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 그리고 다시 지우고, 버리고 다시 발견하기

글 입력 2024.03.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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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바라보는 회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회화를 본다. 그리고 각자의 안경을 끼고 작품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퇴근하면서 광장에 있는 거대한 설치회화를 보면서 대도시의 익명성에 위로를 받는 사람, 우연히 들른 카페에 전시된 회화 하나를 친구 삼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관객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은 그중에서도 언어와 감정을 다루는 시인이 바라본 회화의 세계, 그리고 화가 이상남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흥미롭다. 과연 가장 작은 언어의 조각들을 다루는 채호기 시인은 이상남의 아이코닉한 작품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에 대해 기대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다. 


 

 

1. 시인 채호기_ 감응: 회화에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힘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채호기가 이상남의 여러 회화 작품을 여러 미술비평이론 및 자신만의 관점을 활용하여 해석하고 받아들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은 채호기와 이상남의 대담이 담겨있는데, 앞부분은 일반적인 흰색 용지로 뒷부분은 파란색 용지로 인쇄되어 그 두 부분을 확실하게 구분 짓고 있다.

 

채호기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해석한 후 이상남과 대담을 진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남과의 대담에 자신의 해석이 영향을 받을까 염려된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채호기는 직업인으로서 이상남의 작품세계를 다루면서도 회화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관람객으로서 자신만의 해석을 하고자 시도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 시인이 이상남의 회화를 읽어내는 하나의 큰 키워드는 바로 ‘감응’이다.

 

“음악은 신체에 직접 작동하여 신체를 바꾼다. 음악이 신체에 파고들면서 때로는 기쁨의 신체로 때로는 슬픔의 신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음악은 기억을 소환하여 그 기억으로써 슬픔의 감성을 불러일으켜나 기쁨의 감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그런데 이상남의 회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회화보다 음악에 한 발짝 더 다가가 회화에서 좀 더 멀어지면서 작동하는 것 같다… 회화의 바깥으로서 음악에 있기. 이를 음악에 빗대어 표상 없는 사유로서의 회화, 즉 감응의 회화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p.45)”

 

감응, 이라는 말은 어렵다. 채호기는 음악을 이용해 감응과 감응으로서의 이상남의 회화를 설명한다. 우리는 대부분 베토벤의 비창을 들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듣더라도 슬퍼질 수 있고, 헬스장에서 흘러나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을 들으면 엉덩이를 흔들며 신 나게 달릴 수 있다. 음악 자체가 우리의 신체에 직접 작용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개인의 기억이나 경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원초적인 에너지.

 

감응은 이처럼 주체 및 자 형성 이전의, 주관과 객관의 구분 이전에 느껴지는 힘을 의미한다. 채호기는 이상남의 회화가 이러한 감응의 회화라고 말한다. 주체와 자아, 그 이전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회화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회화는 감응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채호기는 ‘시와 회화는 표상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예술이다’라며 시와 예술을 표상, 즉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이뤄진 이른바, 주체를 전제해 이뤄지는 예술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회화에서 멀어지면서 이상남은 관람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이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어떠한 에너지를 느끼도록 하는 작품을 만들어냈고, 채호기는 이를 두고 “감응의 회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근현대 예술에서 주체, 자아, 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빠질 수 없고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체의 기억과 경험, 객관과 주관 그 이전에 신체 자체에 직접 작동하는 역동적인 에너지 역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채호기는 새삼스럽게 이상남의 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고 느꼈다.

 

 

 

2. 화가 이상남_ 가는 행위: 버리고 발견하고 버리고 발견하기


 

옛날 부유한 동네 달서구 신당동에서 태어나, 존 레넌이 죽은 다음 해인 81년 뉴욕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화가, 이상남. (굉장히 통속적으로 이상남을 소개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옛날의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80년대의 뉴욕을 상상해보면,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차례 유행했다가 휩쓸려나가고, 또 다른 색다른 무엇인가가 유행을 하고 다시 사라지는 매력과 혼돈의 도시였을 것 같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고 화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상남에게 그 질문이 짓누르듯 커다랗게 다가왔지 않을까.

 

“한국적인 것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미술 쪽에서 동양적인 아이디어는 형식 이는 내용이든 일본이나 중국 쪽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고요나 침묵을 갖고 동양적인 것을 추구한다지만 이제는 그걸로는 부족하고, 현대미술이란 치열한 사고 경쟁에서 어떤 차이를 갖고 어떻게 그들 속에서 나를 전략적으로 낯설게 할 것인가…. 거기서 배운 게 끊임없이 나를 버리면서, 그 과정 중에 드러나는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P.167)”

 

이상남은 ‘현대미술이란 치열한 사고 경쟁’에서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도리어 ‘자신을 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버린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며, 작품에서 구현되었을까.

 

이상남의 작품은 독특하다. 여러 개의 기하학적 형상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색깔들이 화폭 위에 표현되어 있는데 어떤 색이 먼저 칠해진 것이고 그 뒤에 덧칠된 것인지, 혹은 섹션을 나누어서 색칠놀이를 하듯 색을 채워넣은 것인지 구분을 하기 힘들다. 이상남은 이러한 독특한 모습이 ‘갈기’ 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답한다. 색을 칠하고, 기하학적 아이콘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색을 덮고, 그 색을 사포로 갈아내기.

 

“‘갈아내서 드러내는 거구나’라고 이해하기보다 이미 그려놓은 것들을 다 지웠다가 어떤 갈아내는 행위로 뭔가가 툭툭 튀어 오르는 거죠. 그 부분이 상당히 매력적인 거예요. 돌을 쪼개면서 어떤 것들은 예상하지만,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을 얻어내는 식으로.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려내고 지워버린다는 것. 그리고 갈아내고, 그러면 또 드러나고, 그리고 부분을 갈아내고 또 지워버리고…. 계속해서 지우고, 그리고 지우고, 마치 기억이나 우리가 알고 있었던 걸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P.200)”

 

이상남은 앞서 뉴욕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그 과정 중에 드러나는 나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그리고 갈아 지워내고, 다시 그리고, 갈아내고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분명 앞서 그린 형상들이 다시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을 얻어내는’ 것. 그 과정에서 ‘기억이나 알고 있었던 것’들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끊임없이 새로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앞서 채호기는 이상남의 회화를 ‘감응의 회화’ 로 받아들였다. 주체 이전에, 주관과 객관 이전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에너지. 이상남이 이같이 감응의 회화를 통해 관람객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갈아내기’ 를 통해 작가 자신 역시도 버리고 다시 발견해내는 과정을 반복해서 아니었을까.

 

 

 

3. 관람객으로서의 나_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페로탕 서울에서 열린 이상남의 개인전 [Forme d 'Esprit (마음의 형태)]에 다녀왔다. 간결하고도 화려한 전시관에 조금은 주눅이 든 채로 작품들을 구경했다. 프레임이 끼워져있지 않은 작품이 작품 접근 표시 선도 없이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사실 나는 감응을 느끼거나 주체를 잊지는 못했다. 그 대신 이상남과 채호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세상 속에서 물아일체를 경험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싯다르타, 보리수나무 아래 빛나는 황금빛 어깨를 가진 아름다운 싯다르타를.

 

자아가 비대해진 사회, 라고 흔히들 말한다. SNS의 발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모두 쉬워졌고,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애증과 애정이 뒤섞여 점점 자아가 확대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앞서 말했듯 정체성 담론과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중요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때론, 이처럼 비대한 자아 속에서만 고립되고 좌초되어 어느 때보다도 오히려 외로운 세계 속의 개인이 되기 쉬운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형상 위에 색을 덧칠하고 갈아내어 형상을 드러내기. 주체 이전의 직관으로 원시적 에너지를 발견하기. 나 자신을 버리고 다시 탄생시키기.

 

실은 이상남의 그림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갈아낸 거지’라는 의뭉스러운 느낌만 받은 채 돌아왔지만, 스스로 비대한 자아가 부대끼듯 느껴지는 날이면 이런 전시회를 홀로 찾아가, 마치 뉴욕의 작업실에서 무한히 사포질하며 자신을 버렸던 이상남처럼, 오랫동안 이상남의 작품을 눈여겨보며 감응을 느꼈던 채호기처럼 나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듯 버리고 조금은 담백해진 자신을 발견해 줍는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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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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