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토록 보통의' 사랑을 정의하기 [만화]

글 입력 2021.02.1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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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캐롯 작가 블로그


 

*

<이토록 보통의> 에피소드 중

'너의 서른 번째 조각'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웹툰을 즐겨보지 않지만 수십 개가 넘는 웹툰들을 하루 일과처럼 탐독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웹툰 플랫폼이 많지 않을 때, 고작해야 네이버와 다음, 레진코믹스 정도만 존재하고 있을 때엔 거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웹툰마다의 세계관에 푹 빠져 일종의 현실 도피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작품들 중에서 마음 깊이 아끼는 것들이 몇 있었다. 그 작품들은 현실 도피 대신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주곤 했다. 캐롯 작가의 <이토록 보통의>는 그 중 하나였다.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는 <이토록 보통의>는 긴 호흡의 단편이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보통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약간의 장애물을 둔다. 전 남자친구가 HIV 보균자였다는 이야기, 복제로봇과의 사랑, 매력적인 불행을 지어내는 허언증, 불륜, 에이로맨틱 등의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이 장애물을 맞닥뜨린 인물들은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의 비밀을 털어놓아도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사랑이 존재할까?’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달라도 이 사랑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도 전달된다.


어디까지나 픽션이기에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다가도 주인공들의 관계와 갈등을 마주하고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 속에서 내 안의 결핍과 자기 혐오, 질투, 연민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작가가 써 내려간 세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면 어느새 나는 에피소드 속 인물들이 되어있었다. 한 인물이 되어 다른 인물을 욕하고, 이해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인물에 공감했다.

 

세상에 절대 선과 악이 없듯이, 인물의 서사를 이해하고 나면 언제나 그 누구도 욕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이 이야기가 너무도 현실을 빼닮아서, 그게 좋았다.

 

 


너의 서른 번째 조각



이 작품에서 다루는 모든 이야기를 아끼지만,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에피소드를 고른다면 ‘너의 서른 번째 조각’이다.


‘너의 서른 번째 조각’은 정신질환 치료 모임에서 만난 은재와 D의 이야기다. 은재는 사람들에게 상냥하지만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D를 경계했다. 뼛속까지 자기만 알아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은재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D와 친해지고 은재는 그를 점점 좋아하게 된다. 그도 은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에이로맨틱(aromantic allosexual)이라는 걸 밝히기 전까지는.


에이로맨틱은 무연정(無戀情),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외로움을 타고 성욕도 느끼지만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은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D와 있는 것이 편했고 즐거웠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그와 만나기로 한다. 둘은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길 나누며 평범한 연인처럼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가도 문득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던가, 은재를 사랑해 줄 다른 사람을 만나라는 말에 은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워진다. 내가 놓으면 놓아질 관계. 그의 말에 어떠한 적의도, 상처를 주려는 마음도 없이 오히려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를 탓하고 미워할 수도 없다.

 

지친 은재는 D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만 D를 잊지 못하고 그와 다시 만난다. 달라진 게 있다면, D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 그래서 그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하게 살았냐고? 아니다. 둘은 보통의 연애를 하다가 마음이 식었다는 흔한 이유로 이별한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에이로맨틱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보편적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작가가 둔 장애물 앞에서 의심하고 상처를 주고 받다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은재와 D의 서사를 지나고 나면 어느새 알게 된다. 결국 그것도 보통의 연애였다는 것을.


진심이 아닌데도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시작된 가벼운 연애나 처음의 설렘이 다 사그라들고 의무감만 남아버린 관계. 외로우니까, 이미 자신에게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대방을 끊어내기 두려워서 외면해버리고 마는 그런 관계. 이런 것들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겪어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은재처럼, 누군가는 D처럼.


그럼 은재와 D의 연애도 사랑이 아니냐고?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는다. 대신 은재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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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보통의> 96화. 너의 서른 번째 조각(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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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보통의> 95화. 너의 서른 번째 조각(23)

 

 

나는 항상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의 사랑이 지날 때마다 그 정의는 매번 달라졌다. 불안정한 사랑의 정의에 따라 내 감정을 의심하고 판단하고 자주 단념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의 관계들을 떠올려보면 이 정의가 꼭 필요할까.


"그저 함께 있고 싶고, 어떤 의미로든 서로를 원하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관념이 달라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면 더 근사한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 그것을 사과 파이라고 부르기로 한 은재처럼. 정말 중요한 건 너무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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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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