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 헌사-조사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글 입력 2024.06.0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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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집 가까운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계절이다. 물빛이 하늘색. 하늘도 하늘색.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쉬웠던 것이 어제 같은데, 건너편 강둑이 어린 숲처럼 보인다고 했더니, 이제는 짙푸른 녹음이 우거져 한낮의 피난처가 되어 준다. 까치가 툭 날더니 이내 풀밭에 다시 앉는다. 총총 작은 들꽃을 헤치는 걸음이 사랑스럽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푸르게 생명력을 뿜어내고, 걸음걸음 풀 향이 풍기고, 후터분한 공기 중에 그늘에서 부는 한 줄 서늘한 바람이 반가운 계절. 이맘때가 되면 잎이 화면 가득 산들산들 흔들리고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장면을 보고 싶어진다. 여름 냄새가 나는 많은 영화 중에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꺼내 보았다.

 

이 영화의 1장, “첫사랑, 요시코 (First Love, Yoshiko)”는 정적인 흑백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보이는 것은 카페처럼 보이는 공간의 전경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모습은 애정 어린 손길을 짐작게 한다.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깔끔한 차림을 한 노인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고,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웅성이는 대화 소리와 잔잔한 피아노곡, 간간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시야만큼 정적으로 귓전을 채운다. 어느 점에도 특별히 집중하지 않고 작은 공간 안에 고인 듯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관조하는 이 픽스 쇼트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진다. 대화하며 흔들리는 몸짓들, 산들 부는 바람에 살짝 떠오르는 일력 앞장,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곧이어 자리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주인공의 바스트 쇼트가 나타나고, 다큐멘터리 인터뷰를 연상시키는 화면이 이어진다. 노부부가 살아온 세월에 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듣는 바스트 쇼트가 쭉 이어진다.

 

관객은 후에 주인공이 일본 고조시를 배경으로 작품을 촬영하러 온 한국인 영화감독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고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일어도 인사말 몇 마디를 더듬더듬하는 정도이다. 고조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몇 사람이 길을 안내하고, 일어를 할 줄 아는 조감독이 소통을 중개하는 것에 의지해서 고조에서 영화가 될 이야기를 찾는 것이 1장의 내용이다.

 

그게 전부이다. 그는 그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조를 산책하는 사람처럼 걸어 다니며, 목적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들려오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이야기는 더디게 도착한다. 무더위를 헤치며 끝없이 걷는다. 마주친 사람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십사 양해를 구한다.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 문장이 맺어진다. 그리고 그다지 성실하진 못한 통역을 거치고 나서야 몇 개의 문장의 의미가 그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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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다림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1장에서 특징적인 것은 롱 쇼트나 익스트림 롱 쇼트로 저 멀리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오는 인물들이 시야 가까이 다가오기를, 그리고 카메라를 지나쳐 계속 걸어가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이미지의 반복이다. 그런 장면에서 관객은 인적이 드문 고조의 길을 오래도록 마주하게 된다. 산책자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화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된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고조의 조용한 공간에 잠든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런 공간들을 응시하게 만드는 여백의 시간이 남겨진 것을 돌이켜보게 만든다. 눈길 닿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발걸음하길 기다리는 묘지 같은 삶의 영역이 숨죽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노인의 첫사랑이 어린 날의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찾아주길 기다렸노라 말했듯, 떠올리면 불꽃처럼 삶의 한순간을 환히 밝혀줄 기억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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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마지막, 알록달록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와 함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된다. 2장 “벚꽃우물 (Well of Sakura)”은 싱그러운 여름의 색으로 채워진다. 시간이 고인 것처럼 보였던 고조의 공간이 지금 새롭게 생겨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팔로우 쇼트의 움직임으로 새롭게 생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은 여태 기다림 끝에 마주친 이야기들이 2장의 이야기에 생을 부여함을 줄곧 느끼게 된다.

 

아마 1장에서의 답사를 통해 극 중 감독은 2장과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앞에서 사람들이 들려준 고조에 묻힌 기억, 그걸 마주치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나누었던 말들, 기다림의 주체가 되기도 했던 공간들이 2장에서 새로운 리듬을 얻는다. 인물의 내면을 짐작하게 만드는 사연이 되고, 이제 막 다리가 놓인 관계를 윤활하는 재치 있는 대사가 되며, 타자가 조우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사건을 떠받치는 무대가 되어 흑백이었던 언어들은 반짝이는 색채를 얻는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을 이유 중 한 가지를 떠올렸다. 삶 가까이 맴도는 어떤 영화들은 잊힌 묘지처럼 남겨진 사소한 기억에 바치는 헌사이자 조사(弔詞)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바라본다. 익숙한 불꽃의 조각을 알아보며 누군가는 삶이 좋은 영화, 한 편의 훌륭한 이야기와 닮은 꼴이 되어갈 것이라고 감히 믿어볼 수 있다.

 

이번 여름에도 작은 기억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조용히 고여 있던 이야기를 다시 반갑게 마주 보는 특별한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을 기약하게 만드는 영화로 가까이 다가온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다. 반가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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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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