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고 났음에도 가지지 못한 것 - 자유로부터의 도피 [도서/문학]

글 입력 2023.11.0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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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자유


 

<자유로부터의 도피> 1965년판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명시되어 있다. “사회의 거대 세력과 인류 생존에 대한 위협은 지난 25년 동안 더욱 늘어났고, 따라서 자유로부터 도망치려는 인간의 경향도 더욱 강해졌다.” 인류는 자유를 끈질기게 갈망하면서도 그로부터 도피하려는 만만치 않은 시도를 지속해왔다는 뜻이다. 이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논조를 압축 및 대표할 수 있는 문장이며, 저자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해당 논의를 설득력 있게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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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사견을 밝히자면, 나는 진정한 자유란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행복에 집착하면 결코 만족스러운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지나치게 신성화하고 그것에 얽매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소확행’과 같은 신조어를 받아 ‘소확자(소소하고 확실한 자유)’라는 말이라도 만들어 애써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결국 우리는 자유는 잘 모르더라도 자유롭지 않은 상태는 너무도 확실히 감각할 수 있는 불행을 안게 된다.


그러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나의 이러한 사고 역시 자유가 주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게 했다. 프롬이 말하는 적극적인 자유, 즉 ‘~를 향한 자유’는 달성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고 체념한 것이다. 나아가 소극적인 자유(~로부터의 자유)조차 끝없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지닌 긍정적 함의들을 뭉개버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낀 것 같다. 자유를 마치 유니콘이나 에덴동산과 같은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라고 처리하는 편이 마음이 편한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 불러 마땅한 것을, 나는 애써 ‘자유로부터의 자유’라고 명명하며 서툴게 자위해왔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해당 책을 통해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재확인시키며, 이의 추구를 단념해서는 안 된다는 설득을 끈질기게 이어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독자에게 분명한 함의를 지닌다 느꼈다. 본론에서 이를 다방면으로 확인해보고자 한다.

 

 

 

프롬의 견해로 본 서사 텍스트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총 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장에서 프롬은 논의의 근본이 될 자유의 두 개념을 정의한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그것인데, 전자는 ‘~으로부터의 자유’로, 후자는 ‘~를 향한 자유’로 명명된다.


프롬은 ‘인류 역사는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고 역설하며, 가시적으로 분명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즉 소극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시도로 점철된 것으로 인류 역사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도는 집단과 구별되는 개인을 탄생시키는데, 이때 개인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독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책의 핵심 논조이다. 프롬은 4장에서 7장까지의 지면을 활용해 인간들이 이를 어떻게 해소하려 했는지, 이 방식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그렇다면 이상적인 방향은 무엇인지를 서술하며 나아간다.


특히 인상적인 건 수많은 이들이 파시즘의 신봉자가 된 것 또한 이러한 불안감이 피학적 욕망으로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분명한 설득력을 지닌다. 새장은 갑갑하지만 안전하기도 하다. 또한 가두는 자와 갇히는 자의 거래 관계 역시 명확하다. ‘자유’라는, 언젠가 달성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무언가만 내어준다면 안전과 뜻을 함께할 동료를 주겠다는 환상이 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는 그저 관념이 아닌, 수많은 실재적 맥락을 포함한 살아있는 개념이다. 새장을 택한 이는 움직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나아가 움직이거나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도 없게 된다. 이것이 프롬이 말하는 최악의 상태, 개인이 개인임을 포기하고 가학적 욕망을 지닌 주체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 상태일 것이다. 이렇게 프롬은 나치즘의 주체 및 대상의 심리를 가학-피학적 경향의 구도로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프롬은 자유로 인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금껏 투쟁해온 소극적 자유를 지키면서도 적극적인 자유로의 이행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이성과 감성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통합된 주체의 ‘자발성’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프롬의 견해를 거울 삼아 몇 가지 서사 텍스트를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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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석방된 죄수들이 어떤 비극을 겪는지 살펴본다면 해당 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석방된 모범수 브룩스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은 레드는 ‘교도소의 담벼락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차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마치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염두에 둔 것만 같은 대사이다. 죄수들이 감옥의 담벼락을 넘는 것을 소극적 자유의 달성이라고 정의한다면, 사회는 돈, 편견, 사회적 지위 등 이름도 다채로운 담벼락들로 그들에게 불안과 고독을 선사한다.


<데미안>은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것을 인간의 필연이자 운명으로 묘사하지만, 껍질을 깨고 또 깨도 앞에는 그저 껍질뿐임을 깨달은 자의 절망은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 지 알 수 없다. 결국 인간은 껍질 안에 갇힌 상황 이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프롬 역시 7장을 통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상상을 그만두는 것, 상상력의 한계를 긋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견해대로라면 이 담벼락은 시스템의 외압일 수도 있지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앤디는 레드에게 ‘희망은 좋은 거예요. 아마 가장 좋은 것일지 모르죠. 그리고 좋은 것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다. 20년 간 벽을 파내면서 누구보다 끈질지게 자유를 쫓은 앤디였다. 그는 일부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당황하고 불안에 시달리더라도, 그보다 더한 양질의 자유를 상상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이를 향해 나아가는 힘을 잃지 않은 앤디와 레드가 포옹하는 장면은 그렇기에 울림을 준다. 좋은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일 역시 바보 같거나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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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예 12년> 역시 자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18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자유인이던 솔로몬 노섭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가 되는 사건을 발단 삼는다. 그와 노예들의 열악한 생활 및 노동 환경을 통해 자유와 그로부터만 존중될 수 있는 인간 존엄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영화가 취한 방식이다. 사회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 자유의 가치가 어디까지 오염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해당 영화가 오직 소극적인 자유의 중요성만 역설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솔로몬 노섭의 명대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난 살아 남고 싶은 게 아니야. 살고 싶은 거지.(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가 그것이다.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남는 것’뿐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온전한 자발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 즉 적극적 자유로의 지난한 여정을 어떻게든 지속하고 싶음을 인상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롬은 ‘진짜 이상이란 자아의 성장과 자유와 행복을 증진하는 목표(p.288)’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너무나 어려운 상황, 즉 소극적인 자유조차 꿈도 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적극적인 자유를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처절한 힘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신의 눈으로 보면 모두 똑같다’라는 대사는 우리가 오래 잊고 있던, 인간 개체에게 주어진 자유의 양은 언제나 동일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소설 <1984> 역시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 대한 묘사로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텍스트이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조지오웰의 상상력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탄생시켰다. 예속되는 것이 곧 자유라는 말은 소극적 자유가 주는 고독감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꽤나 호소력을 지녔을 것이다. 프롬은 도피의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5장에서 ‘익명의 권위는 공공연한 권위보다 효과적(p.184)’이라고 밝힌다.


‘명령 자체와 명령하는 사람이 둘 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반격하려 해도 맞서 싸울 상대와 대상이 없’는 막다른 길과 같은 상황을 야기한다. 빅브라더가 공고한 절대 군주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익명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텔레스크린에서 끝없이 송출되는 방송일 테다. 또한 하층민 노동자들에게 도파민 자극을 줄 수 있는 유흥거리를 소비하게 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것(익명의 권위)은 상식과 과학, 정신건강, 정상성, 여론 등으로 가장하고 있다. 그것은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는 것 같다(p.183)’라는 프롬의 설명에 딱 들어 맞는 설정이다.


일상이자 인공자연이 되어버린 텔레스크린의 방송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점차 퇴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서사 후반, 주인공 윈스턴은 ‘2+2=5’라고 세뇌하는 당에 반해 ‘자유란 둘 더하기 둘이 넷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일기에 적는다. 나아가 둘 더하기 둘이 넷이라고, 다섯이라고, 열이라고 믿는 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조정할 수 있는 사회야 말로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이야기 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지금껏 얻어온 것들, 민주주의의 성취나 인간 평등 사상 등은 끈질기게 지키고 그 달성 여부를 감시하되, 자발성을 충실히 발휘해가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논의를 마무리짓는 7장에서 ‘외적 권위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는 우리의 내적 심리가 자신의 개성을 확립할 수 있는 상태인 경우에만 지속적인 성과가 된다.’라고 밝힌다. 무엇보다 각 개체들이 자아를 버리는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서로를 지지해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은 여섯 장에 거쳐 문제적 상황과 이를 구성하는 우리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을 통해서만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방향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쉬운 것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실재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함께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제시한 다소 추상적이고 극단적이어 보이는 방식을 과감히 수용하는 것만이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던 사회의 병리적 특성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현대 한국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계획경제가 실현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무엇보다 계획경제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독재로 변질되어 버린 사회를 너무도 많이 봐 왔고, 대체 누가 전체를 대변에 계획에 참여할 것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국민의 대변자로 선출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는 바닥에 가깝고, 우리는 프롬의 경고대로 정말 체념밖에 모른 채 모든 상상력을 소진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분명 유효하다. 이것을 인식하고 막혔던 상상력의 틈을 조금씩 벌려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개체다운 개체들의 다채로운 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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