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 불명] 저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 입력 2023.12.0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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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unseen-studio-s9CC2SKySJM-unsplash.jpg

 

 

저와 당신이 서로 삶의 목격자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편지를 씁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정말이지 도무지 저와 맞지 않습니다. 야멸차게 새하얀 사무실의 형광등도, 작게 틀어둔 노동요 하나 없는 적막한 공기도, 다정에 인색한 동료들도, 입사할 때의 채용공고와 다른 업무 범위도 모두 저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지경이 되었어요. 매일 하루 8시간을 속하고 싶지 않은 집단에 머무르는 일에 기운을 쏟고 집으로 돌아오는 짓을 8개월 반복했습니다. 이 회사에 오래 있다가는 반드시 탈이 나겠다 싶었어요. 계약 기간 만료 시기가 다가오는 참에 어쨌든 그만둘 요량으로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사 어디 원하는 대로 되라는 법 있던가요. 가고 싶던 회사의 2차 면접까지 보고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꽤 열심히 준비했던 면접인데 떨어지니 힘이 쭉 빠지더라고요. 뭐, 별 수 있나요. 신 포도를 본 여우처럼 기업 리뷰에 적힌 ‘야근이 많다’는 후기만을 곱씹으며 정신승리를 하는 수밖에요.

 

동시에 다니던 회사에서의 정규직 전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회사에 오래 머무르진 않을 테지만 월세를 낼 구멍이 생겨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결국 저는 벗어나고 싶던 회사에서 다시 환승 이직을 준비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네요...

 

기업 한 곳만 면접을 준비해도 진이 빠지는 개복치인 저에게 퇴근 후 저녁 시간, 방전된 자제력을 발휘하여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이력서를 쓰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저녁 시간에는 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아요. 허영심으로 쟁여둔 책도 읽어야 하고, 주말에 먹어 한껏 오른 붓기를 뺄 겸 운동도 해야 하고, 혹여나 놓친 ‘내 옷’은 없는지 틈틈이 인터넷 쇼핑도 해야 합니다. 매일 비슷한 일상의 반복에서 잠시라도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들을 이직이 급하다는 이유로 미뤄두기만 할 수는 없지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요약하자면, 저는 당장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에 시간을 할애하길 택했고 그래서 이직 계획은 느슨하게 잡았다는 말입니다. 와중에 여유가 되는 때에 이력서를 내고 있지만 연락은 몇 군데 받지 못했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음 한 켠에는 ‘가고 싶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그럴 역량은 되는 사람일까?’ 자기 의심이 스멀 고개를 내밉니다. 쓰임새를 찾지 못한 잉여가 될까 불안해요.

 

이런 초조함 때문이었을까요? 얼마 전엔 남자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서운하여 그를 2일 내내 은은하게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게 괴롭혔습니다. 아니 글쎄, 처음 저와 만난 날 사귈 수 있을지 애매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애매하다니요? 듣는 진짜 애매한 사람 서운하게 말예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속이 좁은 저는 달콤한 거짓부렁을 말하지 못한 그가 너무 괘씸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영혼까지 거부당한 기분이 들었던 건 그의 탓이 아님을 알아요.

 

아, 역시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땐 나를 믿어주는 남의 마음을 빌리러 다녀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빌려 나를 믿으려 노력해야 해요. 그래서 친구, 할머니, 교수님… 부지런히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어 저를 향한 확신을 빚져왔습니다. 이렇게 받은 마음을 언젠가 저도 수건돌리기처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고마움만을 지닌 채 당당하게 빌렸어요.

 

자주 어설프고 자주 흔들리는 저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하거나 큰 포부를 품은 원대한 목표는 사치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삶을 바란 적도 없었고, 그게 성향에도 안 맞다는 걸 잘 알아요. 다만 그런 제게도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그건 바로 모든 것을 유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번거롭지만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

 

- 사노 요코

 

사람들이 사노 요코 할머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힘주어 단단해지길 요구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힘 빼고 느슨해져도 괜찮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문장을 읽기 전 한심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나 스스로가 이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기특하니까요.

 

지금처럼 살고 있는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어쩌면 전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소박하고 시시콜콜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한 몸 뉠 작은 집, 나의 쓸모를 일깨워주는 회사, 언제든 안전한 요새가 되어주는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는 현재의 삶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끼기에 무언가를 무리해서 시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삶을 구석구석 살고 싶어.

대충 살지 않고 창틀까지 닦듯이 살고 싶어.

 

- 이슬아, 아무튼, 노래

 

언젠가는 이토록 자질구레한 일상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만, 누군가 슥슥 무심하게 청소기를 민다면 행주를 들고 꼼꼼히 창틀을 닦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행복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즉,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해’라는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행복이다.

 

- 이치다 노리코, 올해의 목표는 다정해지기입니다

 

아무래도 제게 적합한 전략은 꺾이지 않는 단단함보다는 그때그때 균형을 찾아가는 유연함인 듯합니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삶을 응시하기. 믿는 것이 생겼다면 온 마음 다해 좇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기. 간절하게 꽉 쥐고 있다가도 담대하게 놓아주기. 저는 앞으로도 이런 유연함을 품고 싶어요.

 

인생이 집을 찾는 여정 같다던 말.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언젠가는 그 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욕망과 거짓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집'에.

 

-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내 것이 아닌 욕망에 방해받기 딱 좋은 소란한 세상입니다. (물론 저도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켜고 보기 좋은 부분을 전시하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금처럼 유연한 생각을 되뇌고 연습하면 저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나의 집’에 도달할 수 있겠지요?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아도, 괴로울 정도로 너무 애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그런대로 괜찮은, 모든 게 자연스러운 ‘나의 집’에 말예요.

 

항상 그렇듯 이런 이야기에 결론은 없습니다. 그냥 저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멋있게 갈무리해보려다 실패하여 이렇게 두서없이 급하게 편지를 끝냅니다... 모쪼록 추운 겨울, 다들 한 해간 존재의 증명에 너무 얽매지 않고 복작따땃한 연말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건 스스로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하네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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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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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월드를창조한그는전설이다
    • 잘읽었습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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