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래현의 멋진 예술, 멋진 인생 [미술]

그녀를 꼭 닮은 예술이 더 많은 이에게 닿기를 바라며
글 입력 2021.08.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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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1920-1976) 화백은 김환기, 김기창, 이우환, 권진규와 같은 현재 거장이라 불리는 화가, 조각가와 동시대에 활동한 예술가다. 생전에는 꽤 많은 주목을 받은 여류 화가였지만, 현재 그를 향한 관심은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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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박래현의 작업을 조망하는 자리가 최근 2018년 <우향 박래현 판화전>, 2020년 청작화랑의 <우향 박래현 with 운보 김기창>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박래현: 삼중통역사> 전시를 통해 마련됐었다. 박래현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는 지금, 그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적절한 시기라 생각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

 

박래현의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작업의 다양성에 있지 않을까싶다. 1940년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박래현은 1976년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매체를 활용한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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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1956, 종이에 채색, 253x194cm


 

<여인>(1942), <소녀>(1942), <단장>(1943)과 같은 작품들처럼 작업 초기에는 여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1950년대부터는 여성이라는 소재와 낮은 채도의 색채는 여전히 가지고 가면서 면을 분할하는 입체주의 형식을 적용한 그림들을 선보였다.

 

대한미협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른 아침>(1956)에서 보이듯 40년대 초기 회화보다 형태를 훨씬 단순화하고 선을 강조해 인물을 더욱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프레임을 살짝 벗어난 오른쪽 인물처럼 구도와 배치를 실험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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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역사 중에서>, 1963, 종이에 채색, 150.5x13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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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966-67, 종이에 채색, 169x135cm


 

박래현 화백이 가장 관심있었던 장르인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62년, 그녀가 속한 '백양회’ 미술 단체의 해외 순회전 이후 부터다. <잊혀진 역사 중에서>(1963)처럼 번지기 기법을 사용한 추상화에 이어 미국 순회전 직후인 1966년부터 <작품>(1966-67), <작품 H>(1966-67)와 같이 박래현의 추상화를 대표하는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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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970-73, 태피스트리(털실, 하수구 마개), 131x111cm


 

196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프랫 그래픽 아트 센터에서 2년간 판화를 배우고 <현상>(1970-73), <기원>(1970-73) 등 여러 점의 실험적인 판화를 남겼다. 또한 태피스트리에까지 작업 반경을 확장하면서 하수구 마개, 커튼 고리 등 예술 작품에서 쓰지 않는 재료들을 가지고 '새로운 태피스트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식지 않는 열정으로 예술의 표현 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한 박래현 작가는 재료와 방법에 있어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매체를 혼합하거나 새로운 재료를 도입해 각 장르를 확장시켰다.


*

 

박래현 작가는 장르를 망라하고 생활 속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소재와 매체를 활용했다. 여성 인물화와 정물화 등 본격적인 추상 이전의 작업들에서 그런 소재를 찾을 수 있고, 도자 장식, 태피스트리같은 공예 작업들이 일상 생활과 가까운 매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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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 안동오, 문양 박래현, <백자 장식문 화병>, 1970년경, 높이 18.4cm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가정에서의 예술성의 위치는 전문적인 천착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떠나야 하는 일이다.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을 도와주고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인간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길이 항상 가정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 마음속에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마음속에 가질 수 있는 예술성이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 속에 어느 귀한 흐름이 움직일 때 얻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예술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가져다주는 어느 표지라고 본다. (......) 나 자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도 좋을 것이며 저명한 작가가 아니라도 무관할 것이다. 오직 예술이 지닌 본질적인 생명력이 우리 마음속에 위치할 수 있다면 모두가 같이 예술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박래현의 예술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박래현에게는 ‘화가’, ‘조각가’라는 타이틀이 중요하지 않았다. 권위를 가진 예술이 아닌 생활 속에 스며드는 예술을 지향했다. 그저 자신 안에 작더라도 분명한 예술성을 키우는 것, 그리고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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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1970-73, 에칭, 애쿼틴트, 50.5x40cm


 

또한 박래현은 판화에 빠지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붓으로 그리는 맑은 여백의 동양화를 하다가 뉴욕에서 판화와 만났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가지의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 예술이라는 말과 곧잘 상반되는 단어로 쓰이는 기술이라는 것이 작가의 예술성을 깊게 해 줄뿐더러 표현 방법에 의외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술과 기술, 음절 한 끝 차이지만 그 거리는 멀었다. 예술은 곧잘 칭송받는 반면, 기술은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진정한(순수한)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며 목적이나 쓰임이 있는 기술은 순수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도예 장식이나 태피스트리같은 수공예 기술도 ‘여성적’인 것으로 취급됐으며 이는 곧 하등하다는 의미였다. 박래현은 이를 파악했음은 물론 동양화라는 전통적인 회화 장르와 판화라는 기술을 결합하는 ‘예술과 기술의 접목’을 시도하며 그러한 관념을 극복하려 했다.


당대에 여성으로서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은 우리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박래현 화백을 보면 여성이기때문에 맞닥뜨려야하는 장애물도 있었지만, 그만큼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도 컸던 것 같다. 물론 그건 박래현 화백이 늘 주변을 관찰하고 현상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박래현은 변화하는 시류에 민감했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1950년대 후반, 추상화가 세계적인 흐름임을 간파하고 추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화가들 사이에 왜색을 떨쳐내고 한국의 것을 되찾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는데, 피카소에 매료된 박래현은 입체주의 형식을 활용한 작업에 착수하면서 서구의 것과 한국의 것을 융합한 스타일로 변화를 이끌었다.


그의 통찰력은 토착미술을 향한 관심에서도 엿보인다. 피카소를 포함한 서구 미술가들이 토착미술, 고대미술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박래현도 중남미의 고대 문명, 이집트 왕조, 인도와 태국 문명을 작업의 원천으로 삼았다. 박래현과 그의 남편 김기창은 미국 여행 시에 고대 유적지와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터전을 방문했는데, 박래현은 그곳에서 느낀점들을 이렇게 남겼다.


“소장품 하나하나에 새겨진 섬세하고 알뜰한 무늬가 수 세기를 지난 오늘 고스란히 간직된 이 기쁨. 지구의 어느 편에 살거나 이 기쁨은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나 자신도 인류의 문명을 키워 가는 한 일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이 세기의 인간들이 평등히 가져야 할 권리가 아닐까.”


그녀는 세계 반대편에서 “동양”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민족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는 그녀의 능력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김환기가 그랬듯 박래현도 민족적인 것, 동양적인 것, 토착적인 것에서 보편적, 세계적인 것을 발견했다.


*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박래현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1949년 창간된 여성지 <신여원>에 ‘만일 우리들만의 나라가 설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에서 박래현은 이렇게 적었다.

 

 

글쎄 이런 시대가 올까 (......)

 

1. 여성들은 외부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지금까지 해오던 가사를 위탁하고 싶다.

(......)

4. 지금까지 이어져 온 남성들의 봉건적 의식을 뿌리 뽑도록 교양을 쌓아주고 싶다.

5. 걸핏하면 “여자라는 것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에게 특별한 법을 제정하고 싶다.

6. 여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없애기 위해 각 학교에서 재교육을 실행하고 싶다.

 

 

여성의 인권 향상을 위한 발언을 하고 글을 썼던 박래현은 이처럼 깨어있는 신여성이었다. 1974년 ‘신사임당상’ 수상에 달하는 경력을 가진 그녀는 현실에 순응하는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정확히 파악했고 당당히 외쳤다. 이런 마인드와 태도는 지금의 우리가 봐도 굉장히 현대적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한 방에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 아닐 수 없다. 같은 길을 가는 괴로움, 그것은 한 고장에 색다른 두 마을을 꾸미는 노력이기도 하다.”

 

 

박래현 작업실, 국민일보.png

작업 중인 박래현 화백 (출처: 국민일보)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김기창을 남편으로 둔 화가 박래현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야했다. 그리고 김기창 역시 박래현이 스스로의 꿈을 펼치고 그녀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도록 도왔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예술가와 뮤즈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둘은 한 집에 사는 독립적인 예술가들이었으며, 각자의 확고한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후에는 박래현이 김기창보다 더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으로 김기창에게 새로운 것들을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둘은 최대의 라이벌인 동시에 서로의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했다. 청각 장애를 가진 김기창의 일상 생활과 미술 활동에서 박래현의 도움이 컸기에 김기창 또한 박래현의 예술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되곤 한다.


“실컷 공부하고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오면 나도 그 지혜의 보물을 골라 갖기로 하지.”

 

김기창이 남긴 이런 아름다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박래현의 능력에 대한 김기창의 신뢰와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아끼지 않은 지원이다. 7년동안 이어진 박래현의 유학생활이 가능했던 건 이러한 김기창의 지지가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

 

박래현 화백이 남긴 작품은 박래현이라는 인물만큼이나 매력적이다. 현대적이고 과감한 작품 스타일은 박래현의 당차고 깨어있는 신여성의 모습과 닮았고, 다양한 방식과 재료의 사용은 그녀의 입체적인 면모와 닮았다. 마치 부모를 닮은 자식처럼 예술가를 닮은 예술 작품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박래현 화백을 보면 작품의 매력이 작가의 매력으로, 작가의 매력이 작품의 매력으로 이어짐을 새삼 깨닫는다.

 

한 번 끌리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녀의 작업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예술을 느끼고 그를 통해 용기와 의지를 얻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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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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