짝으로 있고 싶었다. 네가 옆에 있으면 혼자 있어도 날 선 느낌 없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는 바뀌었고, 우리 둘다 내성적이고 먼저 다가서는 성격이 아니어서 서로가 짝이었을 때만큼 살갑게 지내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서로 각자의 친구들 어깨 뒤에 숨어 장난을 쳤다. (갑자기 드는 생각. 내가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될까? 우리는 그저 너와 나 두 명의 인간이 아니었던가?)  내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면 너는 금방 “ 미안해”하며 푸슬푸슬 웃었다.


난 종종 운동장을 뛰어가는 너의 등을 창가에서 한참 바라보았다. 그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응시. 어느 쉬는 시간,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는 동안 남자 아이들이 내 안경을 가져가 돌려주지 않았다. 안경 없이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나는 계속 돌려달라고 해도 낄낄 웃기만 하는 남자아이들한테 짜증이 났다가, 화가 났다가, 기분이 잔뜩 상해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교실로 돌아온 네가 내 등을 툭툭 치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안경을 가져갔어.” 난 고개를 묻은 채로 말했다. 너는 내 안경을 들고 웃고 있는 무리에 가서 뭐라 말하는 가 싶더니 책상 위에 안경을 올려놓았다. 난 그걸 끼고 뒤를 돌아봤다. 다시 또렷해진 시야에서 너는 손가락을 둥글게 모아  안경 모양을 만들며 날 보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난 언니의 낡은 패딩을 입고 다녔는데 뻣뻣한 재질에 솜이 얇아서 불편하기만 하고 한파를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교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추운 날 아침이면 나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이 풀릴 때까지 웅크리고 있었다.

“추워?” 난방기 옆은 명당이라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차지하고, 난 자리에 앉아 패딩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떨고 있을때면 네가 와서 물었다.

“어, 이 패딩 너무 얇어.”

“그럼 내꺼 입어.”

너는 패딩을 벗어서 내 머리 위에 덮었다.

“넌 뭐 입고?”

“난 별로 안 추워.”

검고 재질이 부드러웠던 너의 패딩은 가볍고 품이 크고 포근했다. 그것 하나만 입고 있어도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춥지 않았다.

 

겨울 방학식 날,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느지막히 혼자 교문을 나와 걷는 길에 네가 길 아래쪽 저편에서 친구와 함께 서 있는걸 보았다. 너의 친구는 먼저 걸어가고 너는 뒤를 돌아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멈춰서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너는 이내 친구를 따라 길을 건너 왼편 아파트 단지로 사라졌다. 연락처는 알지 못했다. 직접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난 다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사를 갔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이사 가기 전날까지 나는 여러번 네가 사라진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책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교복을 벗은 지 십년이 다 되어가도록 난 여러번 네가 나오는 꿈을 꿨다. 항상 중학교 교실이었고, 여드름 난 남자아이들과 입술이 새빨간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너도 나도 언제나 열네 살 모습 그대로였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혼자 오래된 영화를 보며 맥주에 취해 잠든 어느 날, 나는 다른 꿈을 꿨다. 너는 오후의 금빛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작은 방에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그 방에 들어갔다. 너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키가 많이 컸고, 얼굴은 부드러운 빛에 흐려진 듯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자라 있었고, 더 이상 열네 살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는 아기가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아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세월에 네가 다른 누군가와 낳은 아기였고, 너는 혼자였다. 너는 아기를 쓰다듬는 내 옆에 앉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푸슬푸슬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냥 살았지. 나는 대답했다. 그 오후의 햇빛 속에서 나는 말없이 앉아 이대로 너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되어버린 사람들인지 깨닫고 놀랐다. 너의 다정함, 상냥함. 외롭고 서툴렀던 그 시기에 내 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던 부드러움이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다는 걸. 다시 돌아간다면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을 그 순간들에 남아있던 나의 주저함도 용기 없음도, 체온 속에 녹아 사라졌다는 걸. 이제 우리는 서로를 잊고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되어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란 걸.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그 시절보다 더 두툼한 너의 손이 내 머리를 쓸어내리던 나른한 꿈 속에서, 그 긴 시간동안 단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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