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붙잡을 수 없는 피터 팬과 빛바랜 여름날에 대하여 - 슬픔에 이름 붙이기

글 입력 2024.06.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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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 절대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언어가 그렇다. 언어는 특히 ‘감정’을 표현할 때 그 한계가 두드러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단어로만 갈무리하기에 감정은 너무도 다채롭고 혼란스럽다. 표현하면 할수록 손으로 꽉 쥔 모래알들처럼 새어 나간다.

 

“단어는 실재를 단순화시키는 효과가 정말 커서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디테일이 누락되는지 놓치기 쉽다. (중략) 물론 누군가와 맺게 된 관계는 친밀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랑’인가? 당신의 작품은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예술’인가?” (p.293-294)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이러한 언어적 한계를 메워보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작가는 “말로 표현하려고 하자마자 곤죽이 되어버리는” 감정을 ‘세이피시’(p.95)로, “언어의 팔레트가 머릿속 색깔을 구현해내지 못하리라는 좌절감”을 ‘헴조드’(p.249)로 성문화하며, 세계의 빈틈에 회반죽을 덮는다. 이것들은 독자에게서 억지로 봉인해 둔 기억을 되살리게 하고, 별생각 없이 흘려보낸 감정을 반짝이게 한다.

 

물론 개개인의 경험은 다르고,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폭도 상이하다. 하여 감정 언어의 정의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든 ‘되살아났다’는 사실만은 자명하다. 이에 나는 저자가 내린 단어의 ‘정의’에만 매몰되기보다는, 에세이가 끌어올린 내 이야기를 포착하는 데 집중해 보려고 한다.

 

 

슬픔 2.jpg

 

 

 

현실과 이상 세계 사이에서 균형 잡기


 

너랑 있으면 매일이 기념일 같아. H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돈 없는 대학생 시절, 휴일이면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마구 흔들리면서도 행복했다. 소극장 1열에 앉아 관극하다 배우에게 지목받는 날이면 그 사실을 놀림거리로 삼으며 종일 시시덕댔다. 별안간 떠난 영종도에서 하얀 길을 쭉 따라 걸으면서는 ‘좋다’와 같은 1차원적 단어만 주고받으면서도 거기 함축된 수많은 감정을 느껴 벅차올랐다. 제주에서는 낮은 돌담을 쌓았고,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빌었다. 그럴 때면 산타를 믿고, 마법을 믿고, 귀신을 믿는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피터 팬의 손을 잡고 모두가 잠든 고유하고 사적인 세계에서 황홀하게 유영하는 듯했다.

 

물론 휴일이 끝나면 그런 시간은 여지없이 닫혔다. 우리는 각자의 학교로,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휴일의 여독은 오래도록 남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완수해 낼 때면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둘만의 황홀한 순간으로 회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저자는 이렇게 현실과 꿈 같은 이상 속에서 헤매는 감정을 ‘오즈유리’(p.37)로 명명했다. 도로시는 오즈의 세계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과 다음 없이 등교하고 농장 일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도로시가 불쑥 ‘오즈의 세계’에서의 기억을 상기할 때가 있으리라 본다. 종종 그에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혼돈을 느끼리란 것이다. 여기서 줄곧 피터 팬 증후군에 시달리지만, 현실을 살아내야만 하는 내 상황이 연상됐다.

 

사람에 따라 '이상의 세계'와 같은 대상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겐 좋아하는 가수일 수도 있다. 콘서트장에 있는 동안은 오즈의 나라에 떨어진 듯한 황홀경에 젖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애인과 현실을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일 수도, 누군가는 해외여행에 가 있는 순간일 수도, 누군가는 영화 속에 푹 빠져 공상에 잠기는 순간일 수도 있다. 물론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상 세계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켜야 한다. 저자가 ‘리알토스쿠로’(p.279)라고 명명한, 영화에 몰입해 있다가 관람이 끝나면 어두운 상영관 밖으로 걸어 나오며 ‘짜릿한 시차증’을 느끼는 그 순간처럼. 그럴 때면 현실이 가혹하게 느껴지거나 그러한 시차에 영영 적응되지 않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건너온 오즈의 세계가 있다. 저자는 오즈의 세계가 혼란스러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그립게 하기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 기름칠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외줄타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더욱이 오즈유리라는 단어의 존재를 떠올리면 위로가 될 것이다. 어쩐지 이러한 혼란은 보편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

 

 


강렬한 처음의 기억


 

“당신의 과거를 재생시켜 드립니다.” SNS에서 그런 표제를 단 영상을 봤다. 어릴 적 한 번쯤 경험했겠지만, 망각했을 법한 일들을 아카이빙하는 곳이었다. 댓글에서는 모두가 추억에 잠겼고 먹먹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싱숭생숭하고 멜랑꼴리해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어 영상을 껐다. 그 시절을 종종 추억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철렁하는 그 감각이 싫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첫사랑 이야기가 지독히도 싫다.

 

그런데 “강렬한 처음의 기억에 다시금 전율하고 싶은 감정”을 뜻하는 ‘유이’(p. 239)의 에세이를 읽으면서는 꾹 눌러 삼킨 그 시절의 기억을 하릴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면 당신은 오후를 거의 한 주만큼이나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다. 그게 뭐가 됐든 당신은 그것을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려고 애썼다. 심지어 저녁이 되어 가로등이 켜지고 어둠 속에서 벌써 당신을 집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도.” (p.240)

 

거기에는 땅거미가 졌을 때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농구장이 있고, 푹푹 찌는 여름의 풀냄새와 매미 소리가 있다. 처음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 사이에서 우정인가, 사랑인가를 가늠하던 내가 있다. 아지트 삼던 아파트 지하, 인적 드문 엘리베이터 앞에서 “성인이 되어도 너랑 잘 지낼 거야” 하던 네가 있다. 글을 쓰는 내게 빼빼로 대신 하얀 펜과 검은 색지 노트를 선물했던 네가 있다. 지각해서 청소해야 하는 날이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까지 바래다주던 네가 있다. 들어가기 아쉬워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운동장을 돌다가 수위 아저씨에게 꾸중 듣던 우리가 있다. 한 번 안아봐도 돼? 하면서 뒤에서 끌어안을 때 전해지던 떨림이 있고 쑥스러움을 감추며 까르르 웃던 내가 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포박된 기억들이 선연해졌다. “당신의 감정의 만화경은 하루 종일 격렬히 회전했고, 그 이미지들은 모조리 다 강렬했다. 당신은 얼간이처럼 울부짖거나 울거나 히죽거리며 걸어 다닐 수 있었다”라는 구절처럼.

 

그러나 그 강렬한 기억은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찾아오는 통증처럼 간헐적으로 욱신거렸다. 그렇게 앓는 날이면 다 지난 그 시절의 꿈을 꿨다. 그간 인사 없이 지나쳤던 네게 인사를 건넸고, 상처를 주던 순간으로 돌아가 연신 미안하다고 읊조렸다. 그렇게 화해하면서 해방감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꿈에서 깨어났고, 현실과의 낙차를 느끼며 멍해졌다. “실감 나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사랑이 다시 식어버리고 현실로 복귀해야만” 하는 ‘킥드롭’(p.43)을 겪었다. 하여 내게 그 시절의 감정은 완독하지 못했으나 누군가 고의로 뒷부분을 손상하여, 영영 결말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남았다.

 

그러나 ‘현재’는 강렬했던 그 시절과 감정의 역치가 다르다는 저자의 전언처럼, 다시 책장을 펼치더라도 그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빛바래고 찢긴 그 자체로 보존할 때야, 다시 들추지 않을 때야 그 가치가 빛날지도 모른다.

 

   

 

마치며


 

책을 읽으며 이상의 세계를 꿈꾸면서도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만 하는 현실의 쓴맛을 봤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향수에 젖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엑스트라로 여기리라”는 ‘산더’(p.147) 등의 단어를 읽으면서 존재론적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현재를 더욱 잘 꾸리고 싶은 욕구를, 옆에 머물러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동시에 하루하루의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움켜쥐며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저자가 그랬듯, 슬픔을 음미하고 글로써 가시화한다면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한다면 그가 ‘루이스 어드라크’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실천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이 망가지거나 배신당하거나 버려지거나 상처받거나 죽을 뻔하는 일이 생길 때면 사과나무 옆에 앉아서 주위에 사과가 무더기로 떨어지며 달콤함을 낭비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자신은 그것을 최대한 많이 맛보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루이스 어드라크 (p.106)

 

이도 저도 못 하는 지금의 내 처지를 비관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만 갇혀있지 말고 나름의 의미를, 행복을 찾으라는 것. 슬픔에 잠식되기보다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는 것. 당장 눈앞의 닥친 현실이 버거워서 오늘의, 지금의, 내 옆 누군가의 소중함을 잊게 될 때, 좀 더 감정을 음미하며 밀도 있게 살아내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들 것을 추천한다.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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