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Revenge of a man : 녹터널 애니멀스 [영화]

아내의 배신은 남편의 소설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글 입력 2021.01.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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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관장 수잔은 한 택배를 받는다. 택배를 보낸 주인은 꽤나 오래전에 헤어졌던 전남편 에드워드였다. 작가였던 에드워드는 그가 직접 쓴 소설 제목을 '녹터널 애니멀스'라고 짓고, 발문에는 수잔에게 글을 바친다고 전했다. 현재 수잔에게는 새로운 남편이 있고, 이혼하고 나서 한 번도 왕래가 없던 전 남편이 온 에너지가 깃들어야 나오는 집필을 보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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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잔의 별명이

nocturnal animals (야행성 동물) 이었다.


 

미리 힌트를 조금 보채자면, 이 책은 작가 에드워드의 내면적 상태가 활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에드워드가 수잔과의 결혼생활에서 받았던 뼈가 깎인 고통과 눈물을 뭉쳐서 만든 복수의 소설이다. 사실 말과 형태만 소설이지, 수잔에게 복수의 칼을 보낸 거와 다름없다.

 

아직 소설을 보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수잔은 그의 글을 오랜만에 넘기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의 화면도 에드워드가 공들여 쓴 책 속의 배경으로 넘어가, 주인공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수는 산만하지 않고, 짧은 시간 내에 몰입할 수 있도록 3명이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토니(애드워드), 수잔, 그리고 그들의 딸까지다. 소설에서는 책을 집필한 애드워드가 토니로 나오는 일인이역의 모티브를 통해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쓸 수 없다고 주장했던 애드워드의 간접적인 경험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반면에 수잔은 이름만 같고 소설 밖에 나와 있는 인물로서 표현되며, 그녀는 오로지 독자로서 글을 읽는 과정을 통해 토니의 심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역을 에드워드로부터 부여 당했다.

 

소설은 토니와 수잔 그리고 그의 딸이 수신이 잘 통하지 않는 깊은 산길로 드라이브를 시작으로 출발된다. 차로 달리고 있는 도중, 폭력적인 일행들과 도로에서 시비가 붙게 되고 실랑이 끝에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하고 단숨에 잃어버린다. 이는 토니의 연약하고, 저 끝으로 눌러져버린 극도의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현실에서 에드워드와 수잔의 연애시절, 수잔의 엄마는 이 결혼을 반대했었다. 에드워드가 섬세하고, 로맨틱하고 감성이 풍부한 친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작가라는 꿈을 향해 둥둥 뜬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물질만능주의였고, 현실적이었기에 이와 반대되는 딸 수잔과 늘 의견 대립이 팽팽했다. 모녀의 성격과 성향이 극도로 맞지 않았다. 수잔은 그런 엄마를 닮지 않겠다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고, 결국 에드워드를 선택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애드워드는 수잔에게 자신이 쓴 글을 다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글을 피드백 해주는 수잔은 빨간 소파에서 인어공주 자세로 누워 이렇게 말한다. 너의 얘기를 쓰지 말고, 다른 이야기들을 써보라며 그의 능력을 무 자르듯 잘라버리고 자괴감을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다시 소설로 넘어가서, 토니는 행방불명된 아내와 딸을 허름한 폐허 앞 빨간 소파에 맨몸으로 누워있는 둘을 발견한다. 가해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나체로 누워있는 딸과 아내를 지켜보면서 토니의 억장은 밑으로 깔려지고, 무너진다. 여기서 놓치지 말고, 자세히 봐야 할 것은 토니의 무너진 감정이 토니가 바라보는 소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빨간 소파에 누워 현실에서는 직접적인 못으로, 소설에서는 간접적인 못으로 그의 가슴팍 깊은 수심에 심어버리고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 둘을 눈 뜬 채, 지키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능력의 처참한 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처참한 감정은 소설에서만 겪게 된 첫 번째 사건은 아니다. 현실에서 아내 수잔은 엄마에게 들었던 말이 실제로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일을 겪게 된다. 지금은 좋았던 그의 모습이, 몇 년만 지나면 가장 싫은 지점이 찾아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이었던 엄마를 그렇게도 닮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딸 또한 현실을 찾아 떠났다. 딸은 자연스레 엄마를 닮아갔다.

   

애드워드에게 권태를 느낄 때쯤, 수잔은 다른 남자를 만났다. 다른 남자 품 안에서 에드워드의 아이를 몰래 지웠다고 말하며 품에 파고드는 모습을 애드워드는 시퍼렇게 눈 뜨고 지켜봤다. 아내와 자신의 전부였던 아이를 임신한 것도 비밀로 하고, 조용히 지운 이유가 그 남자와의 새로운 출발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애드워드는 살을 찢는 수술의 고통을 마취 없이 받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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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 아내 수잔의 외도를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애드워드


 

그렇게 다시 토니는 자신의 딸과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형사와 매 순간 동행한다. 형사는 범인인 가해자들이 발뺌하는 태도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기억 못 해도, 피해자는 기억해.” 이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전달 사항이며, 또다시 현실과 연결되는 대사로 감독은 기막힌 연출로 설명한다. 갤러리의 단장인 수잔은 직원들과의 회의 내용에서 말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수잔은 결혼생활에서 물로 씻겨 내려가지 않는 토니에게 가한 상처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으며, 지금은 알았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느꼈던 고통을 반의반도 생각하지 못한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왔던 것이다.

 

현실에서 할 수 없었던 복수를 끝끝내 토니는 소설이라는 가상에서 가했다. 즉, 에드워드는 작가로서 자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의 결말을 마무리 지었다. 작가로서 아내에게 조롱당했던 글솜씨를 발전시켜, 고통을 이입시키게 만들고 글솜씨를 또다시 총솜씨로 변형시켜 가해자를 죽인다. 그러나 혼자만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총을 자신에게도 저격하며 이 소설을 처량하고 건조하게 마무리 짓는다. 세상의 속도와 감성에 맞지 않게 너무나도 착했던 토니여서 그랬을까. 가해자만 죽고 있는 걸 보지는 못했던 모양으로 자신에게도 총을 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애드워드는 선하고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복수를 결심하는 태도를 보니 모든 것을 유연하게 대처하고 품을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도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인정했기에, 자기 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소설이라는 마무리를 택해 수잔에게 잔혹한 복수를 날렸다.

 

수잔은 시간이 흘러넘쳐 버린 후에야, 애드워드의 비로소 마음을 읽게 되었다. 그의 소설을 통해 소식이 다시 닿아진 이 둘은 만나기로 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게 된다. 옛 감정에 다시 취해 설레는 감정으로 옷을 예쁘게 입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애드워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몇 시간이 흘러도, 몇 년이 흘러도 그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수잔과의 관계 속에서 신뢰와 사랑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상호 작용될 수 있는 감정의 변호에 대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각인시키며 고요한 정적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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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이 사놓고, 기억 못 하는 REVENGE 작품


 

revenge는 복수다. 복수. 사랑했던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심경은 옹졸해 보이고, 찌질해 보이지만 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에 대한 인상은 사람 간의 사이에 중요하다는 말이 속속히 넣어져 있는 영화다.

 

한 인간에게 오랫동안 줏대 있게 지니고 있던 가치관도 서서히 바뀌게 되고, 꼿꼿이 세워놓으려 해도 바뀔 수밖에 없는 흐름 빠른 사회에 살고 있다. 흐름이 빠르다는 말의 해석은 나는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현재 우리는 맺고 끊어버리는 과정이 매우 간단하고 잔인한 관계망 사이에 서있다. 좋은 감정으로 시작해서, 둘 중 한 사람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리면 관계를 한순간에 증발시켜버리고 만다. 충분한 대화를 해보지도 않고, 내 마음 하나 편하자고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상대방의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편하게 정리하기 위해 그 순간만 어떻게든 지나가길 바라며 회피한다. 그렇게 남겨진 상대방은 어안이 벙벙하고 허탈한 방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의 감정 해결 속도에 따라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을 극심한 고통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간다. 마치 소설로 모든 감정을 토해낸 애드워드처럼.

 

그리고 때로 우리 모두는 수잔 같다.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질린다고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빠르게 다음 상대를 입는다. 그러나 그 상대로 충족될 것 같았던 마음은 수잔처럼 헛헛하고 빈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점을 간과했던 사람이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벌의 최고조다.  수잔은 현실에서 남부럽지 않게 다 가진 삶을 살았지만, 사랑이 없는 남편과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모습만 휘황찬란하다. 아마 이 사실을 전남편 애드워드가 알고 있어도, 측은지심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땅한 죗값이다.

 

아름답다는 반짝이는 형용사와 이별이라는 메마른 명사는 한 문장으로 나열되기에 어색하고 상반된 이미지다. 즉 아름다운 이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별에는 아름답게 치환될 수 없으며, 좋게 끝났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상처 아닌 상처를 서로에게 남기기 마련이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이별도 피부에 부어올랐다가 가라앉을 시간이 두텁게 필요한데, 굳이 상대한테 막강한 펀치를 날려서 쓰라린 낮과 밤을 전해줘야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애드워드의 복수는 잔잔하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진듯하다. 수잔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작가적 재능을 그녀에게 다시 보여주며 등장인물을 통해 이입된 감정의 잔상을 남게 하고, 배신한 그날의 해명조차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 모든 행동은 수잔을 사로잡음으로써 소설의 생생함이 마치 현실인 듯한 마무리를 지었다.

 

** 

 

입학식보다 졸업식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해서 치르는 섬세한 마음가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공간에서 정든 모든 이들과 건넸던 씩씩한 인사들이 머릿속에 맴돌아 있다. 6년, 3년, 3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관계를 맺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마지막을 정의 내리고, 해석 내리는 시간들은 개개인에게 필요한 요소다. 그래서 바로 본 졸업식을 치르는 것이 아닌, 몇 번의 리허설을 통해 빠진 것이 없나 준비하고 긴 시간을 투자했던 이유를 성인이 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처럼 타의적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졸업식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 때도 있어야 한다. 어설픈 매듭은 힘없이 풀어져 버리기 일쑤니, 용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매듭의 모양새를 단단히 여매야 하는 의미를 잘 간직하며, 이 세상 모든 수잔들에게 이 글을 바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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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누굴 사랑하면 노력해.

그냥 포기하지마.

영원히 놓칠 수도 있으니까."

 

 

[조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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