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최대한 상냥한 오해의 실종 - 연극 '실종법칙'

글 입력 2024.04.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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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실종법칙'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뚜렷이 없어진 것들의 힘


 

'있음'보다는 '없음'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는 편이다. 어불성설이다 싶을 수도 있겠다. 없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어떻게 존재감을 느끼는가, 하고. 하지만 보편적인 감각이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즐겨 입던 옷에서 어느 순간 떨어져나가 끝끝내 잃어버리게 된 단추, 그것이 만들어 낸 거슬리는 공백 같은 것.

 

완벽히 다물리지 않는 외투의 앞섬은, 기껏해야 손톱만한 단추가 여태 제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새삼 떠올려보지 않았을 사실들에 대해. 이처럼 항상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익숙한 존재들은 뜻밖의 순간에 부재하며 강력한 의식적 환기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게 강력한 '없음'의 힘을 빌려서라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그런 '선명한 부재'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작품이 있다. 연극 '실종법칙'이다.

 

 

실종법칙 포스터.jpg

 


 

"네가 OO에 대해 뭘 아는데?"


 

 

 대기업에서 승진을 앞둔 유진. 그녀가 휴대폰을 꺼놓고 행방 불명된 지 24시간이 지났다. 유진의 언니 유영은 유진의 오래된 남자친구 민우를 의심한다. 평소 민우에 대해 꺼림칙한 느낌을 가졌고 실종되기 하루 전날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유진의 고백을 들었기 때문이다. 민우의 범죄에 대해 강한 심증을 가진 유영은 민우의 자취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해가 들지 않는 눅눅하고 컴컴한 민우의 반지하 방. 그곳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날 선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진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연극 '실종법칙' 공식 소개문

 

 

포스터 속 문구에서부터 나타나듯 '미스터리 추리극'을 표방하고 있는 '실종법칙'. 시놉시스를 살펴보면 곳곳에서 정통적인 추적 스릴러의 분위기가 풍긴다. 한 사람의 실종을 매개로 숨겨진 진실들이 줄줄이 딸려나온다는 식의 전개는 사실 추리 장르에서는 꽤 전형적인 도식이다. 개인적으로 해당 장르를 즐겨 보는 터라, 극을 보기 전 소개 문구를 읽으면서 혼자 예상해 본 전개도 다음과 같았다. '유영'과 '민우'가 함께 '유진'의 흔적을 파헤치면서, 그 흔적들이 가리키는 어떤 한 방향을 뒤쫓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막이 오르자 처음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극은 진실을 모은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실을 모든 방향으로 흩어 놓고 있었다. 번복되는 인물들의 진술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대체 유진의 행방이 어쨌다는 거야? 작품이 처음의 의도를 망각한 것일까? 결과적으로 그건 아니었다. 그런 흩어놓음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요소들이 극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중 가장 눈에 띄던 것은 바로 2인극 형식의 구성. '실종법칙'에 필요한 배역은 유영과 민우 딱 둘뿐이다. 유진의 실종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지만 정작 유진은 극중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라진 그녀의 정체에 대해 관객은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오직 그녀의 언니, 그녀의 남자친구에 의한 진술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타인의 해석 안에서만 나타나는 유진. 이 묘한 사실은 다음의 대사와 함께 생각했을 때 더욱 심오해진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극 초반에 등장하는 유영의 대사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이다.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토씨 하나 정도는 틀릴 수도 있다. 꽤 초장에 던져진 말인데다 워낙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라 실은 지나가듯 언급되는 대사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흔한 한 마디에, 극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가 담겨있음을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앞서 짚어봤던 유진의 독특한 극중 존재방식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 조금 풀어볼까 한다.

 

 

실종법칙 컨셉사진.jpg

 

 

우선 이 대사가 던져진 맥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앞서 시놉시스에서 보았듯 유영은 변변찮은 배경을 가진 민우를 못마땅히 여겨왔다. 동생의 행방을 묻기 위해 민우를 찾았지만, 유영은 심문을 가장한 각종 비난을 민우에게 쏟아낸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동생이 어정쩡한 소설가 지망생인 너를 뒷바라지 해주던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런 네 존재에 지쳐서 동생이 사라진 것 아니냐고. 아니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지쳤음을 선언한 유진을 민우가 납득하지 못해서, 동생을 해코지한 건 아니냐고.

 

민우는 그런 유영에 대해 그녀의 (약점이 될 만한)특징 몇 가지를 지적하며 반격하고, 저 대사는 그런 민우의 반격에 맞서 유영이 반사적으로 뱉은 말이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다시 말해, 네가 아는 겨우 그 몇 가지의 사실이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설명해줄 수 있는데. 조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다. 저 상황에서 역으로 민우가 그 말 그대로를 뱉어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의 주관적 사실들로 상대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건 유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비단 유영과 민우와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실종법칙'에서는 유진이 두 사람의 해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두 사람은, 유진을 바라볼 때 역시 위와 같은 편협한 태도를 취한다. 동생으로서의, 여자친구로서의 유진이 각각 유영과 민우에게 보여주던 일면들. 유영과 민우는 자신이 본 유진의 면모들이 곧 유진의 모든 것이라 믿은 채 나머지 조각들을 끼워맞추고,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해낸 진실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는 곧 네가 유진에 대해 뭘 아는데, 로 변모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가 오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영과 민우. 유진에 얽힌 새로운 사실들이 서로에 의해 밝혀질 때마다 둘은 상대의 '유진'에 계속해서 흠집을 낸다. 그 이유인 즉슨, 유진의 실종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의심을 스스로 잠재우기 위해서다.  자신의 행동을 덮어두기 위한, 혹은 차마 덮어두지 못하고 발각된 과거의 언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물들의 말은 점점 더 억지스러워진다.

 

그런데 계속 대립하던 유영과 민우가 순간 합의점을 찾은 듯한 순간이 극 중간중간 나타난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잠시 느슨해지는 순간들, 그건 바로 곧 이 실종 사건의 귀책을 유진에게 돌리는 순간이다. 걔는 원래 그런 애야, 걔는 그 정도로 상처 입을 애가 아니야. 오해와 합리화가 겹겹이 쌓여가며 유진이라는 인물의 정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렇게, 실종되었던 유진은 한 번 더 실종되고 만다.

 

 

 

최대한 상냥한 오해


 실종법칙 컨셉사진2.jpg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주는 것보다 받아야 할 것이 더 많은 셈이다. 관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김연수, '시절일기' 중에서

 

 

요즘 유독 상호 간의 이해가 애초에 성립 가능한 것인가를 되묻는 작품들을 많이 마주하는 듯하다. 하나의 '진실'이 있음을 가정하던 예전의 기조에서 점점 그런 진실 자체의 모호함을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해와 진실 성립의 가능성을 회의하는 이야기들이 많아지는 건 어째서일까. 한 존재는 너무나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구성물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이기는 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역사가 있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타인은 그 역사의 결과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과. 그러니까 결과다. 우리가 서로에게 타인으로 존재하는 이상, 아무리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이일지라도 그의 모든 '과정'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상대는 알아주기를 바랐으나 차마 나의 지각이 그곳에 닿지 못하거나, 이해 가능한 형태로 상대에게 나의 일부를 드러내는 일 자체에 실패하거나, 어떤 부분은 애초에 서로 드러내지 않기를 원하거나.... 우리는 갖은 이유로 온전한 이해에 실패한다. 슬프지만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가 슬픔을 넘어 공포의 성질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노력 자체를 놓아버리고, 진실의 모호함을 핑계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오해만을 쌓아갈 때다. '실종법칙'의 섬뜩한 결말은 그런 오해가 기어코 닿게 될 지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극에서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늘어나다 못해 가득한 세상에서는 나 역시 이해받지 못할 것이 자명하고, 그렇게 끝끝내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은 결국 내 안에서마저 죽어가기 마련이므로.

 

결코 진실에 온전히 가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오해가 최대한 상냥한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나는 가장 무섭다.

 

 

 

황수빈.jpg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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