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임감 있는 타자로서 존재하기 - 돌연변이 [영화]

글 입력 2020.12.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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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中

 

 

사르트르의 연극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닫힌 방>(1943)은 이미 죽음을 경험한 세 명의 인물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이 ‘닫힌 방’에 차례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도, 창문도, 그리고 탈출할 수 있는 출구도 없는 ‘닫힌 방’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점차 서로에 대한 ‘인정’과 ‘위로’ 그리고 ‘닫힌 방’에 귀속된다.

 

결국, ‘닫힌 방’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자발적으로 문을 닫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겪지만 결국 그 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처럼 사회 속에서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타자’(他者)들과 마주하는, 마주해야 하는 우리에게 그들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번 글은 ‘존재’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를 통해 타인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강조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통해 영화 <돌연변이>(2015)에서 타인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과 ‘윤리’의 철학



‘타자성’(他者性, altérité)의 철학으로 알려진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 리투아니아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헤브라이어 성서를 통해 유대주의를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러시아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 대학에서 훗날 자신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에드먼드 후설(Edmund Husserl)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이론을 접하게 된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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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후 레비나스는 학교에서 잠시 벗어나 후설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공부했다. 그러나, 독일 나치당 집권 이후 자신의 철학적 스승으로 여겼던 하이데거가 나치당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하이데거를 비롯해 당대 유럽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존재론적 사유 속에서 전체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이기심’을 포착하게 된다.

 

이에 레비나스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자신의 경험과 함께 무참히 학살된 가족의 경험 그리고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당한 동족들의 경험을 인용함으로써  기존의 ‘전체성’과 ‘전쟁’에 대한 인식 속에서 처참히 외면받았던 인간 존재의 ‘고통’에 주목하고자 했다. 이때,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고통을 제거하고 나아가 개인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타인을 자신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전체성과 전쟁을 비판하고자 했다.

 

인간 존재의 재정의를 위해 레비나스는 먼저 인간 의식 속에 나타난 ‘현상’을 ‘직관’을 통해 객관적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후설의 현상학을 방법론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개인이라는 주체들의 주체성에 주목했다. 이때, 후설의 이론이 지나치게 주체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주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역사성’의 차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를 보충한 레비나스는 ‘죽음’으로 대표되는 ‘시간성’ 앞에서 개인이 수많은 타인 가운데 자기 자신을 깨달아가는 ‘초월’의 과정을 제시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와 달리 ‘죽음’과 상관없이 개인이 수많은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탈’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음을 주장했다.

 

나아가, 레비나스는 개인이라는 하나의 주체가 타인이라는 객체에 대해 보이는 ‘우월성’ 즉, 자기 자신의 것만을 ‘절대화’하고 자신과 다른 모습을 가진 타인을 ‘대상화’, ‘객체화’시키는 인간 존재의 ‘이기심’으로 인해 개개인 간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충돌이 곧 종족주의를 비롯한 ‘전체성’과 ‘폭력’이나 ‘전쟁’으로 점차 확대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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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의 이론은 ‘여성’을 불확실한 ‘사랑’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존재이자 ‘집’에 머물며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지친 ‘남성적’ 주체들을 도와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여겼다는 점에서 다소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에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사상은 하나의 개인이라는 주체와 타인이라는 객체 간의 ‘전환’을 모색함으로써 ‘타자성’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개인이라는 주체가 타인이라는 객체를 앞지를 수 있다는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고 개인의 ‘자기중심적’ 성격만을 중시했던 ‘존재론적’ 사유를 거꾸로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아가, 타인에 대한 ‘책임’과 ‘윤리’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그동안 외면당했던 타인의 ‘고통’과 그의 ‘해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윤리론적’ 사유라는 새로운 철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절반의 ‘얼굴’, 절반의 ‘주인공', '절반이 되어준 사람들’에 대한 영화



레비나스의 타자성과 함께 살펴볼 영화 <돌연변이>는 불쑥 찾아온 주진으로부터 ‘생선 인간’ 박구의 이야기를 듣게 된 방송사 PD 상원이 구와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기자가 되고 싶었던 상원에게 당시 면접관이었던 상원의 상사는 파업한 기자들을 대신해 인터넷에서 자신의 남자친구가 생선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생선녀’에 대한 인터뷰를 받아오는 조건으로 그를 합격시킨다. 이에 ‘생선녀’ 주진을 찾아간 상원은 간미제약 생동성실험 이후 상반신이 생선처럼 변하게 된 구가 어느 날 그녀에게 찾아왔을 때 사례금을 받고 간미제약에 그를 제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 주진과 함께 간미제약 실험실에서 잠입해 실험을 당하고 있던 구를 발견한다.

 

그렇게 세상에 밝혀진 생선 인간 구와 간미제약의 생동성 실험 이야기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자 상원의 상사는 상원에게 시용기자직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구에 대한 인터뷰를 지시한다. 이에 상원은 구와 주진, 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구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소개하며 구를 인터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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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대판 생체실험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간미제약의 실험이 오히려 식량난 해소뿐 아니라 암 극복에 도와 인간 수명의 연장을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서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자로서 비밀실험을 주도한 변 박사를 옹호하는 쪽과 이와 반대로 청년세대의 아이콘으로서 비밀실험에 희생된 박구를 옹호하는 쪽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대립은 구와 간미제약 간 법적 공방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때, 소수자 인권 운동으로 알려진 인권 변호사 태곤의 도움으로 구는 1심 판결에서는 승소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쏟아지는 관심과 달리 이미 생선화가 많이 진행된 구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구의 주변 인물들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고 그동안 구의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던 주진은 결국 구의 곁을 떠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재판으로 인해 연구가 지연되고 있다는 권 박사의 인터뷰와 함께 구가 실험 전 서약을 어기고 간호사를 성추행했다는 파문이 일자 점차 여론은 간미제약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끝내 구는 패소하게 된다.

 

재판 이후, 지나친 관심에 부담을 느껴 홀연히 사라지고자 했지만 이내 그동안 자신을 이해해 준 상원을 다시 찾은 구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남긴 채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선화된 몸으로 인해 구는 죽음을 면하게 되지만 그동안 태곤이 변 박사 측과 몰래 내통했다는 사실과 상원이 자신을 취재하려고 했던 기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을 배상금과 바꾸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다. 결국, 구는 유일하게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주려고 했던 주진을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게 되고 다시 간미제약의 실험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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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박구가 실험 중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상원은 그의 빈소에서 처음으로 구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가 가고 싶다던 바다에서 그를 보내준다. 한편, 구의 죽음 이후 다시금 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고 그동안 변 박사가 구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방조했다는 주장을 확보한 태곤에 의해 구는 최종 판결에서 승소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영화 초반부 장면. 구의 죽음 이후 5년 만에 상원을 찾아온 주진은 구를 보내주던 날 찍었던 사진을 건네주고 상원은 사진에 찍힌 구의 손을 발견한다. 이에 변 박사로부터 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생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남긴 채 바다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상원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만 이내 한 영상에서 구의 모습을 발견한다.

 

<돌연변이>는 어느 날 생선 인간이 되어버린 주인공 박구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욕망’과 함께 그들의 민낯, ‘미성숙’을 보여준다. 구를 단순히 ‘실험체’라고 생각하면서 후유증으로 변해버린 그를 비웃는 연구진들과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구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종교계 및 정치세력의 모습은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단순히 타인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미성숙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구를 도와주고자 찾아오지만 결국 그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단순히 금전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구의 아버지와 태곤의 모습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지만 결국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는’ 미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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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달리 평범하게 태어나 공무원이라는 평범한 직업을 꿈꾸었지만 생선 인간이 되어버린 주인공 구와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서도 기자를 꿈꾸었던 상원 그리고, 사회와 단절된 채 온라인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내던 주진까지. 영화는 우리가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 청년층이 사회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연대’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서 각자의 ‘미성숙’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통해 세대갈등 및 청년실업 문제, 무책임한 언론 보도 문제를 신랄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타인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기도 한다.

  

 

 

타인이 타인을 잃어가는 순간, ‘돌연변이’가 되는 순간


 

영화 <돌연변이>는 지극히 ‘평범했던’ 구라는 인물이 제목처럼 ‘돌연변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영화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 속에서 점차 자기 자신을 잃어갔던 사람에 대한 ‘진실’을 물어보는 영화이다.

 

이때, 영화는 ‘얼굴’이라는 장치를 활용하고자 하는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은 개인이라는 주체 스스로가 가지는 ‘신체’임과 동시에 타인이라는 객체(혹은 또 다른 주체)에게 있어 보여주는 ‘정신’(윤리)를 의미한다. 즉, ‘영혼이 담긴 굴’ 혹은 ‘영혼이 있는 꼴(모양)’이라는 그 어원처럼 ‘얼굴’은 자기중심적인 차원에서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책임과 배려를 담아내는 공간인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여전히 ‘일반적’ 기준과 다른 얼굴의 구에게 쏟아지는 차갑고도 잔혹한 시선을 통해 레비나스의 말처럼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에 대한 생각에 앞서 타인이라는 객체의 존재와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기심’과 ‘전체성’의 ‘돌연변이’ 같은 사회를 ‘고발’하고자 한다.

 

나아가, 구의 얼굴을 받아들이고 그를 도와주고자 했던 주진과 상원의 모습, 구의 얼굴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자신의 이기심에 굴복한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구의 얼굴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변 박사의 모습을 통해 구라는 객체가 존재 자체로 ‘인정’되고 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임의 가능성과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는’ 자신만의 꿈을 이루게 된 하나의 존재를 보여준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이 순간에만 우리가 스스로를 어찌할 수 있기 때문이라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이 만난 그 사람이오.

왜냐하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상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지.

오직 그것을 위해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中


지금 이 순간도 ‘닫힌 방’에 갇힌 우리들.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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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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