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한한 건반으로 행복을 연주했어 [사람]

글 입력 2021.02.1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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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아직 낯선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만을 띠고 있을 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여러분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인생 영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이 한순간 테이프를 빨리 감은 듯 스르륵 지나간다. 사실 질문을 받은 당시에 어떤 영화로 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 순간에 떠오른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하나만 결정하기 어려워하면서 인상 깊게 본 영화 제목들을 나열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질문을 다시 받는 날이 온다면 난 이 영화를 이야기할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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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영화의 놀라운 원작



1998년에 제작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한국에서 2002년에 개봉했고, 2020년 1월 재개봉한 작품이다. 영어 제목은 'The Legend of 1900'으로 1900에 대한 전설을 다룬다. 제목이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아니스트 이름이 1900(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이 작품의 평점을 찾아보면 놀랍도록 높은 숫자를 보게 된다. <시네마 천국>으로 이미 한차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세계적인 음악 감독 '엔니오 모리코네'가 다시 함께한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은 예상 가능한 평가일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전작을 사랑했던 관객들의 작품에 대한 신뢰를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으로 화답한다.


놀라운 점은 영화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노베첸토'는 이탈리아어로 20세기를 뜻한다)이다. 책의 시작 부분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을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뜻대로 <노베첸토>는 책에서 멈추지 않고 이후 영화, 공연으로 제작되었다.

 

*


작품은 트럼펫 연주자 맥스 투니(책에서는 '팀 투니')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나인틴 헌드레드(책에서는 '노베첸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천재 피아니스트이며 오직 버지니아호에 오른 승객들만이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배 위에서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한 번도 배에서 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고국이나 생년월일, 가족도 없다. 배에서 그를 찾아 키워준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의 성장과정에 오래 함께 하지는 못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배 위에 '살아'있었지만 문서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는 기록상 태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배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처음엔 믿지 못한다. 육지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다는 건 육지에서 잠시 배에 올라탄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배에서만 생활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세상 이곳저곳을 가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몸은 육지로 가본 적이 없지만,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매번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다닌다.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배에서 만난 누군가의 눈과 말 속에서 사람들이 가진 흔적, 소리, 냄새를 포착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능력이 있다. 육지에 발을 내딛지 않고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배웠다.

 

제목 그대로 '피아니스트'에 대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전설적인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배 위에서 실제로 만나보지 않고 그의 실존 여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야기 속에서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정말 살아있는 존재였고 마치 모차르트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천재성을 지닌 피아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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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91페이지에 담긴 놀라운 이야기



영화를 인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원작 소설의 존재를 알았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음악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즐거움이 많은 작품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감각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도서로는 어떻게 내용을 표현할지 알고 싶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처음 책을 찾았을 때 짧게 '아?'하는 소리를 냈다. 영화 러닝타임이 2시간 넘는 다른 영화의 원작 소설 두께가 평균적으로 엄지손가락 가로 길이는 되었기 때문에, <노베첸토> 또한 자연스레 대략 200페이지 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찾은 청구 기호를 등에 붙인 책은 두께가 겨우 1cm 정도로 보였다.

 

그렇다. 영화의 원작 <노베첸토>는 이야기 앞뒤 '작품 소개'와 '옮긴이 해설'을 포함해도 91페이지뿐인 책이다. 2시간 분량의 영화가 91페이지에 담긴 이야기에서 재탄생한 것이었다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원작 소설을 읽어내려가다 보니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길이는 짧지만 내용의 깊이는 한 편의 영화로 제작하기에 충분했다.

 

원작자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작품 중 처음 접한 것이 <노베첸토>였는데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졌음에도 책을 읽은 후에 내용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의 인생을 피아노 연주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주인공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영화) 종이 위의 글에서 눈에 보이는 실체로



91페이지에 담긴 내용이 영화화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그리고 음악감독 '엔니오 모리코네' 또한 대단했다. 글은 '공연'을 하기에 적합한 구성이었고 실제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책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한 문장으로 끝나는 장면을 실제 음악과 연주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책 <노베첸토>에서 작가가 시작하는 페이지에 적었듯이 처음부터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와 배우의 연기는 극 상에서 분리되어 있다.

 

 

(오디오에서 네 개의 손으로 연주하는 것 같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가 흘러나온다. 30분을 넘지 않는다. 매우 강렬한 코드 진행으로 마무리된다. 배우는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

 

도서 <노베첸토>, 본문 57쪽
   

 

배우가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작가의 판단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리된 영역을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현실감 있는 연주 장면을 구현하였다. 글로 표현된 장면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는 탁월하게 만들어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배우 팀 로스가 꾸준한 연습을 통한 천재 피아니스트 연기를 선보였다.


  
난 거대한 검은색 비누처럼 미끄러지는 피아노를 꼭 붙잡았고...... 절정으로 치닫는 폭풍 속에서 -근사한 비누의- 의자에 앉아 있는 이 미친 사람까지 가세해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건반 위의 손은 안정적이었다.

 

도서 <노베첸토>, 본문 39쪽
  

 

영상으로의 구현이 가장 빛을 발한 건 아직 배 위 생활이 어색한 선상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 맥스 투니(팀 투니)와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가 폭풍우 치는 날, 움직이는 피아노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거친 풍랑으로 흔들리는 배의 모습과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의 화려하고 경쾌한 피아노 연주가 대비되며 유쾌하고 신나는 장면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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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영화를 더 빛나게 하는 환상적인 연주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음악 감독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 OST이다.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니오 모리코네'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시네마 천국> 외에도 생전 수차례 함께 작업하였다.

 

사실 우연히 엔니오 모리코네 피아노 연주곡집에서 이 영화의 대표곡 'Playing Love'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현재까지 이 영화를 알지 못했지도 모른다. 나에게 <피아니스트의 전설> OST는 아름다운 영화의 존재를 알게 해줬고,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생 영화를 만나게 해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은 중대하다. 영화를 본 후 책을 읽을 때에도 자연스레 음악이 들릴 만큼 <피아니스트의 전설>에서만큼은 음악이 '필수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가 배 위에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과정에서 각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음악으로 표현하였고, 환호하는 관객 없이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대사 대신 주인공의 마음을 전달했다.

 

영화를 알게 한 음악 'Playing Love'가 등장하는 장면은 사실 <노베첸토>의 내용 흐름에서는 찾을 수 없고 <피아니스트의 전설>에만 존재한다. 배에 살면서 많은 오가는 사람들을 만난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이지만 그가 특별한 관심을 보인 사람은 이 곡의 주인공, 이름 모를 소녀 한 명뿐이다. 'Playing Love'는 1900(노베첸토)가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이 담겨 있는 곡이자 전체 영화의 흐름을 관통하는 곡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OST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듯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 작품을 통해 제57회 골든 글로브 오리지널 스코어상과 제44회 다비드 디 도나텔로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배 위에서 전설이 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의 전설>과 <노베첸토>의 주된 배경은 배이다. 독백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맥스(팀 투니)는 6년 동안 배에 머물렀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배 위에서 보낸 시간을 추억했다. 그가 육지에 내려온 건 배 생활이 싫었기 때문이 아니다. 바다 위에서 트럼펫만 연주하며 살다가는 남은 인생을 이방인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었다. 배 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새롭고 뜻깊은 경험이었지만 평생을 보낼 방법은 아니었다. 배는 계속 한없이 넓은 바다를 떠다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맺은 관계들은 일시적인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일생 중에 시간을 잠시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평소보다 자유로울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털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떠난다. 배에 올라탄 많은 승객이 그러했고 6년을 함께 한 맥스(팀) 또한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에게는 마찬가지다. 맥스(팀 투니)가 배를 떠난다고 말한 날.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언젠가 이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좋겠어." 노베첸토에게 말했다. 그는 이해했다. 영원히 내가 그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을 보지 않기를 바랐던 게 눈에 훤했지만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나았다.

 

도서 <노베첸토>, 본문 70~71쪽

  


태어나서 오직 배에서만 지낸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가 육지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땅에 살았던 기억과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과 무척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육지에 무언가 남겨둔 사람들은 배에서의 생활이 일시적이며 언젠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배만이' 그가 있을 곳이라고 인식한다. 그곳이 그가 살아온 세상이고 자신이 받아들인 세상의 전부이다.

 

살면서 한 번도 땅을 밟아보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슬프다. 하지만 그가 비운의 삶을 살았다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배 위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던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와 맥스(팀 투니)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는 시간이 지나도 나의 마음속에 남아 다시 그와 그의 음악을 찾게 한다.

 

이 작품이 처음부터 공연을 위해 만들어졌던 만큼 한국에서도 동명의 연극 <노베첸토>로 제작되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임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실제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피아니스트가 노베첸토(나인틴 헌드레드) 역할을 연기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연극 <노베첸토>를 직접 보지 못했다. 영화, 도서 그리고 연극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육지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나인틴 헌드레드(노베첸토)의 대사를 가슴에 새겨본다.

 

 

Take a piano. The keys begin, the keys end.

You know there are 88 of them and nobody can tell you any different.

They are not infinite, you are infinite.

And on those keys the music that you can make is infinite.

I like that. That I can live by.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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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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