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사랑의 틀을 넘어서 인간을 되돌아보다

『아이, 로봇』, 소녀를 사랑한 로봇
글 입력 2021.06.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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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생명이 없는 사물과 인간 간의 사랑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애니메이션 피규어나 그림이 그려진 쿠션을 사랑하는 이들을 괄시하고 경멸하는 사회의 시선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로비와 글로리아의 관계 양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편협한 틀을 재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로봇을 포함한 사물과의 사랑에 대한 고민을 통해, 그동안 의심해본 적 없었던 인간 간의 소통과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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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소녀, 그리고 걱정하는 어른들


 

글로리아는 여덟 살의 소녀이고 로비는 로봇이다. 로비는 말도 할 수 없는 기종이지만, 그것이 글로리아와 대화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글로리아에게 토라졌을 때에는 괜히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이 삐쳐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글로리아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로비와 글로리아의 소통은 어느 인간의 소통만큼이나 질적으로 깊으며, 누가 보아도 친구 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어머니인 웨스턴 부인은 로봇과의 돈독한 친구관계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느꼈으며, 글로리아로부터 로비를 떼어놓기 위한 일련의 기획에 착수한다. 우선 남편인 조지 웨스턴을 끊임없이 설득한 끝에 부분적인 동의를 이끌어 냈으며, 글로리아가 쇼에 간 사이에 몰래 로비를 보내버리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후 웨스턴 부인은 글로리아로부터 로비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지만, 그 어떤 노력에도 글로리아는 로비만을 찾아다녔다. 결국 위험에 빠진 글로리아를 로비가 나타나서 구한 사건을 계기로, 둘은 웨스턴 부인으로부터 관계를 인정받게 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내가 여기서 중점적으로 보았던 부분은 로비와 글로리아의 소통 양식과 다른 인간들의 소통 양식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흔히 우리는 사물과의 소통이 인간 간의 소통에 비해 질적으로 낮다고 판단하곤 하지만, 고민의 여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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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달리 인간의 소통은 질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웨스턴 부인은 로비를 ‘저 끔찍한 기계’라고 칭하며 글로리아가 그와 계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을 경우 사회성을 결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공유하고 있는 익숙한 통념과 일맥상통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질적으로 높은 소통이 가능하며, 이것이 적절한 사회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 어느 부모라도 웨스턴 부인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사물과의 애정 관계는 유아적이라고 파악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유치원을 다닐 만한 어린아이가 곰인형이나 공룡피규어와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누구도 지적하지 않지만, 그러한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어른들의 불안감은 점차 커지곤 한다.

 

그러나 다양한 관계 맺음에 대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관계 맺음에 있어서 어떤 우열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일반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물과 인간의 관계 맺음 속에서 더 깊은 소통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통념과 달리 인간 간의 소통이라고 해서 상당한 깊이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소설 속에서 웨스턴 부인과 조지 웨스턴 간의 소통 역시 질적으로 높다고 보기 어렵다. 로비에 대한 견해가 틀어지는 상황 속에서 둘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이는 태도로 대화에 임한다. 웨스턴 부인은 조지 웨스턴의 상세한 설명을 무시하고 자신의 불분명한 신념만으로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며, 조지 웨스턴은 그러한 웨스턴 부인을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무시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결국 건전한 소통에 의한 협의보다는 일방의 포기를 통한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또한 부모와 글로리아의 소통 관계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존중이 결여되어있다. 부모는 글로리아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진중한 토론이나 설득보다는 일방적인 조치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아무리 양육자의 지위에 있다고 한들 이는 자명한 폭력이며,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고도 얄팍한 깊이의 소통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의 지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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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의미로서 바라본 인간과 사물 간의 소통


 

그럼에도 인간과 인간은 깊이가 얕을지라도 진정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반면, 사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소통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의미로서 소통을 조망했을 때 그러한 주장은 큰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소통한다고 했을 때 상대의 직접적인 행동이나 발언으로부터 매개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곤 하지만, 사실상 이는 주체의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소통은 주체의 행동과 객체의 행동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과 객체에 대한 주체의 해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부여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몇백 년 전에 죽은 철학자의 책을 읽으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이처럼 해석의 의미를 중심으로 소통을 분석해본다면 이는 반드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흔히 인간은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꼬리를 흔들거나 얼굴을 부비고, 물기도 하며 때로는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들을 인간이 해석함에 따라서 소통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통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로봇 로비와 소녀 글로리아의 소통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해석이라는 선상에서 보았을 때 돌멩이나 텍스트, 로봇과 같은 비생명체라고 해서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사랑의 대상 또한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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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편협한 틀과 인간의 왜소한 소통양식을 되돌아보며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오늘날 다양한 사물과의 소통이 인간 간의 소통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왜소한 소통양식을 되돌아봄과 동시에, 사랑에 대한 편협한 틀을 재고해볼 수 있다.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관계맺음과 관련해서도 따가운 반성이 따라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인 내게 있어서 조지 웨스턴과 웨스턴 부인의 소통방식은 너무도 익숙하며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귀를 닫거나 이해를 포기하는 양상은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통은 다분히 고차원적이므로 공기인형과의 관계 맺음과는 확실히 변별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나의 관념에 균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보다 다양한 사랑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동성결혼 합법화에 관한 토론에서 “그럼 돌이랑 결혼하겠다는 외국의 사례도 있는데 그것까지 인정해줘야 하냐?”라는 식의 논의를 마주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분개하며 “동성결혼 합법화와 돌이랑 결혼한다는 게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느냐”라며 답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필요할지라도, 대상이 돌이라는 이유로 그 사랑이 폄하 당할 이유는 없다는 방향으로 생각의 경로를 바꾸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럼 돌이랑 결혼하겠다는 외국의 사례까지 존중하라”는 식의 논의가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던 나보다도 더 앞서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런 주장을 다시 듣게 된다면, 그것 역시도 고민의 여지가 있다고 당당하게 답해줄 것이다.

 

 

[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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